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반가운 등장
“……소관, 필히 군주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목운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말이 통하는 분이군요. 유왕은 지금 어디에 가로막혀 있는 거죠?”
“그건…… 잘 모릅니다…….”
애써 부인하려던 주부는 목운요의 미소를 보고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진왕 전하의 수하들이 바위로 입성 도로를 막아 버리는 바람에 유왕 전하 일행은 현재 동릉성 근처에 갇혀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돌아가서 일 보세요.”
“네.”
임강 현아 주부가 나간 뒤, 목운요는 임강 동지의 진술서를 다시 챙겨 뒀다.
“소저, 임강 동지의 진술을 믿어도 될까요?”
“한 사람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 지금은 물증을 더 확보하는 게 중요해.”
워낙 믿기지 않을 만큼 소름 끼치는 얘기다 보니, 한 사람의 말로 단정 짓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물증이 쉽게 찾아질까요? 홍수에 모든 것이 쓸려 가 버린 이 마당에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목운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곧 물증을 찾게 될 거야.”
“네? 혹 물증을 찾아낼 방법을 이미 알아내신 건가요?”
“방금 임강 현아 주부를 부른 이유가 고작 그 몇 마디를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그럼…….”
“임강성에 도착했을 당시, 주변엔 노인과 부녀자만 있을 뿐, 청년이 하나도 안 보였지. 처음엔 주부를 따라 수로 공사에 참여하러 간 줄 알았지만, 실제로 공사 중인 이들은 결코 일반 백성처럼 보이지 않았어. 게다가 공사한 지 보름이나 지났지만 제방을 보강하지도 않은 채, 강 언저리를 계속해서 파며 뭔가를 찾는 듯했지. 그들의 진짜 목적이 뭐라고 생각해?”
사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저 말씀대로라면, 그들이 지금 물에 잠긴 위조 관은을 찾는다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주부의 침착한 행태로 보아 이미 어느 정도 찾았을 테지. 이번 소금세 사건이 릉왕과 진왕 두 사람이 강남에서 벌이는 가장 큰 힘겨루기다 보니, 그 누구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거야. 릉왕은 진왕의 덜미를 끝까지 잡을 것이고, 진왕은 혐의를 씻으려는 한편 월왕 전하를 음해해 더 큰 사건으로 덮으려 하겠지. 그래서 나도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해야 해.”
사금은 여전히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소저, 혹시라도 릉왕 전하께서 거절하시면요?”
“릉왕이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거야. 황위 교체를 앞둔 이 중요한 시기에, 황자들 중 그 누구도 외할머니의 세력과 맞설 사람은 없을 테니.”
사금은 다시 한번 목운요의 깊은 생각에 감탄했다. 자신이었더라면 아마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 * *
날이 어두워질 무렵, 육냥이 서둘러 목운요를 찾아왔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회안성은 잘 다녀왔느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제때 구제한 덕분에 이재민들도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이재민 중엔 임강성에서 넘어 간 사람들도 꽤 있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보내신 식량을 받고, 회안성에서 친필 감사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약 처방을 받은 의원들은 곧장 전염병 예방에 나섰습니다.”
목운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구나. 혹시 거기서 기수성 이재민들도 봤느냐?”
“소인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기수성으로 가는 도로가 막혀 있어 이재민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정확한 소식도 알 수가 없다 합니다.”
목운요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다. 전에 육로를 통해 서릉으로 은자를 보내라고 한 일은 준비되었느냐?”
“네, 준비 마쳤습니다.”
“일단 대기하거라. 강남의 일을 처리하고 서릉으로 돌아갈 때 진왕 전하께 큰 선물을 드릴 것이니.”
“알겠습니다.”
* * *
이틀 뒤, 한밤중에 누군가가 관청 문을 두드렸다.
사금이 재빨리 목운요에게 가서 알렸다.
“소저, 유왕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목운요가 옷을 걸치며 급히 물었다.
“어디 계시지?”
“대청에 계십니다.”
“가자.”
유왕은 발걸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운요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운요, 네가 나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구나.”
전에 심방원으로 사람을 보냈을 때 목운요와 만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내심 넷째 아우에 대한 마음이 깊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서운함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제 와 보니 자신의 생각이 백번 틀린 것이었다. 그녀는 월왕을 실종 소식을 듣자마자 길을 떠난 게 틀림없었다. 그제야 목운요만을 고집하는 월왕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둘째 외당숙을 뵙습니다.”
“예를 거두거라. 오는 길에 네 얘기를 전해 들었다. 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외당숙께서 미끼가 되어 방해자들의 시선을 끄시지 않았더라면, 저도 제때 이재민들을 구제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만, 제가 미리 나눠 준 식량과 약재는 책자에 다 기록해 뒀으니, 추후 보상해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하운방과 불선루 모두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허허, 걱정 말거라. 더 얹어서 주마.”
목운요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왕의 웃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운요, 너는 임강성에 남아 있거라. 내가 꼭 무사히 아우를 데려오마.”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외당숙께선 조정의 명을 받고 오신 거라 위험한 상황에 처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니 월왕 전하는 제가 가서 찾아오겠습니다.”
월왕이 아직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십중팔구 어딘가에 갇혀 있어 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유일하게 갇힐 만한 곳은 기수성뿐이었다.
목운요는 유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임강성 일을 넘겨주고 하루빨리 기수성에 가서 월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월왕이 공들여 밝혀낸 사건의 실마리를 흐지부지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운요, 너도 알다시피 기수성으로 가는 도로가 아직 막혀 있고, 또 오랫동안 고립된 탓에 아마 인간 지옥이 따로 없을 거다. 네 연약한 몸으로 어찌…….”
그러나 목운요는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둘째 외당숙.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하나, 전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떠날 예정입니다. 사금, 가서 그동안 정리한 문건들과 진술서 등을 가져와.”
곧 사금이 물건을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 두고 물러났다.
“이번 임강성 수해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아마 진작에 예측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중요한 얘기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임강 동지의 진술서로, 여기에 그가 임강 현령, 소금 상인 주씨 가문과 결탁해 한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소금 상인과 결탁해 소금세 장부 위조, 소금세 은자 위조…… 진흙에 은을 칠하여 세금으로 위조…… 허! 이 소금 상인들이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유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심지어 증거를 없애려고 임강 강둑을 폭파할 생각을 하다니! 이들은 그야말로 구족을 주살하더라도 분이 풀리지 않을 인간들이구나!”
“고정하십시오. 그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소금 상인들 중 현재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인 장진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유왕의 눈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증거 인멸이로군.”
“나머지는 외당숙께 맡길 테니 반드시 배후를 찾아 주십시오. 옥에 갇혀 있는 이들도 곧 자백할 겁니다.”
“그래. 나에게 맡기거라. 그리고 내가 데려온 이들을 너에게 붙여 줄 테니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시위는 외할머니께서 충분히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외당숙의 사람들을 제가 완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요.”
목운요의 말에 유왕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운요, 말에 뼈가 있구나?”
“글쎄요. 외당숙의 생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겠죠, 안 그런가요?”
“귀띔해 줘서 고맙구나.”
목운요가 미소 짓고 있는 유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무슨 영문인지 유왕은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토록 중요한 안건을 나한테 맡기다니, 혹시라도 내가 이번 일을 망치면 어떻게 할 셈이냐?”
목운요가 옅은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럼 아마 민 소저께서 크게 실망하실 겁니다.”
그제야 유왕이 자신 있다는 듯이 가슴팍을 쳤다.
“걱정 말거라. 내가 무조건 진실을 밝혀낼 것이다!”
“최선을 다해 주세요. 그래야 사야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테니까요.”
사야? 친밀한 호칭에 유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요, 앞으로 둘째 외당숙이라 부르지 말고 당분간은 유왕이라 부르거라.”
유왕의 걱정을 바로 눈치챈 목운요는 자연스럽게 호칭을 바꿨다.
“유왕 전하, 그럼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목운요가 떠난 후, 유왕은 모든 문서와 진술서 등을 훑어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동안 바빠지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