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
“그럼 정말 천만다행이군요……. 하지만 경릉성에서 임강성까지 오려면 수로로 꼬박 하루는 걸릴 텐데, 게다가 지금 수로 상황이…….”
“선박을 통해 구호 물품을 보내 달라고 부탁해 뒀어요. 운행 경험이 풍부한 사공이 있어, 운행은 가능할 겁니다.”
임강 현아 주부와 전사는 감격스러움에 두 손을 덜덜 떨었다. 지난 보름 동안 그들은 조정의 구제 손길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구호 물품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목운요가 하루만 더 늦게 왔더라면, 그들도 아마 버티지 못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목운요가 바닥에 꿇어앉은 임강 현승과 통판을 보며 말했다.
“이 둘의 저택을 샅샅이 조사하고 재산을 몰수하라. 이 상황에도 가무를 즐기는 걸 보아하니 가산이 풍족한가 보구나.”
“군주! 아무리 그래도 저희는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입니다.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목운요가 어이없다는 듯이 비소를 지었다.
“이제야 자신들이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임을 떠올렸나 보군요. 풍류를 즐길 때는 과연 이 관복에 어울리는 처신을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 본 적이나 있나요? 끌고 가라!”
얼마 뒤, 두 사람의 저택을 압수 수색하러 갔던 시위가 돌아왔다.
“군주께 아룁니다. 두 사람의 저택에서 은자 십만 냥과 땅굴에 숨겨 둔 많은 양의 곡식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임강 현아 주부와 전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희가 두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을 땐 자신들도 남은 곡식이 없다며 거절했거늘…….”
목운요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임강 현승과 통판은 재난 상황에서 백성들의 생사를 외면한 채 음주가무를 즐기고 재물을 횡령하였으니, 데려가서 죽이거라!”
“네.”
시위가 곧장 장검을 들어 휘둘렀다. 두 사람의 목이 잘려 나갔고, 흙바닥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에, 네 명의 관원은 제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임강 현아 주부가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죽어 마땅할 작자들을 처리해 주신 온한 군주께 감사드립니다. 소관들이 자초지종을 적어 조정에 상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절대로 군주께 폐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물론 목운요는 이로 인해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까 봐 걱정되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배려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네 분께 미리 감사드립니다. 우선 찾아낸 곡식으로 죽을 쒀 이재민들에게 나눠 줍시다. 그리고 길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들은 신속히 처리해야 합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전염병으로 번질 위험이 큽니다.”
“네.”
목운요는 겉으로 볼 땐 한없이 부드럽고 연약한 여인이나,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신기할 정도로 모든 일이 다 잘될 것 같은 희망이 생겨났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 이재민들은 이성의 끈을 겨우 잡고, 죽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례대로 받아 갔다.
그들은 뜨거운 줄도 모르고 게 눈 감추듯 죽을 들이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목운요가 명했다.
“사금, 지금 의원들이 시급하다고 불선루에 전해 줘.”
“네, 소저.”
목운요의 입술이 갈라진 걸 보고, 사서가 물주머니를 가져다주며 걱정스레 말했다.
“소저, 물 좀 마시고 쉬세요. 안색이 창백하십니다. 아직 임강성에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쓰러지시면 안 되지요.”
“아직 괜찮으니 걱정 말렴. 그나저나 조정에서 보낸 구호 물품이 왜 아직도 도착 안 했는지 한번 알아봐. 그리고 내가 임강성 관원을 죽였다는 소문을 최대한 퍼뜨리고.”
“네.”
목운요가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전하, 군주로 봉해진 지 얼마 안 된 제가 조정 관원 두 명을 죽였네요. 꽤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텐데, 그 전에 빨리 절 찾으러 오세요…….’
* * *
임강성이 수해를 입은 지도 어느덧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고, 이재민들은 목 빠지게 조정의 구제를 기다렸다.
그러나 구호 물품뿐만 아니라, 구제를 위해 파견된 관원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려던 그 순간, 온한 군주가 임강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다.
목운요의 존재는 다시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 줬다.
그리고 머지않아, 불선루와 하운방에서 보낸 식량과 약재가 도착했다. 뿐만 아니라 진 총관과 위일, 운춘도 함께 왔다.
진 총관은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목운요를 훑어보다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온한 군주를 뵙습니다.”
목운요는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진 총관님, 예를 거두세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다행히 불선루에 저장된 식량이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소저, 이 정도 식량과 약재로 충분한지요?”
“물론입니다.”
목운요가 목록을 자세히 살펴본 뒤, 육냥 등을 불렀다.
“임강성 피해가 가장 커 나는 여기를 떠날 수가 없다. 육냥, 네가 대신 회안성으로 가서 약재와 식량을 전해 주고, 위일과 운춘은 기수성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살아갈 희망이 있음을 보여 주거라.”
회안성은 채월각 사건 이후 관원들이 대거 교체되고, 피해도 크지 않아 이번 식량과 약재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목운요가 가장 걱정되는 곳은 기수성이었다. 기수성은 이차 수해를 입어 도로마저 차단된 상황이라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네.”
세 사람이 대답하고 바로 떠났다.
진 총관은 폐허가 된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해를 입고 난 모습이 참으로 참담하군요.”
“진 총관님, 혹시 월왕 전하의 소식 못 들으셨나요?”
진 총관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왕야께서 강남에 오신 후 저와 연락이 닿은 적이 있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모든 장부가 정확하고 세금도 빠짐이 없다고 하셨지요. 뭔가 수상하다 싶어 소금 상인들을 조사하시기 시작했고, 저에게도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다음 소저께서 보내신 서신을 받고 임강성으로 가셨는데, 그 뒤로 실종되신 겁니다.”
목운요는 손에 든 향낭을 더 세게 잡았다.
“월왕 전하께서 소금 상인 누구를 조사하라고 하셨나요?”
“임강성 주회, 양주성 장진…….”
진 총관이 소금 상인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나열했다.
유심히 듣고 있던 목운요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이들 모두 양렴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인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죠?”
“임강 수해가 일어나는 바람에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았습니다만…….”
“진 총관님, 이 일은 계속 맡아 주셔야 해요. 지금 바로 사람을 시켜 그들의 뒷조사를 하고,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해야 해요.”
“소저, 이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양렴이 잡힌 뒤, 진왕은 온갖 수를 써서 강남 소금세 사건의 증거를 없애려 했어요. 이번 임강 강둑 폭파도 어쩌면 그자의 짓일 수도 있죠. 소금세를 운반하던 배가 임강에서 침몰하면 모든 증거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내막을 알고 있는 소금 상인들의 입까지 막아 버리면 완벽히 죄를 덮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바로 조사하겠습니다.”
진 총관이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 * *
목운요가 관아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임강 현아 주부가 급히 와서 알렸다.
“군주께 아룁니다. 주회가 이번 수해로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목운요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대인, 수고 많으셨어요. 혹시 주회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주회는 임강성의 제일가는 상인입니다. 생전에 현령 나리와도 돈독한 사이였지요. 한데 아무리 부자이고 하인이 많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온 가족 모두 이번에 죽어 버렸는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 건가요?”
주부가 잠깐 멈칫하더니 수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군주 말씀을 듣고 나니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주씨 가문 식구가 못해도 백여 명은 될 텐데, 한꺼번에 다 죽은 것이 누가 봐도 수상하군요.”
“주회와 현령의 사이가 돈독했다 그랬죠? 혹시 임강 강둑이 폭파되기 전에 두 사람이 만난 적 있나요?”
“그건 소관도 모르옵니다. 현령 대인께선 임강원을 즐겨 찾았고, 그곳은 주씨 가문의 영역이니 두 사람이 만남을 가지더라도 쉽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지요.”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임강원으로 안내 부탁드립니다. 어떤 곳인지 한번 보고 싶네요.”
“지금은 이재민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 중이라, 군주께서 가시면 혹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재민이요?”
“네, 동지 대인께서 비워 둘 바에 백성들을 위해 쓰자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그랬나요?”
주부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군주께서 오시고 나서 한 결정입니다.”
“알겠습니다. 간 김에 이재민들 건강 상태도 확인하면 되겠네요. 어서 가시죠.”
* * *
임강원이 있는 곳은 피해를 많이 입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이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꽃들이 만발해 경치가 뛰어난 안쪽에 비해, 바깥은 무너진 벽과 흙모래투성이였다.
들어가 보니 이재민 수는 많지 않았고 전부 한 군데에 모여 있었다.
목운요 일행이 왔다는 소식에 임강 동지가 급히 맞이하러 나왔다.
“군주를 뵙습니다.”
목운요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대인께서도 이곳에서 거주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재민들이 이곳에서 임시로 지내다 보니, 소관이 걱정되는 마음에 와서 돌봐 주고 있던 차입니다.”
목운요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임강 동지를 보더니,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지었다.
“여봐라, 이자를 잡아라. 그리고 모든 사실을 자백할 때까지 심문하거라!”
임강 동지가 시위한테 끌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이재민들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한차례 훑어보던 목운요의 눈길이 두 사람한테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