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겹혼인
“이상하게 오늘 동생을 만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 온 거예요. 운요 동생, 비록 지금은 장공주 전하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매사 조심하는 것이 좋아요. 질투심은 이성을 집어삼키니까. 항상 신변을 조심해야 해요.”
“언니, 혹시 무슨 일 있으셨나요?”
목운요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동생이 내 목숨을 살려 준 보답으로 귀띔해 주는 것뿐이니.”
장완이 고개를 돌려 동백꽃을 쳐다보았다.
“이 꽃이 참 마음에 드는군요. 꼭 나에게 선물해 줘요.”
“잊지 않을게요.”
“그래요. 그럼 전 이만 가 볼 테니 멀리 나오지 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완이 온실을 나섰다. 목운요가 옷을 걸치고 따라갔으나 이미 그녀는 멀리 가 버린 후였다.
금란이 목운요에게 외투를 걸쳐 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소저, 장 소저가 왜 찾아온 걸까요?”
“작별 인사예요.”
“작별 인사요?”
금란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목운요는 슬픈 마음을 가라앉히며 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연꽃처럼 색이 아름다운 동백꽃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금란, 화분을 가져와서 이 꽃들을 미리 옮겨 줘요. 그리고 이십육 일에 가장 아름답게 피어 있도록 신경 써 주고요.”
“네.”
자신이 알던 장완은 이제 없다. 지금의 그녀는 복수의 화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장완에게서 목운요는 자신의 그림자를 본 듯했다. 어머니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자신은 훨씬 극단적인 모습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저 장완이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정월 이십이 일. 소근과 양렴이 서릉에 돌아왔다.
소근은 노부인 손 씨를 보자마자 통곡하다 쓰러졌고, 양렴 또한 소문원으로부터 소씨 가문의 근황을 듣고 나서 몹시 안타까워했다.
한편, 황상의 총애를 받은 소우의는 취용거에 머물며 매일 덕비의 시중을 들었다.
하루는 식사 준비를 하다가 잠깐 정신을 판 탓에 덕비의 다리에다 뜨거운 국물을 쏟아 버렸다. 겨울 의복이 두꺼워 심한 화상은 면했으나, 그로 인해 덕비로부터 큰 벌을 받았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러 어화원에 나온 소우의는 길이 미끄러운 탓에 주 귀인과 충돌해, 같이 호수에 빠져 버렸다. 사람들이 구해 냈을 땐 둘 다 혼절 상태였다. 주 귀인은 그로 인해 유산까지 되고 말았다.
소식을 들은 황제는 크게 노했다. 주 귀인과 오랫동안 합방한 적이 없는데 임신 두 달째로 확인된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후궁 전체가 침묵에 휩싸였다. 주 귀인과 그녀를 보살피던 궁녀들까지 모조리 곤장을 맞아 목숨을 잃었고, 소우의는 취용거 편전(偏殿)에 기약 없이 갇혀 지내게 되었다.
화가 난 덕비는 사람을 거느리고 찾아와, 소우의의 뺨을 내리쳤다.
속옷 차림을 한 소우의는 바닥에 꿇은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덕비 마마, 저 좀 살려 주세요. 황상의 총애를 아직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덕비가 냉소를 지었다.
“살려 달라고? 소우의, 본궁이 네 꿍꿍이를 모를 줄 아느냐? 감히 어화원을 거닐다니, 황상의 총애를 받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지? 나까지 어떻게 해 보려는 게냐?”
덕비 몸에 뜨거운 국물을 쏟은 것에 대한 벌을 받자마자 어화원으로 달려갔다는 건, 누가 봐도 황상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려는 수작이었다.
소우의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마마, 절대 아닙니다. 마마 덕분에 제가 지금 여기 있는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만 닥치지 못해? 후궁에 너 같은 년들이 해마다 무더기씩 죽어 나가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리고 눈물 따위 집어치워라. 본궁은 황상이 아니라 그런 모습이 역겹다!”
“마마…….”
소우의는 가슴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만 같았다.
덕비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서 쥐 죽은 듯 있거라. 한 번만 더 경거망동했다간 본궁의 손에 죽을 줄 알아.”
“마마, 황상께는…….”
“주 귀인 때문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황상의 심기를 건드릴 셈이냐?”
덕비는 울고 있는 소우의를 슥 보더니, 겨우 화를 참으며 말했다.
“네가 다시 황상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
“마마, 감사드립니다!”
덕비가 화가 잔뜩 난 채로 주전으로 돌아왔다. 궁녀가 재빨리 가서 덕비의 어깨를 주물렀다.
“마마, 주 귀인 말인데요……. 배후에 이 귀비가 있는 듯합니다. 설마 저희가 주 귀인을 협박해 합환향을 얻어 온 사실을 이 귀비께서 알아차리진 않았겠죠?”
“소우의가 총애를 받자마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누가 봐도 이 귀비가 손을 쓴 상황이지. 합환향을 흔적도 없이 전부 없애 버려라. 아무리 이 귀비가 날고뛰어도 증거가 없으면 소용없다.”
“예, 마마.”
“조정에서 이씨 가문의 세력이 날로 커져 가고, 후궁에서는 이 귀비가 판을 치고 있고……. 본궁이 자식만 있었더라면 이런 궁지에까지 몰리진 않았을 텐데.”
덕비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무거운 심정으로 말했다.
덕비의 침통한 모습을 본 궁녀들이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너희가 뭔 죄가 있겠느냐. 일어나거라.”
덕비가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소우의를 잘 보살피고 하나부터 열까지 잘 가르쳐 두거라. 내 동생이 소우의를 얼굴만 예쁜 속 빈 강정으로 키워 놨구나. 이제부터라도 잘 가르치면 그래도 쓸 만하겠지.”
“예, 마마.”
* * *
육공주와 장완이 소청오한테 시집가는 날이 되었다.
황궁 내에선 육공주가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었다. 희 마마는 급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전하,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혼례복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늦습니다. 혼례날 늦으면 불길한 기운이 온다 합니다.”
“불길? 장완 그 못생긴 여자랑 동시에 청오한테 시집가는 것만큼 불길한 일이 더 있을까?”
희 마마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육공주의 모친 여비(丽妃)가 들어오더니 그 광경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회양, 어서 옷을 갈아입지 못해?”
“어머니, 너무 억울해요. 장완 그 여자는 분명 스스로 물러났잖아요. 부황께선 왜 갑자기 그 여자를 청오에게 시집보내려는 거죠?”
“회양, 장완과 소청오는 본래 혼약을 한 사이였고 네가 끼어드는 바람에 혼사가 파탄 난 거잖니.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미 부부가 되어 있었을 거다.”
“청오는 장완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요. 게다가 장완은 청오처럼 멋진 남자의 아내가 될 자격이 안 된다고요!”
“이미 늦었다. 부황께서 이미 명을 내리셨으니. 네가 정 싫다면 이 어미가 모든 걸 떠안고 황상께 가서 이 혼사를 취소해 달라고 하마.”
“아니에요!”
육공주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전 소청오와 꼭 혼인할 거예요. 장완이라는 걸림돌이 있더라도 기필코 그에게 시집갈 거라고요.”
부황의 명을 어길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장완과 동등한 신분으로 남편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소씨 가문에서 누가 더 우위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육공주는 자신만만했다. 대학사의 적녀 따위,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마음먹었다면 어서 예복으로 갈아입거라. 늦어서는 안 된다.”
육공주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소청오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내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가마에 올라 소부로 향했다.
혼사를 구경하기 위해 거리에 몰려든 백성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육공주도 명색이 공주인데, 공주부를 따로 지어야 마땅하지 않아? 예를 들어 장공주같이?”
“장공주하고 비할 바가 안 되지. 게다가 육공주는 남의 혼사를 가로막고 소씨 가문으로 시집가는 거잖아. 얼마 전에 시끌벅적했는데 자네 모르나?”
“소문을 들은 것 같기도 하네. 육공주님도 참, 뭐가 아쉬워서 남의 혼사를 막으면서까지 시집을 간대? 게다가 장 소저가 공주를 구하려다 얼굴에 상처까지 입었다면서. 근데 은혜를 갚진 못할망정 혼약한 남자까지 빼앗다니.”
“이 분위기 좀 보게. 어디 공주를 시집보내는 분위긴가?”
“통 이해가 안 가네. 됐고, 구경이나 하자고. 오늘 소씨 가문에서 죽을 나눠 주려나?”
하운방을 시작으로 꽤 많은 상점과 명문가에선 혼사를 치를 때 백성들에게 죽을 나눔으로써 기쁨을 나누곤 했다. 이에 백성들은 하운방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글렀어. 소문에 그 집 둘째 부인이 죽을 나누려고 돈을 마련해 뒀는데, 멀리 시집간 그 집 딸이 돌아오더니 모든 돈을 혼사 준비에 써 버렸대. 마른 나뭇가지를 온통 빨간 천으로 장식해 멀리서 보면 섬뜩할 정도라지.”
“그럴 바에야 죽이나 나눠 주지…….”
* * *
창가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목운요는 바깥에서 연주 소리가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바깥을 내다보았다.
“시끌벅적하네.”
“소저, 육공주께서 청첩장을 보내셨는데 소부에 가실 건가요?”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거기에 끼고 싶지 않네요.”
그때, 육냥이 손에 서신을 들고 나타났다.
“주인님, 강남 쪽에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목운요는 벌떡 일어나 서신을 읽더니,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어디서 알아낸 소식이지?”
“양주성 불선루에서 전해 왔습니다. 두 소금 상인에게서 말이 새어 나왔답니다.”
그녀가 서신을 다시 한번 읽어 보더니, 고개를 돌려 금란에게 분부했다.
“옷가지와 마차를 준비해요. 월왕부에 다녀와야겠어요.”
“네, 소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