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소청 양부모의 등장
“운요야, 굳이 내 곁을 지키지 않아도 되니 정원 구경이나 하고 오너라.”
부인들이 인사 올리러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장공주는 목운요가 불편할까 봐 따로 내보내려 했다.
“네, 외할머니.”
금란과 금교를 데리고 정원을 거닐던 목운요는 저 멀리 취운헌(翠云轩) 앞에 피어 있는 매화꽃을 보고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저 앞쪽 정자에서 잠깐 쉴게요. 둘은 여기서 기다려요.”
금란이 걱정스레 물었다.
“소저, 혼자서 가시면…….”
목운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매화나무 아래에는 등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포근한 노란 불빛이 비친 검붉은 매화 꽃망울은 피눈물 같은 색을 띠었다.
“옥골선풍(玉骨仙风)……. 참으로 예쁜 매화구나.”
“운요 동생, 오랜만이네요.”
살짝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얇은 망사로 얼굴을 가린 장완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언니, 잘 지내셨어요?”
“몇 달간 요양했더니 이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요.”
장완은 목운요를 바라보며 손으로 망사를 만지작거렸다.
“용모가 훼손된 데다 고열로 약을 잘못 쓴 바람에 목소리까지 이렇게 됐어요. 창피하네요.”
“그런 말씀 마세요. 살아 있는 것만으로 너무 다행이에요.”
“살아 있으면 뭐 해요. 겨우 숨만 쉬는 시체나 다름없는데.”
장완이 한숨 섞인 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뻗어 반쯤 핀 꽃봉오리를 꺾었다. 순간 손가락 끝이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운요 동생, 소씨 가문에서 나왔다고 들었는데 나 좀 도와줄래요?”
장완과 눈이 마주친 목운요는 깜짝 놀랐다. 예전의 그녀는 한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워 화낼 때에도 은은한 묵향이 풍기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잔혹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운요 동생은 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장공주 전하의 신임을 얻어 외손녀로 인정받으면서 그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죠.”
장완이 다가가 목운요의 손을 잡았다.
“소씨 가문에서 수도 없이 동생을 궁지에 몰아넣었는데,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장완의 목소리에는 원한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언니, 아무리 그렇다 한들 소씨 가문은 제 혈연이에요. 전 그들을 해칠 수 없어요.”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복수를 하더라도 장완에게 이용당하고 싶진 않았다.
그에 장완은 냉소를 짓더니 맞잡은 손에 점점 힘을 주었다.
“하- 혈연 때문인 거예요, 아니면 청오 오라버니를 잊지 못해서인 거예요?”
목운요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언니, 지금 제정신이 아니군요.”
“내가? 내가 미친 사람으로 보이나요?”
장완의 두 눈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증오들은 마치 송곳처럼 그녀 주위에 빽빽하게 둘러싸여,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난 일편단심으로 소청오를 사랑했고, 그와 혼인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얼굴이 훼손된 데다 파혼의 수치까지 겪었죠. 동생이 보낸 편지가 아니었더라면 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예요. 그건 고마워요.”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금란, 금교가 서둘러 다가와 말렸다.
“장 소저, 자중하세요.”
장완은 잡고 있던 목운요의 손을 놓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운요 동생, 요새 날씨가 영 말썽이니 항상 발밑을 조심해요. 얼음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목운요는 그녀의 눈빛을 피했다. 안 본 사이, 장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장완이 떠나자, 금란은 얼른 목운요의 손을 살폈다. 살짝 빨개진 것 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 소저,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보기만 해도 섬뜩하네요.”
한편 목운요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당시, 그녀는 직접 대학사부에 갈 수 없어서 서신 한 통을 보냈다. 서신은 일상적인 안부 인사로 보였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이 있었으니, 바로 장완 생모의 사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장완에게 있어, 이것만이 유일하게 그녀를 죽음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장완을 보자니 목운요는 자신이 틀린 선택을 한 것만 같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이나 정열람처럼 새 삶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금교는 목운요를 옆에 있는 의자로 부축한 뒤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미처 말씀 못 드린 게 있어요. 소식에 의하면 대학사의 후처인 조 부인이 홍역을 앓아 용모가 훼손되었다더군요. 그래서 오늘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해요.”
목운요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알겠어요.”
사랑이 근심을 낳고, 사랑이 두려움을 낳는다……. 장완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는 온전히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손님들이 거의 다 도착했다. 매화꽃 구경에 한참이던 목운요는 고개를 갸웃했다.
“황상께서 왜 아직도 안 오시지?”
“그러게요. 보통 의덕 장공주께서 오시면 곧바로 황상께서도 도착하시던데. 오늘은 일 때문에 늦어지는 걸까요?”
“새해인데 늦게까지 할 일이 있으려나.”
의아해하며 장공주 곁으로 돌아가자, 마침 진왕이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고모님. 부황께서 오늘 연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됐으니 예정대로 진행하라고 하시네요.”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시작하게나.”
현악기와 관악기 소리가 흥겹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갑자기 색다른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맑고 청아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시선을 돌려 보니 한 여인이 무대 위에서 봉수공후(凤首箜篌)를 연주하고 있었다.
봉수공후는 소리가 워낙 우렁차고 높아, 듣는 사람의 귀와 마음까지 한 번에 사로잡아 버렸다.
장공주는 황홀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음악이 멈추자마자 진왕에게 물었다.
“처음 듣는 곡 같은데, 어떤 곡인지 아느냐?”
“인봉귀(引凤归)라 하는 새로 만든 곡입니다.”
“인봉귀? 곡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상을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한편 미간을 살짝 찌푸린 목운요의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점차 밀려왔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월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순천부 심 대인께서 어떤 노부부를 데리고 오셨는데, 소 부인의 양부모라 합니다.”
“소 부인이라 했느냐?”
“예.”
시위가 대답하며 목운요를 쳐다보았다.
영문 모르고 있던 진왕이 그제야 알아차렸다.
“운요, 너의 모친이 소씨 성이었지? 그럼 그분의 양부모께서 찾아오신 건가?”
목운요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제 어머니의 양부모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지요?”
그 둘은 분명 월왕 부하들에게 감시를 받고 있을 텐데?
월왕은 사람을 시켜 그들에게 소청을 입양할 당시의 이야기를 캐물었으나, 쓸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서릉에, 심지어 진왕부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장공주의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는 소청이 양부모 밑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간에 키워 준 은혜를 고려해 옛날 일을 따져 묻지 않고 사람을 시켜 암암리에 조사 중이었다. 한데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진왕은 난처한 눈빛으로 장공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모님, 심 대인께서 직접 오신 걸 보아하니 중요한 일인 듯합니다. 안으로 들이는 게 어떨까요?”
“그래. 심병괴가 친히 사람을 데려왔으니 보기라도 하자꾸나.”
잠시 후, 심병괴가 노부부를 데리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목운요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곡 마마가 큰소리로 호통쳤다.
“무례하구나. 장공주 전하를 뵈는데 인사도 올리지 않다니!”
“평민 소력과 아내 왕 씨, 의덕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부부가 황급히 절을 올리자, 장공주가 담담히 대답했다.
“일어나거라.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아하니 사람들 앞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군. 그런 게냐?”
장공주의 노기를 느낀 심병괴는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순천부를 찾아온 노부부가 하도 놀라운 말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장공주 전하께서 여기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찾아왔습니다. 제 수양딸 소청뿐만 아니라, 장공주 전하와도 연관이 있어서입니다.”
목운요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소력과 왕 씨를 노려보았다.
의덕 장공주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청과 관련된 일이라면 당사자를 불러와야지. 진왕, 자네한테 맡겨도 되겠나?”
“당장 사람 시켜 모셔 오겠습니다.”
장공주의 냉랭한 말투를 눈치채지 못한 듯 진왕은 여전히 온화한 얼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청이 들어왔다. 그녀는 소력과 왕 씨를 보자마자 안색이 흐려졌다가, 이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네 양부모가 너와 나 모두와 연관이 있는 중요한 얘기를 하겠다고 하는구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리 없는 위압감이 사방에 흩어졌다. 이에 모든 사람이 저절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평소 사람들이 본 장공주는 세속을 멀리하는 모습뿐이었다. 그 누구도 장공주가 칼을 차고 말을 타며 피바다를 누볐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소청은 장공주의 곁에 선 채 복잡한 표정으로 소력과 왕 씨를 바라보았다.
입양되고 나서 그녀는 힘든 나날을 보냈다. 모든 일을 혼자 해내야 했고, 주변에 부모 사랑을 받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자랐다.
나중에 좀 커서야 자신이 수양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불평불만이 사라져 하루 종일 일을 시켜도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목성과 결혼하면서부터 양부모와는 멀어졌고, 점차 그때 기억들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장공주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청이 왔으니 이제 말하게. 도대체 어떤 일이길래 본궁까지 연관되었다는 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