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꺾이고 만 동백꽃
겁에 질린 육공주는 다급한 눈빛으로 소청오를 바라보았다.
“청오, 살려 줘요……!”
장완이 혹시라도 경거망동할까 봐 소청오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원한이 있으면 나한테 풀거라.”
장완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당신이 회양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줄 알겠어. 회양, 아직도 내 말을 못 믿나 봐? 그럼 나랑 내기할까?”
그녀가 증오에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소청오한테 시집가겠다고 고집 피우는 바람에 당신은 폐하의 미움을 사서 남은 거라곤 목숨뿐이지. 목숨 걸고 어때?”
소청오는 장완이 방심한 틈을 타 비수를 빼앗으려고 했으나, 그녀의 손이 더 빨랐다. 육공주의 목이 살짝 베어 피가 새어 나왔다.
장완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운 눈빛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칫하면 크게 다칠 거야.”
“움직이지 않을 테니 진정하시오.”
황제가 아무리 화가 나 있다 하더라도 육공주는 황실 핏줄이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소씨 가문 전체가 같이 매장당할 수도 있었다.
육공주가 코웃음을 치면서 물었다.
“어떤 내기를 할 건데?”
장완이 고개 숙여 대답했다.
“소청오가 당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그럼 지금 이 비수로 우리 둘을 한 번씩 찌르면 과연 소청오가 누구부터 구할까?”
육공주가 참지 못하고 냉소를 퍼부었다.
“죽으려거든 멀리 가서 죽어. 이 좋은 곳을 더럽히지 말고!”
“회양, 정말 불쌍할 정도로 바보 같군.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이 절대로 소씨 가문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지금 내가 당신을 죽이더라도 소청오는 나를 구할 거란 얘기지. 내가 살면 대학사부가 소씨 가문을 위해 길을 찾아 줄 것이고, 내가 죽으면 소씨 가문은 강적 하나를 더 두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단언컨대, 소청오는 무조건 나를 구할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장완이 비수를 돌려 자신의 가슴팍을 힘껏 찔렀다.
소청오가 급히 장완의 손목을 잡았지만, 이미 한발 늦고 말았다. 칼에 찔린 장완의 주변이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육공주는 장완을 노려보며 말했다.
“청오, 이런 악독한 여자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둬요. 신경 쓰지 말라고요!”
한데 그때, 소청오가 장완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래도 사람 목숨인데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소. 이만 들어가시오.”
육공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청오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나를 독살하려는 이가 당신이 아니라는 말을 믿을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장완을 여기 버려둬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소청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소.”
그의 말에 육공주의 얼굴에 냉소가 지어졌다.
“장완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군요. 당신 마음속에는 소씨 가문뿐이었어요. 내가 공주가 아니었더라면 날 쳐다보지도 않았겠죠?”
소청오의 품에 안겨 있던 장완은 그런 육공주를 향해 비웃음을 보였다.
그러자 육공주가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가 소청오의 품에서 장완을 끌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녀들이 말리는 바람에 육공주가 바닥에 밀쳐졌다.
“하하.”
찰과상을 입은 육공주의 손에서 피가 새어 나와 빗물과 한데 섞였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일어서더니 황궁으로 향했다.
장완은 소청오를 바라보며 창백한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육공주가 궁으로 가서 소씨 가문에 대한 불리한 말을 할 텐데, 왜 쫓아가지 않으시나요?”
소청오가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장완을 안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내가 쫓아가더라도 소부의 누군가가 공주를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은 온 천하에 돌 것이고,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까.”
장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가슴의 상처 때문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참 똑똑한 사람인데,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걸까요?”
소청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장완을 침대 위에 눕힌 뒤 그가 바로 의원을 불렀다.
그때, 장완이 손을 뻗어 소청오의 옷깃을 잡았다.
“소청오, 당신한테 마음이라는 게 있긴 해요?”
“당신 눈에 비친 나는 아마 마음이 없겠지.”
“아니, 있어요.”
그녀가 소청오의 가슴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당신 마음속에는 계화 나무 한 그루가 있어요. 나무에는 금색 계화꽃이 가득 피어 있고,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바스락 소리가 나요.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은 바람을 타고 저 하늘 위로 올라가죠.”
“당신…….”
장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당신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거예요……. 이런 당신을 보니 내심 기쁘군요. 평생 가질 수 없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으니 말이죠. 당신도 언젠가는 제 고통을 느끼게 될 거예요, 하하하…….”
소리 내어 웃는 장완의 웃음소리에는 진한 슬픔이 묻어 있었다.
“이토록 마음이 힘들 줄 알았으면 애초에 만나지라도 말걸 그랬어요. 소청오, 당신이 밉네요.”
거리에서 꽃구경하던 그 어린 공자를 본 순간, 장완은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둘의 혼약을 알고 난 후에는 기뻐서 몇 날 며칠 잠을 설쳤다.
소청오에 대한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겼고, 그의 아내가 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소청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끝은 배신이었다…….
장완의 창백한 얼굴을 본 소청오는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려 왔다.
“장완…….”
정신이 희미해진 장완이 애써 소청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 한 번만 안아 줄래요?”
소청오는 저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제 마지막 소원도 들어줄 수 없나요?”
그녀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소청오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마음이 약해진 소청오는 옆으로 다가가 장완의 손을 잡았다. 결국 자신이 장완의 마음을 저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장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제부터 우리 둘 사이엔 빚이 없는 거예요.”
“장완, 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완이 소청오의 손을 잡은 채 가슴에 꽂혀 있는 비수를 힘껏 눌렀다. 푹 소리와 함께 비수가 깊숙이 들어갔다.
그녀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끊임없이 피를 토해 냈다.
“대체 왜……?”
장완은 목구멍에 피가 가득 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마지막 힘을 다해 창가에 놓인 동백꽃을 바라보았다.
화학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백꽃이었다.
꽃송이는 마치 미인의 얼굴같이 화사했고, 꽃잎 하나하나가 황금빛 꽃술 주위를 가지런히 에워싸 한껏 풍채를 뽐내고 있었다.
왜? 장완도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왜 혼약을 어겼는지, 왜 육공주의 음모를 알면서도 사냥터에서 가만히 있었는지, 왜 자신이 절망에 빠졌을 때 위로가 아닌 육공주의 비웃음을 받게 했는지, 왜 이 순간 아직 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는지.
눈앞의 빛이 점점 사라지더니, 창가에 놓인 동백꽃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목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아마 그녀와 다정한 벗이 될 수 있으리라. 미처 작별 인사를 못 한 것이 마지막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며 창문이 열렸다. 창가에 놓여 있던 동백꽃이 비바람에 흔들리다 결국 창살에 부딪혀 꺾어졌다.
* * *
큰비가 그치고 난 뒤, 서릉은 또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독에 당한 육공주가 빗속을 뚫고 황제를 찾아갔고, 장완의 죽음으로 대학사가 소부에서 한바탕 난동을 부린 것이다.
소식을 들은 목운요는 놀란 나머지 손에 든 찻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금란과 금교가 찻잔을 얼른 치우면서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소저…….”
“언제 장례를 치르는지 알아봐요. 마지막 가는 길은 지켜 주고 싶어요.”
“네, 소저.”
* * *
한편 황제는 더 이상 육공주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으나, 육공주 모친의 간곡한 애원에 어쩔 수 없이 궁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얼마 뒤, 대학사 장중이 소청오가 자신의 딸 장완을 살해했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소씨 가문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 난 황제는 곧장 소문원, 소청오 부자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형부에 가둬 버렸다.
슬픔에 겨워하던 육공주는 그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 황제 앞에서 재차 사정했다.
“부황, 장완은 자살한 겁니다. 소청오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요. 저와 시녀들 모두가 보았습니다. 장완이 스스로 비수를 가슴에 꽂은 겁니다.”
황제는 실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육공주를 보았다.
“회양, 대체 언제까지 이럴 셈이냐?”
“부…… 부황…….”
고개를 든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황제의 낯선 눈빛에 가슴이 끝없이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부황, 저는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진실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네 모친에게 가서 소청오와 합의 이혼을 진행하라 전하거라.”
“안 돼요, 부황! 합의 이혼은 절대 안 됩니다. 전 아직 소청오를 연모합니다……!”
황제가 눈을 찌푸리며 겨우 마음속의 화를 억눌렀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지금 소청오와 이혼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다.”
“싫어요, 절대 안 돼요.”
“좋다. 여봐라. 공주를 영안궁으로 데려가거라. 짐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이지 말고 외출도 일절 금하거라.”
“네, 폐하.”
“부황,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황제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갑자기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서립, 월왕은 아직 소식이 없느냐?”
서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월왕 전하께서 강남에 도착하신 뒤로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황제의 이마에 내 천 자가 깊이 파였다.
“강남으로 사람을 더 보내 월왕의 안전을 지키도록 하여라.”
“네.”
서립이 떠나려던 그때, 시위 한 명이 급히 달려오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아뢰었다.
“폐하, 속보입니다. 임강 강둑이 터져 임강성, 회안성, 기수성이 잇달아 침몰되고, 백성 수만 명이 갈 곳을 잃었으며, 월왕 전하께서도 실종되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