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인과응보
화가 나 펄쩍 뛰는 소문원을 보자, 소청오는 피곤함이 요동쳤다.
“회양이 충동적이고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면서도 며느리로 들이신 건 아버지입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네 이놈…… 지금 이 아비한테 말대꾸하는 게냐?”
“이 지경까지 온 이상 아버지께서도 너무 이것저것 신경 쓰지 마십시오.”
소문원은 이를 악물었다.
좌천되고 나서 조정 내 동료들에겐 비웃음거리였고, 심지어 예전엔 굽신대기 바빴던 이들조차 이때다 싶어 같이 가담했다.
어머니는 병상에 누워계셨고, 아내인 맹 씨는 집을 떠났다. 거기에 육공주와 장완의 기 싸움으로 인해 소씨 가문 전체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젠 아들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소문원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생각해 보니 목운요가 공주부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집안이 한시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이 지경까지 오다니!
“청오, 우리 소씨 가문이 정말 끝난 거냐?”
소청오가 낙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버지. 진왕 전하께서는 자신의 혐의를 벗느라 바쁘신데 저희를 살려 줄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도 조정에 오래 계셨으니 쓸모가 없어진 도구의 결말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우리 소씨 가문이 진왕한테 해 준 것이 얼만데!”
소청오가 비웃듯이 말했다.
“아버지께서도 타인의 사정을 봐준 적이 없으신데, 이제 와서 다른 이가 옛정을 봐주길 바라시는 건가요?”
“말에 뼈가 있구나. 혹시 아직도 목운요의 일로 내게 앙금이 남아 있는 게냐?”
소문원이 화가 난 눈으로 아들을 노려봤다. 그에 소청오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갔다.
“이런 불효자식! 목운요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더 잘 알잖니. 우리 집안을 살리기 위해 그랬다는 걸 왜 아직도 몰라주는 것이냐?”
“그래서 원하던 대로 되셨나요? 아버지의 매정한 일 처리 방식이 결국 소씨 가문을 궁지에 몰아넣은 겁니다!”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목운요가 가만히 있었을 것 같으냐? 목운요는 우리 집안을 망치려고 작정한 것이다! 네 외할머니가 어떻게 됐는지 봤잖니? 다음은 우리 차례야!”
소청오가 주먹을 꽉 쥔 채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과응보지요.”
그 말에 소문원은 크게 놀랐다. 아들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분노와 함께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청오, 너는 이 아비의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우리 집안을 이끌어 갈 기둥이다. 완전히 끝이 나기 전까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우리 소씨 집안이 소청…… 아니, 허연한의 목숨을 구한 은인인데, 장공주 전하께서 도움을 주실지도 모르잖니.”
소청오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고개 들어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소문원을 바라보았다. 늘 존경스러웠던 아버지가 이제는 말이 통하지 않는 야만스러운 사람 같았다.
“그건 저희가 장공주 전하를 속이려고 지어낸 거짓말이지 않습니까. 현실은 겁 없이 장공주의 딸을 훔치고, 그 진실을 숨기기 위해 장공주의 딸과 외손녀에게 몹쓸 짓을 했죠. 설사 대라금선(大羅金仙)이 환생한다 해도 이 썩을 대로 썩은 소씨 가문을 구하진 못할 겁니다.”
“그럴 리가 없다! 모든 일이 나와 네 조모의 계획안에 있었다. 소씨 가문은 곧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얻게 될 것이야.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는 없단 말이다!”
“……저한테도 책임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아버지와 할머니를 말렸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넋이 나간 듯 의자에 걸터앉은 소문원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아니, 아직 낙담하기엔 이르다. 우리한텐 아직 우의가 있잖니. 목운요든, 장공주든 황제보다 지위가 높기야 하겠느냐? 폐하께서 다시 우리 소씨 가문을 등용하신다면 분명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누가 승자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소청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소문원은 이미 허황한 꿈에 빠져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그만 쉬십시오. 전 회양한테 가 보겠습니다.”
“그래. 공주란 자가 머리가 이리 나빠서야. 우리 집안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크게 벌을 줘야 마땅하다!”
소청오가 잠깐 멈칫하더니 바닥에 깨진 찻잔 조각을 밟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문을 나섰다.
그는 문 앞을 지키던 몸종에게 낮은 소리로 분부했다.
“아버지를 잘 지켜라. 그리고 절대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거라.”
“큰 도련님…….”
“못 알아들은 게냐?”
고개를 홱 돌린 소청오의 표정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아닙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한편, 허연한은 소씨 가문의 소식을 빠짐없이 보고받고 있었다.
“곡 마마, 앞으로도 계속 소씨 가문을 상대로 손을 써야 할까요?”
곡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인, 우매하여 큰 도리는 모릅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요. 어떤 사람이 길 가다 뱀을 만나 반쯤 죽이고 나서 방심하고 지나가려 할 때, 반쯤 죽은 뱀이 갑자기 튀어 올라 그 사람의 목을 물었다더군요.”
허연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히 죽이지 않으면 오히려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말이군요.”
“서릉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종잡을 수가 없지요. 어제까지만 해도 번창하던 집안이 하룻밤 새에 빈털터리가 되는 경우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세상일은 정말 예측 불가합니다. 소씨 가문이 지금이야 꼼짝 못 하는 신세지만, 언제 또 전세 역전을 할지 모르죠. 그렇다면 다음 계획을 실행해야겠군요. 소근한테 썼던 방법 그대로 육공주한테 쓰는 거죠……. 다만 절대로 목숨이 위험해져선 안 됩니다.”
“네, 부인. 염려 마십시오.”
문 앞에서 허연한과 곡 마마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목운요는 그제야 소리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를 뵙습니다.”
“요아야, 어서 오너라.”
허연한이 안 좋은 안색으로 억지로 웃음을 보이는 게 보였다. 목운요는 덜컥 걱정이 되어 물었다.
“어머니,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다. 그냥 예전에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났을 뿐이야. 소씨 가문한테 우리는 쉽게 죽일 수 있는 개미와 같고, 사람은 개미의 생각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고. 그런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서, 내가 뱉은 말 한마디로 소씨 가문이 크게 흔들리는구나……. 혹시라도 내가 권세의 유혹에 빠져 소씨 가문 사람들처럼 될까 봐 두렵다.”
목운요가 곧장 그녀의 곁에 기대며 위로를 건넸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우린 절대 그들처럼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소씨 가문이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인과응보일 뿐이에요. 이익을 위해 혈육도 스스럼없이 버리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한 끝까지 죄를 지으며 살 거예요.”
허연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오늘의 고민을 늘 되새기며 권세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 * *
이튿날, 갑작스러운 폭우에 서릉 전체가 안개 속에 휩싸였다.
창가에 앉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던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봄에 이렇게 큰비가 내린 적이 없는데…….”
옆에 있던 금란도 동의를 표했다.
“그러게요. 올해 날씨가 유별난 것 같아요. 봄에 들어서자마자 더위가 찾아오더니, 여름이 오기도 전에 큰비가 웬 말일까요?”
그 시각, 소부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밖으로 나온 육공주는 휘청거리다 그대로 빗속에 주저앉아 버렸다.
뒤따라 뛰쳐나온 소청오가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자, 시녀가 죽기 살기로 말리며 소리쳤다.
“공주님, 어서 궁으로 도망가세요! 폐하께서 살려 주실 거예요!”
온몸이 푹 젖은 육공주는 고개를 돌려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소청오를 바라보았다.
“내 모든 것을 당신한테 바쳤는데 날 죽이려 하다니……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짓을…….”
“회양, 오해요! 누군가가 날 음해하려는 게 틀림없소.”
빗물이 준수한 얼굴을 타고 떨어지는 모습에, 육공주는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소청오를 다시 믿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장완이 우산을 들고 나타났다.
“쯧쯧, 몰골이 말이 아니군요.”
화가 난 육공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장완……!”
장완은 한 걸음씩 계단에서 내려오더니, 얼굴을 가리고 있던 너울을 천천히 벗었다.
“이렇게까지 치를 떨 필요 없어요. 우리 둘 다 소씨 가문이라는 흙탕물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이니까요. 이제 와서 빠져나갈 길도 없고요.”
소청오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장완, 적당히 하시오.”
그에 장완은 입꼬리를 올린 채 육공주에게 다가가 우산을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회양. 당신이 사냥터에서 나를 밀치는 바람에 난 크게 다쳤었지. 그땐 매일매일 당신을 찢어 죽이고 싶었어. 그런데 지금 이 꼴을 보니 나와 같이 소청오한테 시집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
볼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에 흉터가 더 선명히 보였다.
“당신 덕분에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소청오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됐지. 가족에게 휘둘리는 꼭두각시인 데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뭐든 하는 어리석은 사람. 회양, 설마 소청오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꿈도 꾸지 마. 저 사람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건 이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한 소씨 가문뿐이거든! 당신과의 혼인도 전부 가문을 지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조용히 듣고 있던 육공주가 장완을 바닥으로 힘껏 밀쳤다.
“헛소리하지 마! 절대 안 믿어!”
“허, 소청오, 역시 대단해. 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게 만들다니. 눈앞에 있는 회양을 봐. 아무런 미안함도 들지 않아?”
장완이 몸을 일으키더니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이를 본 소청오가 급히 다가갔다.
“장완, 뭐 하는 짓이지?”
“움직이지 마!”
그녀가 비수를 육공주의 목에 갖다 대며 외쳤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목을 그어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