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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284화 (284/442)

284화 월왕의 비밀

장공주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그래. 혹시 이 어미가 강요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전혀 아니에요. 절 위한 일이라는 걸 잘 압니다.”

“운요한테는 네가 귀띔해 주거라. 요즘 운요와 월왕 사이가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 보니, 둘 다 엄청난 속앓이를 하고 있을 테야.”

“네…….”

“사실 그 둘은 헤어질 필요가 없다.”

장공주가 한숨을 내뱉으며 한 말에 소청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니, 그 말씀은 두 사람을 인정하겠다는…….”

장공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것뿐이다. 월왕은…… 사실 황상의 혈육이 아니다.”

소청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세한 얘기는 아직 할 수 없구나. 다만 월왕도 곧 진실을 알게 될 텐데, 그 아이가 자신의 출신을 알게 되면 어떻게든 운요와 함께하려고 할 거다. 그렇게 되면…….”

허연한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월왕이 황실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목숨이 위험해질 게 뻔한데…… 그러면 요아는…….”

냉정한 사람일수록 사랑에 깊이 빠지기 쉽다. 목운요와 월왕이 바로 그랬다.

목운요는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이 월왕에게 향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결단력 있는 아이가 여태까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장공주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연한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미리 장애물을 제거해, 진실이 밝혀져도 두 사람이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다.”

허연한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잘 알겠습니다.”

장공주가 소청의 손을 잡았다.

“너무 걱정 말거라. 네가 내 딸인 이상 서릉에선 그 누구도 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소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일도 식은 죽 먹기일 테지만, 가장 중요한 건 네 마음 먹기에 달렸다.”

“할 수 있어요.”

허연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요아를 위해서라면 전 뭐든지 할 거예요.”

“그래. 오늘은 푹 쉬어라. 내일부터는 소청이었을 때를 깨끗이 잊고, 나 의덕 장공주 영관의(宁绾懿)의 딸로, 황제께서 친히 봉한 일품 혜의 부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네.”

* * *

한편, 방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온통 어머니 걱정뿐이었다.

금란은 목운요의 뭉친 어깨를 주물러 주며 안심시켰다.

“소저, 너무 걱정 마세요. 장공주 전하께서 부인과 속 얘기를 하고 싶어 부른 것일 거예요.”

목운요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외할머니께선 어머니를 정식으로 딸로 인정했으니 더 많은 걸 해내길 바라실 테죠. 어머니께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큰 시련이나 다름없어요.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소저, 저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변화를 겪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나중에 상황에 등 떠밀려 본모습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장 부인과 같이…….”

금란의 말을 들은 목운요는 잠깐 침묵하더니 가볍게 웃어 보였다.

“금란 말이 맞네요.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했나 봐요.”

회귀 전 어머니를 한차례 잃었다 보니 목운요는 어떻게든 소청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안전한 곳에 가둬 두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생각이 정작 소청한테는 상처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소청은 아직 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인생이 길었다. 조금의 변화를 겪는다면 앞으로 훨씬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리라.

금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얼른 쉬세요. 장공주 전하께서 앞으로는 심방원에서 지내라고 하셨어요. 저희들도 내일 제대로 구경 좀 해 보려고요.”

“그래요.”

마음속의 큰 걱정이 사라지자, 목운요도 한결 기운이 났다.

“아, 참. 채의에게 내일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해요. 오늘 입은 옷을 탐내는 사람이 많아, 내일부터 하운방은 엄청 바빠질 거예요. 그리고 전에 준비해 둔 미인책도 배포하라고 전해 줘요. 공들여 준비한 만큼 승부를 볼 때가 온 것 같아요.”

“네.”

* * *

이튿날 아침, 하운방을 열자마자 문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각 명문가의 집사며 마마들이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각자 부인, 아가씨들이 원하는 옷 모양을 전하느라 바빴다.

나름 예상을 하긴 했지만, 직접 이 광경을 본 채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러분, 저기 탁자 위에 미인책이 있습니다. 책자에 오십 벌의 의상이 그려져 있으니, 각자 한 권씩 가져가셔서 원하는 양식을 고르신 다음 치수를 기재하세요. 그럼 거기에 맞춰 옷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미인책을 가지려고 달려들었다. 조금이라도 늦어 이 기회를 놓치면 돌아가서 벌을 받을 게 분명했다.

미인책을 얻은 집사와 마마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오후쯤 되자 오십 벌의 의상 예약이 전부 완료되었다. 동일한 양식을 고른 이들은 목운요가 직접 수정한 의상을 보여 줬더니 바로 해결되었다.

운 좋게 예약을 마친 부인, 아가씨들은 기분이 좋은 나머지 한껏 들떠 있었다.

하운방에서 만든 옷은 단 한 번도 사람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게다가 목운요가 이제는 장공주의 외손녀, 그리고 황제가 직접 봉한 온한 군주 신분이니만큼 그까짓 은자 몇 푼 쓰는 건 일도 아니었다.

* * *

그 시각 월왕부.

우의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왕야, 불선루 첩자 여섯 명을 처리했습니다. 그 여섯 모두 사사(死士, 죽기를 각오하고 나선 군사)였고, 강남 소금세에 대한 정보도 그들이 막았습니다. 하지만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월왕이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사사를 유용할 만한 이라면 누군지 바로 감이 잡히는군. 강남 소금세와 관련된 소식은 없었나?”

“열흘 전, 임강성에 새로 역임한 염운사가 병으로 급사했다는 소식 말고는 없습니다. 세금은 아무 문제 없었고 다른 장부들도 모두 정상이었습니다.”

월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는 없지. 분명 뭔가 있어서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첩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소식을 막진 않았겠지. 운요 말이 맞아. 요새 진왕의 씀씀이가 예사롭지 않긴 했지.”

목운요의 계례 때, 진왕은 엄청난 양의 선물을 보내왔다. 거의 릉왕과 엇비슷한 정도의 규모였다.

릉왕은 외가인 이씨 가문의 재력이 어마어마하니 씀씀이가 대범한 건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진왕 수중에는 이익을 내는 사업이 없을뿐더러, 황자 봉록만으로 살아가는 처지였다. 그 돈으론 관원들의 환심을 사기에도 역부족해, 목운요한테 그 정도 선물을 주기에는 턱도 없었다.

“계속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래.”

* * *

목운요가 젖은 머리카락을 등 뒤로 살며시 넘겼다.

방금 목욕을 마친 그녀의 두 볼은 발그스름해져 있었다. 백옥 같은 피부는 눈부시게 빛이 났고, 살결은 마치 불면 흩어질 것처럼 보드라웠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금란과 금교가 젖은 머리를 말려 주었다.

“소저의 머리카락은 언제 봐도 최상급 비단 같네요. 저희 손길이 거칠어 혹여라도 소저를 아프게 할까 봐 걱정이에요.”

목운요가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웬일로 사탕발림을 하는 거예요?”

“소저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에요. 진심인걸요.”

“됐네요. 그보다 어머니께서는 어디 계시나요?”

“장공주 전하께 칠현금을 배우고 계십니다. 소저와 놀아 줄 시간이 없다고 전해 달라시네요.”

그에 목운요가 낮게 미소 지었다.

“내가 제일 한가한 사람이 됐네.”

그때, 금교가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저, 소부에 또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순간 목운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물기가 묻은 속눈썹은 유난히 진하고 길어 보였다.

“장 부인과 육공주가 또 문제를 일으킨 건가요?”

“아뇨. 이번엔 노부인이에요. 야밤에 발병해 온 마마와 의녀를 할퀴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져서 두 팔이 부러졌대요. 안 그래도 연세가 많으셔서 부러진 뼈가 나으려면 한참은 걸릴 듯합니다.”

목운요는 속으로 흠칫했다. 장완이 노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게 기억난 탓이다. 과연 이번 일이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수를 쓴 것일까?

“노부인 연세가 많으시니, 좋은 약재를 지어다 몸보신시켜 드려야겠네요.”

“네.”

목운요는 장미 향수를 몸에 꼼꼼히 바르고 난 뒤, 옷을 차려입고 앞마당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포근한 날씨 덕분에 꽃들도 하나둘씩 피어나 봄 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녀는 몇 발자국 옮기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고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았더니 약간 더운 느낌도 들었다.

“올해 봄은 유독 빨리 따뜻해진 것 같아요.”

“그러게요. 예년 이월의 서릉은 꽃샘추위가 한창이었다고 들었거늘, 올해는 뭔가 다른 듯합니다.”

햇빛을 가리고 있던 목운요의 손이 허공에서 잠깐 멈칫했다.

목운요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금란이 놀라서 물었다.

“소저, 왜 그러십니까?”

“어머니께는 나중에 가고, 월왕부에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마차 대기시켜요.”

금란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소저, 장공주 전하께서 한동안은 외출을 자제하라고 각별히 당부하셨습니다. 특히 월왕부 말이죠. 이제 신분이 달라져서 자주 드나들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외할머니께는 내가 잘 말해 둘 테니 어서 서둘러 줘요.”

평소와 다른 목운요의 조급한 말투에 금란이 바로 자리를 떠났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급한 일임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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