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미인의 악수단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월왕은 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일어나서 목운요를 반겼다.
“운요, 부인께서 편찮으시다고 들었다. 좀 어떠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어머니께선 지금 쉬고 계십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운요가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표정에는 이유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태도를 눈치챈 월왕은 가슴을 졸였다.
“운요, 지난번에 한 약속…….”
그에 목운요는 다른 이들을 모두 내보낸 뒤, 곧바로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건 어머니의 신분이 공개되지 않았을 때의 얘기입니다. 어제 등불 잔치에서 소력과 왕 씨가 한바탕 소동을 벌여, 외할머니께서 어머니의 신분을 밝히겠다 마음먹으셨습니다. 저와 전하는 이제 조카와 외당숙이 되는 것입니다.”
월왕은 주변의 공기가 삽시에 차갑게 느껴졌다.
“운요…….”
“전하께서는 장차 큰일을 하셔야 하는 분입니다. 사랑 따위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목운요가 월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점점 창백해져 가는 그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가슴도 바늘로 찌르듯 아파 왔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공주는 소청을 찾기 위해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를 겪었다. 그런 장공주를 생각해서라도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일순위로 둘 수가 없었다.
월왕의 두 눈에 어려 있던 온기가 점차 사라졌다. 그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운요. 오늘은 부인의 안부를 묻을 겸, 소식을 전하려고 왔다. 북강과 운노 지방에 장사하러 갔던 상단이 돌아왔다. 이번 여정으로 십만 냥 가까이 되는 은자를 벌었지.”
그에 목운요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득보단 상로 개척이 우선순위입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지요.”
월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상로 개척만 잘된다면 소금도 팔 수 있을 거다. 그것이야말로 월척이지.”
그때, 목운요가 나무 상자 하나를 건넸다.
“전하, 은자 육백만 냥입니다. 한동안은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상자 안에는 은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통이 참 크구나. 내가 갚지 않으면 어떡하려고?”
그에 목운요가 웃음을 터뜨렸다.
“큰일을 하실 외당숙께서 고작 이만한 돈을 탐하시겠습니까?”
“육백만 냥이나 되는 은자를 고작이라고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걱정 마라. 배로 갚아 줄 테니.”
“그럼 미리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소근과 양렴이 서릉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은 들으셨어요?”
“그래. 며칠 후면 도착한다던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것이냐?”
“아무래도 뭔가 수상합니다. 소씨 가문이 거의 바닥을 치고 있으니 진왕의 주머니 사정도 어려워야 하는데, 그가 세뱃돈으로 은자 이만 냥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제명이 전해 온 소식에 의하면 진왕이 아직 습보헌의 길을 가로막을 여력이 남아 있다고 해요. 아무래도 소금 상인과 연관된 것 같습니다.”
월왕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네가 수상하다고 느낀 거면 십중팔구 문제가 있을 테지. 바로 사람을 시켜 알아보도록 하마.”
월왕이 은표를 챙기자 목운요는 배웅할 준비를 했다. 마음을 정리하려면 당분간은 그와의 만남을 줄여야 할 듯했다.
그런데 월왕은 떠날 기미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가 찻잔을 들고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차 맛이 좋구나. 운요, 부황께 생강차 만드는 법을 진상할 생각이다.”
“생강차요?”
목운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디에 쓰려는 거죠?”
“군중에는 큰 도움이 되지.”
“군중이요?”
그녀는 그제야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군에서도 쓸모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전하 생각대로 하시지요.”
월왕이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운요. 우리가 함께할 수 없다 해도 이렇게까지 거리 둘 필요는 없다.”
목운요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가만히 있었다. 그에 월왕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선물한 비녀도 편히 하고 다니거라.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고. 외당숙으로서 조카를 예뻐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목운요가 속상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넷째 외당숙, 감사합니다.”
* * *
공주부. 황제가 얼굴이 뻘게진 채 앉아 있었다.
“누님, 어젯밤 등불 잔치에 못 간 건…….”
장공주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미인 하나를 얻었다지요. 아끼는 마음이 드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덕비가 짐의 눈앞으로 데려오는 바람에…….”
비록 소우의의 외모와 춤사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그래도 후궁으로 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소우의는 목운요와 사촌 자매 사이인 데다, 나이 차도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젯밤 달밤에 춤을 추는 소우의를 보자 애송이처럼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다……. 지금에야 알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덕비께서 젊은 여인을 황상 곁에 두어 보필하려는 마음이야 알겠다마는…… 아닙니다. 이미 소우의를 월빈으로 봉했으니 마음 가는 대로 하시지요. 다만 옥체를 잘 챙기셔야 합니다.”
“누님, 제가 아직 어린아이로 보이십니까? 그 정도 생각은 있습니다.”
“그럼요. 그나저나 어젯밤 일 들으셨죠? 소청이 내 딸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네요…….”
“누님, 그 둘의 신분이 확신합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물론, 그래도 자세히 알아봐야겠죠.”
“근데 소씨 가문 말입니다. 그 집 노부인이 자신의 딸이 소청의 목숨을 구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쓰러졌다더군요. 이미 사람을 시켜 죽은 딸의 유골을 집으로 가져왔다 합니다.”
장공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빠르기도 하군요.”
“요즘 소문원도 많이 조용해지고 진왕도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서, 몇 개월 뒤에 소씨 가문을 다시 등용할까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었으니 새사람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건 조정의 일이니 황상께서 잘 판단하시지요. 제가 어찌 참견하겠습니까.”
“조정의 일은 저보다 누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씨 가문을 등용한다는 말에도 장공주가 싫은 표정을 짓지 않자, 황제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씨 가문의 일로 누님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지만, 조정에는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신하가 필요했다.
진왕과 소씨 가문이 연속으로 타격을 입은 탓에, 릉왕과 이씨 가문의 발언권에 점점 더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황제 입장에서 이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새로운 가문을 발탁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다 보니, 소씨 가문을 다시 들이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황제가 떠난 뒤, 곡 마마가 탕약을 들고 들어왔다.
“장공주 전하, 약 드시지요.”
탕약을 건네받은 장공주는 단숨에 마셔 버렸다. 쓴맛이 입 안에 퍼지자 저도 모르게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덕비와 소우의에 대해 알아보거라. 그들이 황상께 무슨 수작을 부린 거라면 그들의 손모가지를 잘라 버려야지.”
자신이 버젓이 서릉에 있을 때 그런 추악한 수단을 쓴 거라면, 제대로 혼쭐이 나야 할 것이다.
저녁이 되자, 곡 마마가 소식을 알렸다.
“장공주 전하. 덕비께서 주 귀인을 통해 합환향(合欢香)을 얻어 와, 소우의가 춤추고 있는 사이 황상을 홀린 것으로 보입니다.”
“합환향이라……. 이 사실을 이 귀비한테 알려라. 그럼 뭘 해야 할지 알 것이다.”
“예.”
* * *
육공주의 혼인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목운요는 한창 온실에서 꽃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소저, 대학사부의 장 소저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가위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활짝 핀 장미 한 송이를 잘라 버렸다. 그녀는 장미꽃을 한쪽 바구니에 던져 버렸다.
“잠깐 앉아 기다리시라고 해요. 금방 갈게요.”
“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손님을 맞이하러 가려는데, 장완이 금교 뒤를 따라 걸어왔다.
“동생이 이곳에 온실을 마련했다길래, 궁금한 마음을 못 참고 구경하러 왔어요. 괜찮죠?”
장완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려 두 눈만 보였다. 웃고 있는 그녀의 눈에선 가식이 느껴졌다.
“물론이죠. 다만 여기가 좀 답답해서 언니께서 적응 못 할까 봐 걱정이에요.”
“꽃구경하려면 그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죠.”
이내 목운요가 장완을 온실로 안내했다.
온실 안에는 장미와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었는데, 특히 빨강과 노랑이 조화를 이룬 동백꽃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장완이 동백꽃 앞으로 다가가 웅크리고 앉았다. 비단 치마 끝자락에 흙이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아름답네요.”
“화학령(花鹤翎)이라고 하는 동백꽃이에요. 마음에 드시면 이따가 화분에 옮겨 드릴게요.”
“고마워요. 다만 오늘 말고 정월 이십육 일에 소부로 보내 줘요. 신혼 선물로 말이죠.”
장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동백꽃 옆에서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꽃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목운요는 순간 움찔했다.
“신혼이요?”
“네. 오늘은 동생한테 소식을 전하려고 왔어요. 조정의 어떤 어사께서 소청오가 저와 파혼하는 건 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했다더군요. 나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틀린 말이 아니라, 소청오의 첩으로 들여 달라 황상께 청을 올렸어요. 황상께서도 내가 육공주의 목숨을 구한 것을 굽어살펴 주셔서, 소청오의 평처(平妻, 정실과 동등한 지위)로서 육공주와 함께 소부에 시집가게 되었어요.”
장완의 얘기를 들은 목운요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장완이 살짝 웃으면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벗었다. 얼굴에 난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선명한 두 갈래 상처 자국이 코에서 턱까지 이어져 있었다.
“운요 동생, 내 얼굴이 너무 흉악스럽죠?”
“미인의 기준은 얼굴이 아닙니다. 언니의 온화한 성격과 갈고닦은 학문은 따라올 자가 없을 겁니다.”
“흠, 동생이 알고 있던 장완은 오래전에 죽었어요.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 장완이 아니죠.”
장완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다시 면사포로 얼굴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