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월왕, 실종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라 했느냐?”
“임강 강둑이 터져 임강성, 회안성…….”
서립이 다가가 얼른 황제를 부축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옥체가 우선입니다!”
황제는 깊게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나서야,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지금 당장 황자와 관원들을 전부 불러들이거라.”
“네.”
* * *
심방원에서 향낭을 만들고 있던 목운요는 소식을 듣고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바늘이 피부를 뚫고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곧바로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와 향낭을 적셨다.
깜짝 놀란 금란, 금교가 급히 약을 찾았다.
“금란, 외할머니는 어디 계시죠?”
“장공주 전하께선 현재 영화거(榮华居)에 계십니다.”
“지금 뵈러 가야겠어요. 짐 좀 싸 줘요.”
금란이 반쯤 끄덕이다 흠칫 놀라 되물었다.
“소저, 지금…… 짐을 싸라고 하셨나요?”
“외할머니께 말씀드리고 나서 바로 임강성으로 출발할 거예요.”
“소저…….”
그러나 금란이 말리기도 전에 목운요는 이미 방을 나섰다.
영화거.
장공주는 사람을 더 보내 월왕을 무사히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목운요가 왔다는 소식에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들여보내거라.”
목운요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바닥에 꿇어앉으며 말했다.
“외할머니, 불효한 손녀를 용서하십시오. 지금 당장 임강성으로 월왕 전하를 찾으러 가 봐야겠습니다.”
“지금 제정신이냐?”
“전 지금 너무 후회가 돼요. 더 용감하게 제 마음을 마주했더라면, 전하의 조난 소식을 들었을 때 지금처럼 스스로 자책하지 않았겠지요. 외할머니, 저는…… 월왕 전하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저희 두 사람을 인정해 주십시오.”
“하지만 월왕은 네 외당숙이다!”
목운요가 두 손을 겹친 채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머리에 꽂은 비녀가 땅에 부딪히면서 소리를 냈다.
“마음먹은 것이냐?”
“네. 설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저는 월왕 전하와 함께할 것입니다.”
임강이 범람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전해 들은 소식에 의하면, 릉왕과 진왕이 일을 크게 벌이려고 계획 중이라고 했다. 그때는 임강 강둑을 무너뜨리는 게 그들이 꾸미는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해마다 수없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의 목표는 임강 범람을 틈타 월왕을 사고사로 죽인 뒤, 소금세 사건을 덮는 것이리라.
진왕은 이로써 자신의 혐의를 벗는 동시에 월왕이라는 적을 없애고, 거기에 더해 이 모든 것을 릉왕한테 뒤집어씌울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거삼득인 셈이었다.
월왕 전하께……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목운요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 왔다.
장공주는 깊은 한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누구보다도 고집이 세다는 걸 이 할미도 잘 알고 있다. 이미 마음을 먹었으니 더 이상 말리지 않으마. 다만 앞으로 그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월왕과 함께 이겨 나가기를 바라는구나.”
고개를 든 목운요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제 결정이 외할머니와 어머니께 큰 폐를 끼칠 겁니다. 부디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나와 네 어미는 무엇보다도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니 걱정 말렴. 감히 누가 우리를 해코지할지 지켜보자꾸나.”
장공주가 목운요를 일으켜 세웠다.
“임강성은 지금 막 수해를 입어서 네가 가더라도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게다가 그곳에서 사람 하나를 찾는 건 그야말로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지.”
“외할머니, 제가 의술을 배웠습니다. 임강 범람으로 백성들이 갈 곳을 잃고, 또 날씨도 점점 더워져 자칫하면 전염병이 돌 수도 있어요. 월왕 전하를 찾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도움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거라. 다만 부디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돌보거라.”
목운요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꼭 무사히 돌아올게요.”
“그래. 그럼 지금 바로 곡 마마에게 동행할 인원을 준비하라고 이르마. 그리고 황상께서 나한테 하사하신 이 금패를 가지고 가거라. 금패는 곧 황제와 같다. 너의 신분을 잊지 말고, 어딜 가든 억울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나머지는 말하지 않아도 네가 잘 알아서 할 거라 믿는다.”
장공주가 애틋함이 가득한 손길로 목운요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잊지 마라. 네 뒤에는 항상 이 외할머니가 있단다.”
목운요는 순간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감사합니다, 외할머니.”
“그래. 어서 가거라.”
목운요는 뒤로 물러나 장공주를 향해 무릎 꿇으며 공손한 인사를 올렸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무사하십시오.”
“그래.”
목운요가 몸을 일으켜 뒤돌아 나갔다. 빨리 허연한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떠나는 목운요의 뒷모습을 보며 장공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곡 마마가 얼른 다가가 부축했다.
“장공주 전하…….”
“내 걱정 말고 어서 운요를 따라갈 사람을 준비하게. 지방은 서릉과 다르니 최대한 넉넉하게 준비해서 보내게나.”
“알겠습니다.”
* * *
반대에 부딪힐 거라는 목운요의 예상과는 달리, 허연한은 듣자마자 흔쾌히 동의했다.
“어머니,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허연한은 오히려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내가 통곡이라도 하면서 너를 막을 줄 알았느냐?”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흔쾌히 보내 주실 줄 몰랐어요…….”
“네가 드디어 월왕 전하에 대한 마음을 마주하게 되어서 너무 기쁘구나.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아, 네 총명과 지혜로 어딜 가든 스스로를 잘 지켜 낼 거라고. 이 어미는 심방원에서 너와 월왕 전하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고 있으마.”
목운요가 벌떡 일어나 허연한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 * *
한 시진 후, 마차 한 대가 심방원에서 나와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하늘에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공주는 흐릿한 하늘과 빗줄기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허연한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를 뵙습니다. 요아가 걱정되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리 와서 앉거라. 마침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모든 사람을 내보내자 허연한과 둘만 남았다.
“연한아, 네가 손을 쓴 덕분에 소씨 가문은 이제 끝이 난 듯하구나. 더 이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서릉의 동태를 잘 살펴 운요와 월왕을 위해 시간을 버는 것이다.”
허연한이 고개를 들어 눈을 빛냈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봄철에 임강이 범람하는 건 흔한 일이나, 이만큼의 수해가 일어나진 않는다. 이렇게까지 일이 크게 난 걸 보니 틀림없이 황자들 중 하나의 짓이야. 두 사람의 무사 귀환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릉에 있는 황자들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조정의 일에 제가 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일을 망칠까 봐 걱정입니다.”
“태생부터 모든 걸 알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다들 차근차근 익히는 거지. 소근이 아직 순천부에 갇혀 있으니, 내가 수를 써서 그자가 스스로 입을 열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왕은 옴짝달싹 못 할 것이야. 릉왕은 한동안 걱정할 것 없다. 요즘 황상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조정 세력의 불균형이지. 소씨 가문의 몰락으로 이씨 가문을 견제할 상대가 없어졌으니, 조만간 황상께서 이씨 가문의 기세를 누르실 게야. 이씨 가문이 휘청이면 릉왕도 집안 살리기에 바쁠 테니, 강남이 당분간 조용해질 것이다.”
“어머니 말씀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그러니 걱정 말거라.”
* * *
성문 앞.
성 공공은 목운요에게 월왕의 수하를 움직일 수 있는 증표를 전달해 주었다.
이내 서릉을 나선 목운요 일행은 마차를 버리고 배로 갈아탔다. 다행히 평소 강남과 서릉 사이를 오가며 하운방의 화물을 날라 줬던 선박이 있어 곧바로 강남으로 갈 수 있었다.
* * *
한편 그 시각. 조정은 관원들의 열띤 토론으로 웅성웅성했다. 저마다 강둑이 무너진 이유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고, 릉왕과 진왕 두 파벌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 공격까지 퍼부었다.
이를 보고 있던 황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찻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호부 상서! 어딨는 게냐? 호부와 관련된 일이니, 어떻게 처리할지 자네가 말해 보거라!”
호부 상서 제봉(齊峰)은 둘째 황자 유왕의 큰외삼촌이었다. 공평한 처사로 잘 알려진 그를 릉왕과 진왕이 자신의 사람으로 들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 때문에 많은 적을 두게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황제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호부 상서 제봉이 나서며 대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강둑이 무너진 원인을 알아내는 것보다, 이번 수해로 입은 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최대한 빨리 곡식과 의복 등을 조달하여 이재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입니다. 제때 대피시키지 못할 경우 백성들의 민원이 들끓을 것이고, 나아가 민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여 당장 곡물 창고를 열어 이재민을 구제하시길 요청드리옵니다.”
드디어 바람직한 대책을 들은 황제의 표정이 밝아졌다.
“현재 창고에 곡식이 얼마나 있더냐?”
“작년 작황이 풍년이라 충분합니다. 다만 서릉에서 운송하기에는 시간이 걸리니, 우선 주변 성으로부터 조달한 다음 추후에 징수한 곡창을 채워 주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렇군. 유왕, 거기 있느냐?”
둘째 황자 유왕이 바로 대답했다.
“네, 폐하.”
“이재민 구호 중임을 맡을 자신이 있느냐?”
유왕의 눈빛이 반짝였다. 월왕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속도 타들어 갔었는데, 직접 가서 도움을 줄 수 있다니 더없이 기뻤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한데 그때였다.
“부황.”
릉왕이 나서며 말했다.
“둘째 아우는 이재민 구호 경험이 전무합니다. 게다가 성격이 경솔하여 혹 무슨 문제라도 일으키면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진왕도 질세라 나섰다.
“부황, 차라리 제가-”
“그만하거라!”
황제가 날카로운 눈으로 릉왕과 진왕을 쳐다보았다. 눈빛에선 깊은 실망감이 드러났다.
“지금 이 상황에도 너희들은 서로를 비꼬고 헐뜯느라 바쁘구나. 혹시 짐이 이빨 빠진 호랑이로 보이는 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