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기수성으로
* * *
다음 날 아침, 유왕이 목운요를 배웅 나왔다.
“운요, 무사히 잘 도착해서 아우를 꼭 찾길 바란다.”
“네. 임강성은 유왕 전하께 맡기겠습니다.”
“걱정 말거라.”
목운요는 곧장 말에 올라타 성문으로 향했다.
유왕은 목운요를 배웅하고 난 뒤, 다시 관아로 돌아가 문서와 진술서를 꼼꼼히 살폈다.
부하가 음식을 가져다주며 걱정스레 말했다.
“전하.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는데, 식사라도 잘 챙기셔야 합니다.”
유왕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쉴 시간이 없구나. 하루빨리 진실을 밝혀야 더 큰 문제가 안 생긴다.”
“온한 군주께서 문서와 진술서를 두고 가셨는데, 그걸로는 부족한 건가요?”
“허, 시간 나면 책을 더 보거라. 무공에만 매진하지 말고. 고작 소금 상인, 임강 동지, 그리고 작은 현령 같은 인물들은 이렇게까지 큰일을 벌일 담력이 안 되지. 소금세 장부 위조에, 관은 위조까지……. 그들같이 교활한 자들은 절대로 목숨 걸면서까지 이런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거다.”
“전하, 그 말씀은…….”
“소금세 장부와 관은 위조의 목적은 소금 상인들의 탈세 혐의를 씻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진짜 세금을 숨기려는 것이다.”
“이번 분기의 소금세만 해도 은자 삼백만 냥에 달하는데,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요. 전하, 그럼 진짜 은자는 어디에 숨겼을까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도움 없이, 과연 그들의 힘만으로 순조롭게 증거를 숨길 수 있었을까?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은자를 서릉으로 옮겼겠지.”
“서릉에서 누가……! 전하, 이건 생각 이상으로 큰 사건 같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전하한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습니다.”
유왕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지만 눈빛은 무섭도록 차가웠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늘 말씀하셨지. 대장부로서 상황에 맞게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절대로 나쁜 짓을 하게 두고만 볼 수야 없지.”
섬뜩한 그의 표정을 보고 부하는 말을 아꼈다.
유왕은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듯 보여도, 전장에만 가면 적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는 잔인한 면이 드러났다. 아마 이번 사건의 배후는 유왕에게 혹독하게 당하게 되리라.
무거운 표정도 잠시, 유왕이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후, 운요한테서 뜨거운 감자를 건네받은 셈이지. 게다가 거절할 수도 없고 말이야. 어리숙한 넷째 아우가 꽉 잡혀 살까 봐 걱정이구나.”
* * *
기수성으로 가던 중, 우연히 만난 한 노인이 목운요 일행에게 충고를 건넸다.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마십시오. 산사태와 홍수가 일어나 마을들을 휩쓰는 바람에 도저히 지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귀인들께서 기꺼이 기수성에 가셔야 한다면, 도로가 뚫릴 때까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사금이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 혹시 도로가 언제 다시 통하는지 아십니까?”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다만 한두 달은 훌쩍 넘길 듯 보입니다. 기수성의 피해가 다른 두 군데보다 훨씬 심각하니. 지금도 성 전체가 물에 잠겨 있을지도 모르지요.”
목운요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돌아서 가면 기수성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산길로 돌아가려면 봉우리 두 개를 넘어야 하니까, 빨라도 이삼일은 족히 걸리겠지요. 그러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지금 가 봤자 살길이 없습니다.”
그 말에 목운요는 가슴이 아파 왔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산길로 돌아서 기수성으로 가자.”
노인은 더 만류하고 싶었으나, 하나같이 결연한 모습의 이들을 보고 별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착한들 어쩌리, 산 사람 하나 없는데…….”
* * *
산속의 한 동굴 안.
월왕이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한쪽 팔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대충 감싼 천은 새어 나온 피에 젖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바짝 마른 입술은 갈라져 핏자국이 선명했다.
동굴 안에는 꽤 많은 이재민이 피신해 있었는데, 오랫동안의 굶주림으로 인해 사람들은 모두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한 여인이 비명을 지으며 옆에 있던 남자를 밀쳤다.
“내 아이한테서 손 떼……!”
여인의 품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이가 안겨 있었고, 숨을 가쁘게 쉬는 걸 보아하니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남자는 그런 여인을 발로 차더니 아이를 빼앗아 든 채 달려가며 소리 질렀다.
“어차피 곧 죽을 텐데 늑대 배라도 채워야지. 안 그럼 우리 모두 늑대 먹이가 돼!”
그에 눈을 감고 앉아 있던 월왕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가 옆에 세워져 있던 검을 들어 남자를 막아섰다.
“당장 아이를 돌려주거라.”
남자는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월왕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탓에 우리가 이렇게 늑대들의 사냥감이 되어 숨어 지내는 거잖아! 전부 당신 탓이야! 우리가 다 죽길 바라는 거야?”
기수성이 물에 잠기면서 그들은 산속으로 도망갔다. 한데 겨우 동굴로 피신했더니 바깥에는 굶주린 늑대 떼가 득실댔다.
어쩔 수 없이 이재민들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동굴 안에 고인 물만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빨리 다른 살길을 찾지 않는다면, 전부 이곳에 발이 묶인 채 늑대 먹이가 될 게 뻔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사람이 스스로 짐승을 자처하면 계속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월왕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손에 든 칼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힘들어 보이는 안색과 달리 여전히 좌중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때,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늑대 떼들이 동굴 밖에서 울음소리를 냈다.
남자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가 거절하면 어쩔 건데?”
“죽일 것이다.”
월왕의 눈빛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그 순간, 남자가 갑자기 안고 있던 아이를 월왕한테 던졌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무리 속에서 몇몇 남자들이 일어나 월왕한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화가 난 우항은 벽을 짚으며 다가와 월왕을 보호했다.
상처투성이인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무공으로 단련한 몸인지라 잠깐 사이에 남자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당신들 양심도 없어? 우리 주인님께서 당신들을 홍수에서 구해 주다 중상까지 입으셨는데, 이런 식으로 은혜를 갚는 게냐?!”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배고파 미치겠는 걸 어떡해……! 지금 벌써 스무날도 넘게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고! 둘이 나가서 늑대를 잡아 올 것도 아니면서, 우리가 스스로 방법을 찾겠다는데 왜 막는 거야?”
“굶주린 늑대 떼 중 한 마리라도 건드릴 경우,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죽을 것이다!”
고마워하긴커녕 외려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며 우항은 분노가 치밀어 이를 꽉 깨물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뭔 상관이야? 짐승들은 며칠 더 버틸지 몰라도, 우린 더 이상은 못 해.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을 때 뚫고 나간다면 그래도 몇 명은 살아남을지도 몰라. 이렇게 숨어만 있다 나중에 걸을 힘조차 없어지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늑대 밥이 되고 말 거라고!”
말은 그럴싸했지만, 정작 남의 목숨을 제물로 바칠 생각만 있을 뿐, 전혀 앞장서 싸우려는 마음이 없어 보였다.
“내가 그렇게 산으로 가지 말자고 말렸거늘, 기어이 고집을 부리며 우리를 동굴로 데려오더니. 이제 어떻게 책임질 건데? 내 말대로 다른 곳에 갔더라면 지금쯤 뭐라도 먹기는 했을 거다!”
“우린 너희들을 억지로 끌고 온 적 없다. 전에는 목숨을 구해 달라며 빌붙더니, 이제 와서 모든 잘못을 우리 주인님께 돌리는 것이냐? 당신들같이 배은망덕한 사람들은 애초에 구하는 게 아니었어!”
우항의 말에 몇몇 이재민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너무 굶주린 나머지, 앞장선 남자의 선동에 혹해 얼떨결에 월왕한테 덤벼든 것이었다. 한데 머릿수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열세에 몰리자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앞장선 남자는 여전히 비꼬듯이 중얼거렸다.
“누가 살려 달랬어?”
그때, 월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우항, 저자를 바깥에 내던져라.”
남자는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당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나를 던지다니? 나 말고 당신네가 앞장서야지!”
월왕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다. 우리가 걸을 힘조차 없게 되면 늑대 떼들을 상대할 수가 없지. 지금 포위를 뚫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그렇다면 당연히 수를 생각해 낸 사람이 앞장서야 맞는 거 아닌가?”
“안 돼, 이거 놔! 지금 일부러 나한테 복수하려는 거지?!”
다른 이재민들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항은 그들을 신경 쓰지도 않고 남자의 두 팔을 부러뜨렸다.
“조용히 입 다물면 두 다리는 남겨 두지. 그래야 늑대 떼들을 만났을 때 도망이라도 칠 수 있으니까.”
“안 돼, 안 돼…… 이거 놔! 벼슬아치가 이렇게 백성들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겨도 되는 것이냐? 백성들의 피땀으로 봉록을 타 먹는 주제에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다니……!”
우항이 냉소를 지었다.
“당신이 그랬잖나. 우리 두 사람이 무공에 능하니 늑대 떼들을 상대해야 마땅하다고. 그럼 당연히 우리가 남아서 남은 이재민들을 보호해야지. 당신 목숨 하나로 여기 모든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데, 혹시 싫은 것이냐?”
“이, 이건 순 억지야!”
“우리가 앞장서도 된다. 그러면 늑대 떼들을 피해 무사히 빠져나갈 수도 있지. 한데 그럼 남은 사람들의 생사는 어떻게 되지?”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황급히 나서서 소리쳤다.
“안 됩니다. 두 분께서 절대로 앞장서시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을 내보냅시다. 죄 없는 아이를 늑대한테 주려고 하는 걸 보아하니, 아주 심보가 못된 사람입니다!”
“그래!”
“맞아요……!”
그 광경을 지켜보는 월왕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결정이 났군. 우항, 시작하거라.”
“네.”
“안 돼, 안 돼…….”
남자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우항이 그를 끌고 가서 동굴 밖으로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