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뜻밖의 파견
* * *
다음 날, 목운요가 잠에서 깨자마자 금교가 급히 서신을 건네주었다.
“소저, 육냥이 아침 일찍 보내온 서신입니다.”
화장대 앞에 앉아 서신을 읽은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진왕이 누리고 있는 재물의 출처가 강남이었어.”
목운요는 오래전부터 진왕을 무너뜨릴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친히 빌미를 던져 주다니. 이 일을 제대로 밝히면 진왕은 아마 죽는 것보다 못한 처지가 될 것이다.
“소저, 그리고 어젯밤에 소씨 가문에서 큰일이 났다 합니다. 자객이 소부에 침입해 그 집 사위 양 대인을 암살하려 했고, 소부 큰 도련님까지 팔에 자상을 입었다지 뭐예요. 다행히 심 대인께서 제때 도착했지만, 그 자객들이 잡힌 즉시 자살해 아무런 단서도 얻어내지 못했다더군요.”
목운요의 입가에 웃음이 더 짙어졌다.
“소씨 가문은 바람 잘 날이 없네요. 이부인과 소우한테 한동안 문을 꼭 닫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 전해 줘요.”
“네, 소저.”
단장을 마친 목운요는 식사하기 위해 어머니를 찾아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멍하니 있는 허연한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요아 왔구나. 어서 와서 방금 만든 떡을 맛보거라.”
“무슨 걱정이 있으신 거죠?”
“아니다. 걱정할 게 뭐가 있겠니. 어제 낮에 차를 많이 마셔서 밤에 잠을 설치는 바람에 피곤해서 그렇다. 염려 말거라.”
목운요는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내쫓기듯이 나와야 했다.
목운요를 보낸 뒤, 허연한이 곡 마마를 불러와 고민을 토로했다.
“곡 마마,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곡 마마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부인. 장공주 전하께서 부인께 소씨 가문을 맡겼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청하지 말라고는 안 하셨습니다. 장공주 전하께서는 언제나 부인 편이니, 얼마든지 도움을 청하셔도 됩니다. 서릉에서는 출신과 권력을 가장 중요시하지요. 높은 위치일수록 모든 일이 수월해지는 법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 *
장공주는 자신을 찾아온 허연한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언제 날 찾아올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왔구나. 소씨 가문 노부인의 팔을 부러뜨린 건 아주 잘했다. 앞으로 손 씨가 함부로 나서는 일은 없을 테니.”
허연한도 자신이 그런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노부인이 손짓으로 목운요를 배후라고 지목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홧김에 지시를 내려 버린 것이다.
“소씨 가문의 여자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만, 소문원은 조정 관원이라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통 모르겠어요.”
“연한아, 황상이 어찌 그 많은 비빈을 두게 된 건지 아느냐?”
“황상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시니, 황실의 맥을 잇기 위해서라도 여인을 항상 옆에 두시지…….”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 멈춰 버렸다.
그에 장공주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네 말대로 단순히 맥을 잇기 위해서라면 지금 황상 슬하에 황자가 많아야 말이 되지. 하지만 후궁으로 선택되고 높은 봉위를 얻고, 또 아이를 낳고 총애를 받는 이 모든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단다. 후궁의 일거수일투족이 조정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지.”
허연한은 크게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황상께서도 참 쉽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황제가 자기 맘대로 살았다면 아마 조정이 벌써 난리가 났을 거다.”
장공주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소씨 가문의 여자들을 잘 통제한다면, 소문원을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가 될 것이다.”
허연한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이제 알 것 같아요.”
“서두르지 말거라.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을 거란다.”
“네.”
* * *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냥이 소식을 전하러 왔다.
“주인님, 양렴이 형부 감옥에 갇혔습니다. 제명이 보낸 소식에 따르면, 릉왕이 양렴에게 큰 죄명을 씌우려고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형부 감옥이라……. 절대로 양렴이 옥중에서 살해당하면 안 돼. 그리고 진왕부의 재물 정보를 릉왕한테 흘리되, 너무 티가 나서는 안 된다. 나머지는 릉왕이 스스로 조사하고 알아내야 의심 없이 믿을 거야.”
“네, 지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삼 일 뒤, 양렴을 심문하던 릉왕이 강남 소금세와 관련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몇 안 되는 단서는 전부 진왕을 가리키고 있었다.
릉왕은 제명을 불러들였다.
“릉왕 전하를 뵙습니다.”
“강남에도 습보헌 점포가 있었지?”
제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전하.”
“습보헌이 강남에서의 영향력이 어떠하냐?”
“평판에 있어서는 하운방을 따라갈 수 없지만, 영향력에 있어서는 크게 뒤처지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릉왕의 눈에 빛이 번쩍 스쳐 지났다. 어리석은 진왕 덕분에 큰 보물을 손에 쥔 셈이었다.
“그럼 습보헌 사람들을 동원해 강남 소금세에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널리 퍼뜨리게 해라.”
제명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강남 소금세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릉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알아도 무방하겠지. 양렴의 자백에 의하면 강남 소금세 적자가 크게 났고, 그 금액이 몇백만 냥은 족히 된다고 하는구나.”
“몇백만 냥 말입니까?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군요. 불과 얼마 전에 소금 상인들을 잡아냈는데 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황상께서 아시면 필히 크게 노하실 겁니다.”
“지난번 진왕의 음모 때문에 소금세에서 큰 손해를 봤었지. 이번에는 진왕이 똑같이 당하게 될 거다.”
“네. 걱정 마십시오.”
릉왕이 분부를 내리고 얼마 뒤, 목운요가 바로 소식을 접했다.
육냥은 한쪽에 서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님, 제명에게 손을 쓰라고 할까요?”
“릉왕이 시킨 대로 하라고 하거라. 릉왕과 진왕은 오랫동안 서로 싸워 왔지만 그 누구도 큰 이득을 보진 못했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릉왕이 쉽게 놓칠 리는 없을 거야.”
“네.”
* * *
며칠 사이에 강남 소금세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쫙 퍼져, 결국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크게 노한 황제는 소금세 문제를 철저히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예상외로 그 일이 월왕한테 주어졌다.
소식을 들은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금란이 걱정되어 물었다.
“소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너무 의외의 결과라서 놀랐을 뿐이에요. 장공주 전하께선 어디 계시죠?”
“현재 부인과 함께 유방원(留芳园)에서 꽃구경 중이십니다. 얼마 전에 소저께서 새로 옮겨 심은 동백꽃을 무척이나 좋아하셔서, 거의 매일 유방원에 가서 감상하십니다. 지금 가 보시겠어요?”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가죠. 그보다 하운방에서 주문받은 옷은 거의 다 만들어 가나요?”
“네. 일손이 많다 보니 진도가 빨리 나가고 있습니다.”
“하운방에 가 봐야겠네요. 올해가 유난히 더위가 빨리 와서, 최대한 빨리 만들어 내야 해요.”
“네, 소저.”
하운방으로 향한 목운요는 마감 작업에 직접 나섰다. 집중해서 일하다 보니 근심 걱정도 어느새 잊어버렸다. 금란이 말을 건네지 않았더라면 날이 어두워진 줄도 몰랐을 것이다.
“소저, 장공주 전하와 부인께서 이만 돌아오시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알겠어요.”
목운요는 뭉친 어깨와 손목을 풀며 손을 씻고 내려왔다.
하운방 앞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마차 창이 열리면서 월왕의 미소 띤 얼굴이 나타났다.
“운요.”
“전하……?”
“내가 바래다주마.”
깜짝 놀란 목운요가 좌우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마차에 올라탄 그녀를 보고 월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들었겠지만, 부황께서 나에게 강남 소금세 사건 조사를 맡겨, 내일 아침 일찍 강남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빨리요?”
“한시가 급하다. 강남에 악소문들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는구나.”
목운요의 걱정 가득한 표정을 보고 월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염려 말거라. 강남에 심혈을 기울인 것들이 빛을 볼 때가 왔다. 하루빨리 조사를 마치고 서릉으로 돌아오마.”
“전하의 능력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강남 소금 상인들은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지난번엔 천운이 따라 겨우 계획대로 된 거였지요. 이번엔 소금 상인들도 미리 대비했을 겁니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까 걱정됩니다.”
“네가 나를 기다려 주는 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월왕이 애정 어린 눈으로 목운요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 목운요의 귀가 빨개졌다.
“전 지금 진지하다고요. 꼭 조심하셔야 해요.”
“그래. 알겠다. 그보다 이번엔 은자를 벌어들일 좋은 방법이 없느냐? 이 기회에 강남 소금 상인들을 제대로 털어 버리려 한다.”
목운요는 상황도 잊고 웃음이 절로 났다.
“전하, 설마 저를 돈 쓸어 담는 금갈퀴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소금 상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똑같은 수에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물론 그들의 재산을 꾀어내는 근본적인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가산을 몰수하는 방법이지요. 황상께서 전하를 강남으로 보낸 이유 중 하나가 전하의 냉정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군. 그래, 맘 편히 먹고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거라.”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런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탐관오리의 재산 오십만 냥을 찾아낸 관원이 그중 삼 할을 빼돌리고, 수하가 이 할을 숨기고, 또 관청의 관리가 일 할을 가져갔더니, 황제 앞으로 보고된 재산이 은자 구만 냥에 불과했다지요. 결국 횡령한 돈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죗값도 덜 받았고요.”
“걱정 말거라. 빼돌리더라도 내 주머니에만 들어갈 것이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십니다, 전하.”
“다 네 덕분이지.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더냐.”
목운요가 잠시 월왕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그보다 얼마 전에 정 총관이 장부 계산에 아주 능한 사람 몇 명을 하운방에 들였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복잡한 장부라도 그들한테 맡기면 식은 죽 먹기라고 하니, 혹시 필요하시면 요청하십시오.”
“알겠다.”
그때, 마차 밖에서 우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야, 소저. 도착했습니다.”
목운요는 곧장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무사히 잘 다녀오십시오, 전하.”
그 순간 월왕이 가까이 다가와 손을 잡더니, 녹색 옥구슬 팔찌를 손목에 끼워 주었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라.”
피부에 닿은 옥구슬에서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따뜻함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네, 전하. 부디 조심하십시오.”
“그러마.”
목운요는 공주부 앞에서 멀어져 가는 마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그만 들어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