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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274화 (274/442)

274화 진왕부에 가다

* * *

술에 취했지만, 월왕에게 국수 끓여 주기로 한 약속은 기억하고 있었다.

걸음도 똑바로 걷지 못하는 목운요를 혼자 보낼 수 없던 월왕은 그녀를 주방까지 부축해 주었다.

성 공공이 주방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덕에, 주방은 월왕과 목운요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비틀거리며 식칼을 집어 든 목운요를 보고, 월왕이 한걸음에 달려가 말렸다.

“뭘 하고 싶은 게냐? 내가 도와주마.”

“혹시 제가 못 미더워 그러시는 건가요?”

목운요는 억울함이 가득 찬 눈빛으로 월왕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넌 못하는 게 없지.”

그에 목운요가 갑자기 불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친필 증서에 저한테 황금 만 냥을 준다고 썼지요……. 왜 안 줘요?”

바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식칼을 보자, 월왕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살짝 젖혔다.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더냐?”

“당연하죠. 나의 운요, 너는 귀중하기 그지없으니 응당 황금 만 냥을 담아야 마땅하지만, 수중이 곤궁하니 훗날 반드시 메꾸겠다는 증서로 대신한다. 추후 내가 황금 만 냥을 주지 못하면 내 물건 중 다른 것을…….”

읊어 내려가던 목운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의 운요라니…… 월왕의 본심이 훤히 내다보였다.

그사이 월왕은 조심스레 그녀의 손에서 식칼을 뺏어 들었다.

“어쩌지. 지금도 금 만 냥은 줄 수가 없으니 다른 것으로 보상할 수밖에. 나로는 안 되겠느냐?”

“예?”

월왕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 목운요가 눈만 껌뻑였다.

“뭘요?”

“나를 금 만 냥과 맞바꿀 수는 없겠느냔 말이다.”

목운요는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맑고 깨끗한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금 만 냥과 맞바꾸다니요! 전하께서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분이십니다.”

“그럼 날 가지렴. 금 만 냥 대신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나를 얻었으니, 너에게는 큰 이득이겠구나.”

겨우 웃음이 멈춘 목운요는 휘청이며 월왕을 쳐다보았다.

“오히려 제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데요?”

월왕의 말대로라면, 앞으로는 자신이 그를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월왕이라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럴 리가.”

월왕과 대화하는 한편, 목운요는 계속해서 국수를 만들었다. 결국 반 시진이 걸린 끝에 국수가 완성되었다.

목운요는 탁자에 반쯤 엎드린 채, 국수 먹는 월왕을 지켜보았다.

“맛있습니까?”

사실 국수는 소금을 많이 뿌린 탓에 짜기만 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목운요의 눈을 보고 있으니, 산해진미보다도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주 맛있구나.”

목운요는 사랑스런 눈웃음을 지으며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다.

국수를 다 먹고 고개를 들자 목운요는 탁자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월왕은 그녀를 안고서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이를 본 금란과 금교는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아무리 목운요가 월왕에게 마음이 있다 한들, 남녀유별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월왕의 침실은 다른 공간과 마찬가지로 간소했다. 침대 위의 원앙과 달을 수놓은 비단 이불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보화사에서 목운요가 월왕한테 줬던 그 이불이었다.

목운요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 뒤, 월왕은 머리맡에 앉아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눈빛 속에는 다정함이 흘러넘쳤다.

“운요…… 요아…….”

단잠에 빠진 목운요는 익숙한 향기 때문인지, 얼굴을 이불에 비비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목운요를 바라보던 월왕의 가슴속에는 달콤함과 따뜻함이 마구 솟구쳤다.

이렇게까지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이미 정해진 인생 계획까지 바꿔 가며 그녀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그 모든 결정에 대해 그는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음…….”

나비 날개 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목운요가 천천히 눈을 떴다.

덩달아 정신이 든 월왕은 몸이 뻐근함을 느꼈다. 그제야 같은 자세로 침대 옆에 앉아 있은 지 벌써 한 시진하고도 반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운요, 좀 괜찮아졌느냐?”

막 잠에서 깬 목운요는 월왕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급히 주변을 살폈다.

“전하, 제가 어찌…….”

“술에 취해 잠깐 눈을 붙였다.”

취하다니? 목운요는 애써 기억을 돌이켜 보았지만, 머릿속이 온통 하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계화주를 마셨을 뿐인데, 어떻게 취할 수가 있죠?”

“아무래도 처음 술을 마신 듯하구나.”

그러고 보니 회귀하고 나서는 한 번도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월왕의 생일을 맞아 즐거운 나머지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지금 몇 시진인가요? 오늘 밤 진왕 전하께서 주최하는 연회에 늦은 건 아니겠죠?”

“시간은 충분하다. 그보다 나한테 한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목운요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뭘 약속드렸죠?”

“전에 네게 금 만 냥을 주기로 약속했었지. 하나 알다시피 난 이 저택 말고는 가진 것이 없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를 보상으로 데려가야 할 듯싶구나.”

월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멍하니 듣고 있던 목운요는 다시 자신의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하지만 월왕에게 술을 준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전하와 같이 귀하신 분을 어찌 고작 금 만 냥으로 대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에 월왕이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마지못한 투로 대답했다.

“나도 원치 않았는데, 네가 식칼을 들고 위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오늘부로 난 네 사람이다. 앞으로 나한테 잘해 줘야 한다.”

식칼로 위협하다니? 목운요는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짓을?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목운요와 달리, 월왕은 속으로 엄청 즐거워는 반면 얼굴에는 온통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운요, 설마 네가 했던 일을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왜 아무 기억도 안 나는 걸까? 그건 둘째 치고, 가진 거라곤 몸뚱어리밖에 없는 월왕을 금 만 냥과 바꾸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거래였다!

월왕은 슬쩍 웃더니 억지 부리듯 말했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다.”

* * *

마차를 타고 월왕부를 떠나는 길.

목운요는 손에 든 계약서를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밑지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왜 자신이 이 거래에 동의하고 심지어 계약서까지 썼는지 이해가 안 갔다. 게다가 한 나라의 황자가 종이 한 장으로 자신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만인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조용히 옆에 앉아 있던 금란과 금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저, 도착했습니다.”

“네.”

저택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잠시 쉬었다가 진왕부에서 열리는 정월 대보름 연회에 갈 채비를 했다.

이번 등불 잔치는 유독 시끌벅적할 예정이었다. 의덕 장공주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상도 친히 참석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시간이 되자 목운요는 공주부로 가서 장공주와 함께 진왕부로 향했다.

* * *

마차 안에서 의덕 장공주가 목운요를 살피며 물었다.

“운요야,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아까부터 안색이 영 안 좋구나.”

목운요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합니다. 왠지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요.”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장공주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독여 줬다.

“안심하거라. 이 외할미가 있는 한, 그 누구도 너를 다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덕 장공주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일찍이 입구로 마중 나와 있던 진왕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고모님을 뵙습니다.”

“운요, 셋째 외당숙을 뵙습니다.”

“예를 거두거라. 고모님, 오늘 연회는 손님들 모두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즐기는 바이니, 양해 바랍니다.”

진왕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의덕 장공주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래, 가만히 앉아만 있기에는 이 밤이 너무 아쉽지.”

목운요도 뒤따라 진왕부에 발을 들였다.

이곳의 경치는 기억 속과 흡사했다. 한겨울에도 정원 곳곳에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고, 형형색색의 꽃등이 운치 있게 걸려 있었다. 불빛 덕분에 경치도 한결 화려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월왕부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진왕이 장공주를 차자원(姹紫园)으로 모셨다. 들어가기도 전부터 온갖 꽃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이곳은 회귀 전 진왕부에서 지낼 당시, 목운요가 가장 좋아하던 정원이었다. 진왕이 그녀에게 선물한 곳이기도 했다.

당시엔 너무 기쁜 나머지 며칠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월왕부의 아직 완성하지 못한 연못이 더 나을 수도 있으리라.

장공주를 자리에 앉히고 나서 진왕은 목운요에게 말했다.

“운요, 맘에 드는 꽃등을 말해 보거라. 이따가 몇 개 선물해 주마.”

용모가 준수한 진왕은 말투까지 상냥했다. 부드러운 눈웃음에 진지함이 묻어 있어서 상대로 하여금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진왕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운요는 벌써 다 큰 어른이지. 정원에 내가 직접 만든 꽃등이 있는데, 이따 초롱 수수께끼 맞히기를 할 때 다섯 개 맞히면 그 꽃등을 선물해 주마.”

목운요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열심히 맞혀 볼게요.”

“난 이만 손님들께 인사하러 가 볼 테니 무슨 일이 있거든 바로 나한테 말하거라.”

떠나는 진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목운요의 눈빛이 차갑게 변해 버렸다. 자신한테 다정함을 보이는 목적이 무엇일까?

진왕부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지금은 더더욱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마음이 초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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