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월왕이 남긴 단서
“저기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데려오거라.”
“네.”
둘 모두 남자였고, 표정에는 어리숙함이 묻어나 있었다. 목운요 앞으로 나온 두 사람이 연신 절하며 애걸했다.
“살려 주십시오, 군주 전하. 저희는 한낱 평민에 불과합니다. 동지 대인이 시킨 대로 이곳에 온 것뿐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이 둘도 데려가서 심문하라.”
“군주 전하, 어찌 저희 같은 평민한테 이러시는 겁니까! 아무리 저희에게 도움을 주셨다 한들, 이렇게 사람을 함부로 죽이시면 안 됩니다!”
목운요가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을 심문하라 했지, 언제 죽인다고 했느냐? 그리고 평민이라고 호소하는데, 과연 임강성에 서릉 말투를 쓰는 평민이 있더냐?”
목운요의 눈짓에, 사서가 둘 중 한 명의 오금을 발로 찬 뒤 허리춤에 숨겨 둔 비수를 찾아냈다.
정체가 들통나자 두 사람은 입 안에 물고 있던 독주머니를 터트려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시위들이 주먹을 휘두르는 게 먼저였다.
“소저, 치아 뒤에 독이 있습니다.”
“일단 데려가서 심문해라.”
“네.”
그 광경을 지켜본 이재민들은 긴 숨을 들이쉬며 주변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에 목운요가 이재민들을 향해 말했다.
“임강원에 이번 사건의 단서가 있을 수도 있어 수색을 진행해야 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천막을 준비할 테니, 여러분께서는 천막에서 잠시 지내 주시기 바랍니다.”
“군주 전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목운요가 식량과 약재를 가져다줬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관원까지 없애 주자, 이재민들은 그녀가 두려우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앞섰다.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자세히 수색해라.”
그러나 한 시진 반 동안 수색해도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이에 목운요도 직접 나서서 여기저기 살피던 중, 담장 뒤에 심겨 있는 몇 그루의 계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무 밑에 놓인 평범해 보이는 자갈을 유심히 살폈다.
사금과 사서가 다가와 물었다.
“소저, 무슨 이상한 점이 있나요?”
“자갈 위에 이끼가 나 있어. 한데 정원에는 물이 전혀 없고 흙도 전부 말라 있지. 파 보면 뭐가 나올 것 같지 않아?”
“지금 당장 파 보겠습니다.”
사금이 곧장 자갈 밑의 흙을 파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는 비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목운요는 비녀를 유심히 관찰했다. 비녀에 옥토끼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단번에 월왕의 솜씨임을 눈치챘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비녀를 쓰다듬던 목운요가 비녀 머리 부분을 돌려서 분리한 뒤, 안에 숨겨진 쪽지를 발견해 냈다. 역시 월왕의 글씨였다.
“물.”
사금과 사서도 이를 보며 추측했다.
“물? 왕야께서는 무엇을 알려 주고 싶으신 걸까요?”
목운요는 쪽지와 자갈을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임강원 내에 하천이 있니?”
“네, 흐르는 물을 정원으로 들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도 이런 자갈이 깔려 있는지 살펴보도록 해.”
“네, 지금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반 시진쯤 걸려 물속에서 양피지로 꽁꽁 감싼 무언가를 찾아냈다. 조심스레 종이를 벗기자 은 두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저, 은자 밑의 기호를 보아하니, 관은인 듯합니다.”
“관은? 고작 이걸 숨기려고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였단 말인가?”
은을 자세히 살피던 목운요는 뭔가 이상함을 알아챘다.
“너무 가벼운데…….”
“네?”
목운요는 곧장 손에 들고 있던 은을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탁 소리와 함께 은 덩어리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사서가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겉에 은을 얇게 입힌 진흙이에요! 관은을 위조한 것이었어요!”
목운요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깨진 조각들을 잘 보관해 둬. 나머지 한 덩이도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돼.”
“네, 소저.”
* * *
관아로 돌아가는 내내, 목운요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사금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저, 월왕 전하께서 단서를 남겨 두신 걸 보아하니 무사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정말 무사하다면 과연 이런 중요한 물증을 급히 물속에 숨겼을까?”
목운요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전하께선 무공이 뛰어나시고 우항, 우의도 곁을 지키고 있었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땅굴에서 발견한 향낭까지…….”
한숨을 내쉰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이렇게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목운요는 곧장 관아 감옥으로 향했다. 임강 동지와 두 남자가 묶여 있었고, 몸에는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목운요가 임강 동지한테 물었다.
“이런 고초를 겪고서도 저한테 할 얘기가 없는 건가요?”
“아무리 군주 신분이더라도, 조정 관원한테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임강 동지는 분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이에 그녀가 의자에 앉으며 코웃음을 쳤다.
“대인이 저지른 죄로는 지금 당장 사형도 내릴 수 있어요. 적어도 목숨을 살려 둔 것에 감사해야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소금세를 위조한 죄, 당대 황자를 모해한 죄, 내막을 아는 소금 상인을 살해하고 또 임강 강둑 폭파에 가담한 죄…….”
목운요가 하나씩 읊어 내려갈 때마다 임강 동지의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군주께서 어찌 함부로 조정 관원을 모함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큰소리로 반박하는 것과 달리 눈빛에는 불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목운요가 냉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임강 동지를 더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임강 동지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사금이 시위한테 작은 병 하나를 건넸다.
“이걸 먹이거라. 내일 아침이면 순순히 자백할 것이다.”
“네.”
* * *
다음 날, 진 총관이 소식을 전해 왔다. 전에 조사했던 소금 상인들 중 장진만 중상을 입은 채 구조되고, 나머지는 모조리 죽었다는 것이었다.
목운요는 바로 답신을 보내 장진을 반드시 살리라고 신신당부했다. 어쩌면 그가 유일한 증인일지도 몰랐다.
그때, 사금이 진술서를 들고 찾아왔다.
“소저, 임강 동지가 자백했습니다.”
“지금 바로 임강 현아 주부를 데려와.”
사금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소저, 혹시 그자도 문제가 있는 겁니까?”
주부는 백성들을 지극히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다른 관원들이 손을 놓고 있을 때도 앞장서서 물길을 뚫고 이재민들을 보살폈다. 그동안 식량과 약재를 나눠 줄 때도 늘 앞장 서 있어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글쎄, 그건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알겠지.”
“네, 지금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곧 임강 현아 주부가 흙탕물을 잔뜩 묻힌 채 도착했다.
“소관, 초라한 모습으로 군주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여봐라, 대인께 차를 올리거라.”
사금이 차를 대령한 뒤 목운요의 뒤로 물러났다.
목운요는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릉왕 전하께서는 별일 없으시죠?”
찻잔을 들고 있던 주부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목운요가 한쪽에 놓여 있는 진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강 동지는 이미 자신의 죄를 자백했어요.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만행을 저질렀더군요.”
“소관은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가 작게 웃음을 지으며 사금에게 진술서를 건네라고 손짓했다.
“자세히 보시고 혹시 누락된 게 없는지 살펴보시죠.”
진술서를 읽던 임강 현아 주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소금세 장부 위조, 소금세 위조, 증거를 없애기 위해 강둑을 폭파시켜 성 세 군데에 수해를 입히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다니…….”
주부를 바라보던 목운요의 눈에서 웃음이 점점 사라졌다.
“임강 동지와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으니 그자를 잘 아시겠죠.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전부 자백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주부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주 센 독약을 먹였거든요. 반 시진마다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전신이 간지러워 미친 듯이 긁게 되고, 긁을수록 통증이 심해져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되지요. 대인께서도 혹시 느껴 보고 싶으신가요?”
“군주께서 장난이 지나치시군요. 세상에 그런 독약이 있을 리가요.”
“세상은 넓고 별의별 것이 다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나 보지요? 그리고 이보다 더 심한 독도 있는데, 먹고 나면 오장육부부터 천천히 썩기 시작해 가죽만 남게 되지요. 하지만 그때까지 숨은 살아 있어 가죽만 남은 진물 상태로 살아가야 한답니다.”
그 말을 듣던 주부는 결국 헛구역질을 했고 안색은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 그가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겉으론 연약해 보이는 여인이 이렇게까지 수단이 잔인할 줄이야.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목운요가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겁먹으셨나 봐요? 걱정 마세요. 협조만 잘해 주신다면 대인께는 절대로 이 독약을 쓰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제 외당숙인 릉왕의 수하시니, 어느 정도 봐드려야죠.”
“군주 전하, 소관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몰라도 돼요. 그냥 제 말을 그대로 당신 주인한테 전달만 하면 됩니다. 임강성은 내가 접수할 것이고, 임강 동지의 진술서는 있는 그대로 폐하께 보고드릴 겁니다. 그러니 배후에서 비열한 수단을 쓰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사실이 드러나면 폐하께서 진노하실뿐더러 백성들 사이에서의 입지도 밑바닥으로 떨어질 테니. 당신 주인도 이런 결과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주부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다.
“군주…….”
“제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계속 이렇게 모르쇠로 일관하면 다른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죠. 서릉에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이가 대인 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