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273화 (273/442)

273화 매년 이맘때

성 공공이 감탄하며 말했다.

“의복이네요. 어서 입어 보시죠!”

그에 월왕은 흠칫하더니 성 공공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 좀 축이게 차를 준비해 주겠나?”

그러자 성 공공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우항에게 말했다.

“우항, 왕야께 차 한잔 올려 드려라.”

우항은 문어귀를 지키던 시위에게 지시했다.

“거기 너, 왕야께 차 한잔 올려 드려라.”

그러고는 다시 방 안의 상황을 살폈다. 그도 목 소저의 선물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명을 받은 시위는 잠깐 넋을 놓았다가 연신 고개를 끄떡였다.

“예.”

월왕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번 했다. 아무래도 성 공공을 내보내기 쉽지 않아 보였다. 옷을 꺼내 든 그의 얼굴엔 점점 더 화색이 돌았다.

성 공공도 크게 감탄했다.

“목 소저의 솜씨가 정말 대단하네요. 바느질이 정교하다 못해 놀랍습니다. 어서 입어 보시지요.”

월왕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상자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성 공공은 목을 길게 빼며 상황을 살폈다.

“왕야, 소신이 도와드릴까요?”

“성 공공, 왕야께선 탈의할 때 누가 도와주는 걸 싫어하십니다. 잊으셨습니까?”

우항의 말에 성 공공이 한쪽 눈으로 그를 흘겼다.

“몰라서 그러겠느냐?”

잠시 뒤, 월왕이 환복을 마치고 나왔다.

우아한 기품이 넘치는 물색 장포에는 보상화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소매에는 운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안 그래도 준수한 외모가 의복의 힘을 입어 한층 더 멋있어졌다.

성 공공은 또 한 번 감탄했다.

“목 소저의 솜씨가 정말 대단합니다.”

마치 처음부터 월왕의 옷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우항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월왕이 평소에 어두운색 옷만 입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런 색상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보아하니, 이런 밝고 우아한 느낌의 의복이 훨씬 더 그의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월왕은 온종일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심지어 이튿날 입궁할 때도 이 차림 그대로였다.

황상은 유독 눈에 띄는 월왕의 옷차림을 보고 내심 놀랐다. 자신의 소홀함 때문에 월왕이 삐뚤어진 게 아닌지, 의덕 장공주를 찾아가 고민까지 털어놓았다.

요즘은 그의 말투도, 행동도 전혀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의덕 장공주는 그 얘기를 듣고 한참 동안 웃었다. 오히려 황상만 무안해질 따름이었다.

* * *

시간이 흘러 정월 대보름날이 밝았다.

목운요는 아침 일찍 기상했다. 그녀의 옷을 정리하고 있던 금란이 나지막이 물었다.

“소저, 이리 일찍이 등불 잔치에 가시는 건가요?”

“그건 저녁이라 급할 것 없어요. 그 전에 월왕부에 잠깐 들르려고요.”

금란이 생긋 웃었다.

“그럼 오늘 다들 소저만 쳐다보게 제가 정성스레 단장해 드릴게요.”

“금란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혹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면 알려 줘요. 나랑 어머니가 혼사를 책임져 줄게요.”

“아뇨, 전 평생 소저를 모시면서 살 겁니다.”

그 말에 목운요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작년에 담근 계화주가 생각나 금교에게 한 단지 가져오라고 했다.

“저희도 맛보게 한 잔 주실 수 있나요?”

“이건 내가 가져가야 하니 다른 걸 가져와서 먹어요.”

목운요는 계화주와 직접 만든 간식을 챙겨 월왕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한편 월왕은 한참 전부터 목운요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마차에서 내린 목운요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인사 올립니다.”

“어서 들어와라.”

월왕부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인지 빨간 등롱 몇 개가 걸려 있었다.

월왕은 목운요를 따라 집을 둘러보며 더 예쁘게 장식할 걸 후회했다. 그녀가 있기에는 이곳이 너무 누추하게 느껴졌다.

앞마당을 가로지르다 목운요는 모퉁이 쪽에 있는 정자를 가리켰다.

“전하, 저쪽에서 잠깐 쉬어 가실까요?”

“그래.”

성 공공은 재빨리 사람을 시켜 정자에 병풍을 세운 뒤 난로와 폭신한 의자까지 준비했다. 그제야 목운요와 월왕이 자리에 앉았다.

목운요는 금란, 금교에게 짐을 내려놓으라고 한 뒤 안에 들어 있던 간식과 술 단지를 꺼냈다.

“오늘이 전하의 생신이라 축하주 한 잔 올려 드리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그녀의 머리에는 지난번에 선물한 토끼 비녀가 꽂혀 있었다. 목운요의 생글생글한 눈웃음이 적막하기 그지없던 공간에 생기와 색채를 불어넣었다.

월왕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맙다.”

그는 냉궁에서 태어났다. 부황은 단 한 번도 그의 생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암묵적으로 그 사실을 잊고 지냈다. 심지어 장공주도 혹여나 그의 마음이 상할까 한 번도 생일이란 단어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목운요가 처음으로 그의 생일을 챙겨 준 사람인 셈이었다.

월왕이 생각에 잠긴 사이, 목운요는 술 단지를 밀봉한 봉니(封泥, 묶고 봉할 때 쓰던 아교질의 진흙 덩어리)와 힘겨루기를 했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힘써 보았지만 결국엔 열지 못했다.

“내가 하지.”

월왕이 술 단지를 건네받았다.

목운요는 두 손에 입김을 불며 따뜻해질 때까지 문질렀다.

“오늘 같은 날씨엔 계화주 마시기 딱이거든요. 이건 추석 즈음 마지막 계화 꽃잎으로 담근 술이에요. 맛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하께서 처음으로 맛보는 행운을 얻으셨지요.”

뽁 소리와 함께 술 단지가 열렸다. 뒤이어 은은한 술 향기가 순식간에 퍼졌다.

목운요는 향긋한 술 향기를 맡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잘 담가진 것 같네요.”

월왕이 잔에 술을 채우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코를 가까이 댔다.

“맛있겠다.”

월왕은 그 사랑스러움에 못 이겨 웃어 버렸다.

“첫 잔은 너에게 양보하마. 내 생일을 기억해 줘서 고맙구나.”

“오늘의 주인공은 전하예요. 첫 잔은 전하께서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목운요가 잔을 들어 월왕의 잔과 부딪쳤다.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은 아침 햇살보다도 눈이 부셨다.

“전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오늘은 날씨가 유난히 우중충하고 추웠다. 게다가 쓸쓸한 마당 풍경까지 더해지니, 기분마저도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목운요의 눈빛이, 월왕의 가슴에 한없이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너무 따뜻한 나머지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계화주는 술맛이 강하지 않고 목 넘김이 굉장히 부드러웠다. 목운요도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솜씨가 아직 살아 있네요.”

“전에도 계화주를 담가 본 적 있느냐?”

“네. 있습니다. 꽃나무 밑에 묻어 뒀는데, 나무가 잘리는 바람에 술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쉽겠군.”

독 낭자는 목운요가 담근 술을 유난히 좋아해, 매번 훔쳐 갔었다. 그리고 그녀의 술을 마시면 근심, 걱정을 모두 잊을 만큼 취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월왕이 목운요의 잔을 채워 주었다. 맑은 두 눈에 빛이 반짝였다.

“두 번째 잔은 전하의 원하는 바가 모두 이뤄지길 기원하며 올리겠습니다.”

목운요가 다시 한번 월왕과 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셨다. 그러고는 말을 이어 갔다.

“아쉬울 거야 없습니다. 맛이 어떨지도 모르는 술이니 잃어버려도 그만이지요. 그리고 찾았다 한들 그 술이 독주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법인걸요.”

“운요, 괜찮은 게냐?”

월왕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본 목운요는 잔을 내려놓으며 웃어 보였다.

“괜찮고말고요. 갑자기 슬픈 일이 생각났을 뿐이에요. 그나저나 월왕부의 연못 공사는 어떻게 되어 가나요?”

“겨울이라 공사가 더디더군. 아직 진도를 반도 못 나갔다.”

“조급해하실 것 없습니다.”

월왕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정확히 뭔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운요, 취한 게냐?”

“그럴 리가요. 계화주는 담백해서 취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전 오늘 전하를 위한 장수면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취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작년 생일에도 네가 국수를 끓여 줬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작년 정월 대보름날, 목운요가 끓여 준 국수 한 그릇이 한겨울과 같이 차가웠던 월왕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 주었다.

목운요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앞으로 매년 이맘때, 전하를 위해 국수를 끓여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월왕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가 목운요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운요, 방금 한 말 진심이지?”

“그럼요. 전 약속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에요.”

목운요가 고분고분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월왕이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취했구나.”

“아니거든요? 저 멀쩡합니다.”

목운요는 힘껏 부정했지만, 게슴츠레한 눈빛과 눈가에 뻘겋게 퍼진 취기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군. 그럼 어서 국수 한 그릇 끓여 주게.”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녀는 심하게 비틀댔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걸음을 내디뎠으나, 두 발짝도 못 가 월왕의 품속으로 넘어졌다.

월왕은 그런 목운요를 안아 올렸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깃털보다도 가볍게 느껴졌다.

“살을 좀 찌워야겠다.”

목운요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월왕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요?”

“그래야 안았을 때 느낌이 포근하거든…….”

“저 말고 또 누굴 안아 보셨나요?”

목운요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허기도 안으셨나요?”

“아니.”

“거짓말 마세요.”

그녀는 순간 억울함이 차올랐다. 마치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허기 따위에겐 눈길도 주지 마세요. 전하는 저 하나만 좋아해야 한단 말이에요.”

“알겠다.”

월왕이 목운요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전달되자, 그의 가슴이 행복감으로 벅차올랐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혹시 저와 혼인을 못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마음 주지 마세요…….”

목운요는 쓸쓸한 눈빛을 감추려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마치 비에 젖은 고양이처럼 안쓰럽게 몸을 웅크렸다.

월왕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참 이기적이죠?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전하께서 먼저 제 마음을 흔들었으니, 책임지셔야 해요. 나중에 제 출신이 천하에 알려져 혼인을 못 하더라도, 그 옆자리는 남겨 둬야 해요. 전하가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걸 볼 바에야 차라리 제 손으로 죽이고 말겠어요.”

그녀의 말에 월왕은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은 어느 때보다 짙었다.

“그래, 약속하마.”

그는 내심 흐뭇했다. 상대를 독차지하고 싶은 욕구가 그녀에게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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