303화 아버지의 진심
“그다음은?”
“어머니께서 저를 보낼 때 우물 옆 벽돌 밑에 숨겨 둔 물건을 찾아 잘 보관하라고 신신당부하셨던 게 기억이 나 찾아봤더니, 편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하나 글을 읽지 못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 보여 줄 수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글을 배워 부모님이 죽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어머니께서 소씨 가문 노부인을 도와 딸 한 명을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지요. 그 말인즉, 소씨 가문이 잃어버렸다고 한 그 딸은 처음부터 가짜였습니다.”
목운요는 예상했던 대로의 결말이라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그 편지,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
장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워낙 큰 비밀이라 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군주께 드리겠습니다.”
“그래.”
하나 그것보다도 목운요가 가장 궁금한 건 아버지 목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 아버지와 돈독한 사이라고 했던 말은 사실이냐?”
“소인, 어찌 감히 군주를 속이겠습니까.”
“그럼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장력이 한참을 회상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두 살 연장자라 목성 아우가 늘 저를 장형이라 불렀습니다. 저희 둘이 함께 작은 장사를 했었고, 또 둘 다 소씨 가문에 원한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더욱더 가까이 지냈습니다.”
“듣기론 아버지께서 소씨 가문의 덕을 본 적이 있어 그들을 도와 일을 했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목운요는 늘 궁금해 왔던 질문을 조심스레 던져 보았다.
장력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군주께서 뭘 궁금해하시는 건지 잘 압니다. 하지만 소인 감히 목숨으로 단언컨대, 목성 아우는 진심으로 소 부인을 사랑했습니다. 목성 아우는 고아였고 의리를 중히 여겼지요. 그래서 자신을 데려다가 키워 준 소씨 가문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 부인을 만난 뒤로는 마음이 바뀌어,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 소 부인의 진짜 가족을 찾아 주려고 애썼습니다.”
“진짜 가족? 그럼 아버지께서 처음부터 어머니가 소씨 가문의 친딸이 아닌 걸 알고 계셨단 말이냐?”
“아무래도 소씨 가문 노부인이 소근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쏟는 한편, 소 부인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으니 당연히 의심이 갔을 겁니다.”
목운요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사실 그녀는 답을 듣기가 겁이 났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처음부터 어머니를 이용만 했을 뿐, 진심이 전혀 아니었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장력의 말을 듣고 나니, 적어도 어머니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아버지께선 뭘 알아내셨느냐?”
“처음에 저흰 서로의 신분을 몰랐습니다. 목성 아우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소씨 가문에서 박해를 가했을 때, 제가 목숨을 구해 주며 그와 소 부인 사이를 알게 되었죠. 제가 어머니의 유품을 보여 주자, 목성은 펄쩍 뛰며 이걸 이용해 소 부인의 진실을 밝혀 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소씨 가문에 발각되었고, 궁지에 몰린 목성은 친필 서신만 남긴 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죽은 채로 강에서 발견되었지요.”
장력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까지 붉혔다. 성인이 되고 나서 사귄 첫 막역지교였다. 그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의 원한을 씻겨 줄 딸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목운요가 문득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친필 서신을 남겼다고 했지. 서신의 행방을 아느냐?”
“제가 숨겨 두었습니다. 군주께 모두 드리겠습니다.”
“이것들을 어디에다 숨긴 것이냐?”
“서릉의 한 폐가 마당에 깊숙이 묻어 두었습니다.”
“꽤 신중히 숨겼군.”
장력이 어두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벌써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데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왜 도망가려 했던 것이냐?”
“사실…… 겁이 났습니다. 소씨 가문은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줄곧 제 행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잡힐 뻔하다 겨우 살아남다 보니, 군주께서도 저에게 죄를 물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인간인가 봅니다. 어떻게든 계속 살고 싶었습니다. 군주와 소 부인의 진짜 신분도 만천하에 밝혀졌으니, 목성 아우의 바람도 이루어진 거나 마찬가지기에 군주께 굳이 이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듯한 장력의 표정을 보고 목운요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네가 숨겨 둔 증거들이 나한테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거기에 내 아버지와 돈독한 사이라고 하니, 정말 결백하다면 나 또한 절대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시켜 안전을 지켜 줄 테니 여기서 마음 편히 지내도록 하라. 다만 서릉에 돌아가서 증거를 순천부에 건네주고 증인으로서 증언도 해야 할 것이다.”
“군주, 소인은 일개 백성에 불과하여 소씨 가문에 맞설 힘이 없습니다…….”
“지금의 소씨 가문은 상갓집 개 신세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의덕 장공주의 외손녀인 내가 설마 그깟 소씨 가문 하나 상대하지 못할 것 같으냐?”
“알겠습니다.”
장력이 나간 뒤, 목운요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월왕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나?”
목운요가 고개를 들어 살며시 그에게 기댔다.
“늘 마음에 걸렸던 일이 해결되어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피곤함이 몰려드네요.”
“혹시 네 아버지가 부인께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을까 봐 걱정했던 것이냐?”
“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거든요. 근데 혹시라도 현실이 생각과 다르다면, 어머니께서 무너지실지도 몰라요.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께서도 어머니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네요.”
“그래.”
목운요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력, 그자를 애타게 찾을 땐 감감무소식이더니. 여기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소씨 가문의 악행을 벌하려고 하늘이 증인을 보내 준 듯하구나.”
그의 말에 목운요도 동의했다.
“사야, 서릉으로 돌아가면 함께 보화사로 가서 분향하시지요.”
“전엔 분향하는 걸 꺼리지 않았더냐?”
“여러 일을 겪어 보니 경외심도 점점 생겨나는 것 같아요. 이번 생을 무사히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회귀 전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녀의 하루하루는 지옥과도 같았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 생에도 고난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결국 전부 순조롭게 잘 해결되었다. 하늘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 모든 일이 해결되면 어디든 함께 가 주마.”
월왕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목운요는 얼굴이 빨개졌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어차피 평생을 약속한 사이거늘, 그런 사소한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목운요의 붉어진 볼을 보자, 월왕의 마음은 나른해졌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낼까 급히 덧붙였다.
“요아, 혹시 이런 내가 너무 경솔하다고 느껴지느냐?”
월왕이 목운요의 앞에 웅크려 앉으며 긴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에게 푹 빠지고 나서부터 그는 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할 때면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싶었고, 다가가면 손으로 만지고 싶었고, 만지게 되면 더 큰 욕심이 생겨나서…… 그에게 있어서 엄청난 시련이었다.
월왕의 긴장한 표정을 보고,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냉담하기로 소문난 월왕 전하께 이런 모습도 있었네요.”
월왕은 목운요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며 말했다.
“네가 이 속에 들어간 순간부터 내 심장은 한결같이 뜨거웠다.”
목운요를 볼 때마다 그는 심장이 뜨겁다 못해 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혹여라도 목운요가 이런 그의 모습에 놀랄까 봐 늘 숨겨 두고 있었다.
목운요는 월왕이 전에 자신한테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그의 미간을 살짝 밀며 대답했다.
“제 앞에서만 이런 모습 보여 줘야 해요. 다른 여자 앞에선 절대 안 돼요.”
월왕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의 마음에는 온통 목운요뿐이었다. 다른 여자는 들어올 틈조차 없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다 해도, 목운요는 늘 가장 크게 빛나는 무지개와도 같았다. 월왕은 그 무지개를 손에 꽉 잡은 채 영원히 놓고 싶지 않았다.
월왕의 웃는 모습에 목운요가 다시 한번 손으로 그의 머리를 콕 밀었다. 한번 해 보고 나니 왜 그가 자신한테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 * *
며칠 뒤, 유왕이 기수성에 도착했다. 그는 월왕을 보자마자 감격스러움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월왕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고 나자 실감이 났다.
“둘째 형님을 뵙습니다. 임강성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여기에 오신 겁니까?”
“며칠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괜찮다. 네가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밤새 다시 돌아가면 된다.”
목운요는 유왕을 막사 안으로 모신 뒤, 직접 차를 우려 내왔다.
월왕은 찻잔을 보고 기뻐하며 물었다.
“운요, 나도 이제 차를 마실 수 있는 거지?”
그에 목운요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화과차라 사야께선 아직 드실 수가 없어요. 조금만 더 참으세요.”
유왕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차 맛이 좋구나. 산 중턱에서도 이런 고급 차를 즐길 수 있다니, 역시 운요답구나.”
“저도 오늘 처음으로 내린 건데 유왕 전하께서 운 좋게 맛보셨네요.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전 다과를 좀 가져올게요.”
“운요.”
월왕이 목운요를 불러세웠다.
“천천히 준비해도 되니 일단 와서 앉거라.”
월왕의 한없이 부드러운 태도에 유왕은 속으로 탄복했다.
모든 사람한테 얼음처럼 차갑기만 한 넷째 아우가 목운요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바라보는 눈빛과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이런 말투로 부황을 대했더라면 아마 월서로 보내지지 않았을 것이리라.
그는 새삼 월왕을 이렇게 변화시킨 목운요가 대단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