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선물
* * *
소씨 가문에서 나온 목운요는 하늘을 날 듯 기분이 좋았다. 그녀에게 있어 지긋지긋한 소씨 가문을 벗어나는 건 천금 만금을 얻는 것보다도 즐거운 일이었다.
조씨 가문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에도 그녀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금 부인이 꽤 묵직한 빨간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요아야, 드디어 고생 끝에 낙이 오는구나.”
장공주의 신임을 얻었으니, 소씨 가문도 더 이상 제멋대로 굴지 못할 터.
목운요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의모님께서는 어떠신가요? 금가에서 별일은 없었나요?”
“네 덕분에 훨씬 좋아졌단다.”
부친은 목운요가 장공주의 눈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찾아오는 횟수가 줄었다. 덕분에 금 부인도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보다 궁중 연회에서 소우의가…….”
꽤 많은 이들은 소우의의 꿍꿍이를 곧장 알아차렸다. 목운요의 앞길이 창창한 지금, 절대 그녀 때문에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었다.
“걱정 마세요, 의모님. 소씨 가문의 일은 곧 해결될 거예요.”
한데 그때, 목운요는 누군가가 자신의 옷자락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금 부인의 아들 조질문이었다.
아이는 목운요의 옷소매에 수놓아진 등꽃 무늬가 맘에 들었는지, 포동포동한 손으로 연신 잡아당기고 있었다.
“개구쟁이야.”
금 부인이 아이를 안아 올렸다.
“이 개구쟁이를 어쩜 좋니.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장난을 치니 유모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뭐야.”
“그게 아이들의 특권이잖아요.”
조질문은 금 부인의 품에 안겨서도 발버둥을 치며 목운요를 찾았다.
이에 그녀가 아이를 데려와 품에 안았다. 솜사탕처럼 말랑말랑했다. 아이의 천진난만함에 보는 사람의 마음도 함께 녹아내릴 듯했다.
목운요가 아이 안는 방법을 모를 거라 생각했던 금 부인은 그녀의 노련한 자세를 보더니 장난스레 말했다.
“요아는 정말 못하는 게 없단 말이지. 대체 어떤 복에 겨운 남자가 요아의 부군이 되려나. 우리 요아는 분명 현모양처가 될 게다.”
목운요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웃어 보였다.
조질문은 그림자처럼 목운요의 곁에 딱 붙어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목운요는 조부에서 점심을 먹고 아이가 잠든 후에야 떠날 수 있었다.
* * *
집에 돌아와 보니 사금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목운요를 보자 얼른 다가와 알렸다.
“소저, 월왕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부인과 이야기 중이십니다.”
“알겠어.”
침착한 표정과 달리, 목운요의 속내는 웃음으로 가득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방 안에서 소청의 탄성이 연신 들려왔다. 그녀는 작게 미소 지으며 문을 열었다.
“전하, 어머니, 인사 올립니다.”
“운요, 예를 거두거라.”
월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목운요가 일어서며 물었다.
“두 분이서 무슨 얘길 나누고 계셨나요?”
“월왕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월서에는 눈이 워낙 많이 내려서 사람 키도 넘는다는구나. 자칫 넘어져서 눈 속에 빠지기라도 하면 죽은 목숨 아니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목운요는 월왕을 힐끗 쳐다봤다. 안 본 사이에 허튼소리를 제법 그럴듯하게 하고 있었다. 월서가 눈이 많이 내리긴 하지만, 그 정도로 많은 눈은 절대 내릴 수 없었다.
월왕은 그런 목운요에게 모른 척해 달라는 눈짓을 줬다. 나름대로 소청을 즐겁게 하려고 온갖 수를 다 썼던 것이다.
“네, 맞아요. 그래서 월서는 사람 살 곳이 못 되죠.”
그에 소청이 다시금 감탄사를 내뱉었다.
“월왕 전하께선 그렇게 어려운 환경도 잘 이겨 내셨으니 정말로 배울 점이 많지 않니? 참, 그러고 보니 내가 할 일이 있는 걸 깜빡했구나. 네가 대신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렴. 난 이따가 다시 올 테니.”
“어머니…….”
“월왕 전하께 잘해 드리거라.”
소청이 목운요의 손을 잡고 당부한 뒤, 시녀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고개를 돌린 목운요는 웃음을 띤 월왕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는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전하, 어찌 이리 일찍 오셨습니까? 문안드리러 온 신하들을 만나셔야 하지 않습니까?”
“괜찮다. 월왕부 문을 닫고 손님을 일절 들이지 말라고 얘기해 두었다.”
목적이 훤히 보이는 이들을 만나는 것보단 목윤요를 보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보다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다.”
월왕이 옆에 놓여 있던 상자를 목운요에게 내밀었다.
상자를 열어 본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안에는 다름 아닌 십이간지 형태의 비녀가 들어 있었다.
“정말 색다른 선물이네요.”
그녀가 토끼 모양의 비녀를 꺼내 들었다. 연옥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토끼의 눈은 빨간색과 검은색 두 가지 보석으로 되어 있어 유난히 아름다웠다.
목운요의 손에서 비녀를 가져간 월왕이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에 꽂았다. 그러고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쁘구나.”
그에 목운요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간교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저 말입니까, 아니면 비녀 말입니까?”
월왕은 순간 숨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쿵쾅 뛰었다.
“……네가.”
그 말에 목운요가 활짝 웃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더 보십시오. 그나저나, 하도 많이 봐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면 어떡하죠?”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다못해 월왕은 그녀를 주머니 속에 넣고 매일 함께하고픈 심정이었다. 닳도록 봐도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방 안의 온도가 높아서인지 월왕은 입이 바짝 말라 갔다. 몸도 마음도 화끈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월왕의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목운요가 입을 떼려던 그때, 흰 그림자가 그녀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
“끼잉.”
“답설아.”
그녀는 손으로 눈여우의 털을 쓰다듬었다.
“말썽 안 피웠지?”
이를 본 월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운요, 눈여우는 야생성이 강해 무작정 귀여워하기보다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아이는 알아서 잘할 거예요. 그렇지, 답설아?”
갑자기 오싹함을 느낀 눈여우는 앞발을 모아 흔들며 목운요를 향해 애교를 부렸다.
애교에 녹아내린 그녀가 눈여우의 발을 잡고 월왕께 인사 올렸다.
“어서 전하께 인사드리자. 설날이니 금일봉을 하사하실지도 몰라.”
눈여우는 월왕을 쳐다보더니, 털로 뒤덮인 엉덩이를 내밀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모습에 목운요는 눈여우를 다시 품에 안고 사랑스럽게 얼굴을 비볐다.
“허허, 참…….”
월왕은 마지못해 웃음을 지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겨우 눈여우를 곁에서 떼어 냈다.
“운요, 내가 준 선물이 맘에 드느냐?”
“너무 맘에 들어요.”
목운요가 상자 속 비녀로 시선을 돌렸다. 이토록 마음 써 준 선물을 마다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럼 혹시 뭐 잊은 거 없느냐?”
비녀를 만지작거리던 목운요는 잠깐 멈칫하더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물었다.
“제가 뭘 잊었다는 가죠?”
“내 선물은?”
“전하 선물은 이미 드렸잖아요?”
“언제?”
목운요가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향낭을 가리켰다.
“그 향낭 말이에요.”
“내가 빼앗아서 얻은 건 선물이라 할 수 없지.”
“그럼 없어요.”
“정말 없는 게냐?”
“네, 없습니다.”
월왕은 실망감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껏 한 번도 날 위해 수를 놓은 적이 없구나. 이 향낭도 내가 겨우 빼앗은 거고…….”
한껏 풀이 죽은 월왕의 모습에, 목운요는 문득 자신이 너무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께선 의복이 차고 넘치시잖아요.”
“그렇지 않다. 해가 바뀌었는데 아직 옷 한 벌도 새로 장만하지 못했거든.”
목운요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럼 제가 돈을 드릴 테니 두어 벌 지어 입으시죠.”
“휴…….”
월왕이 다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말투에는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다른 사람이 지은 옷은 없어도 그만…….”
하나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목운요가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러 가 볼게요. 전하께서도 다른 볼일 없으시면 그만 돌아가세요.”
“운요?”
“금란, 금교. 손님 배웅해 드려요.”
목운요는 그대로 뒤돌아서 떠나 버렸다.
* * *
말을 탄 월왕이 떠나고, 배웅 나갔던 금란과 금교가 돌아왔다.
“소저, 혹시 두 분 싸우셨어요? 월왕 전하의 표정이 하도 엄숙해서 저희 둘 다 겁먹었지 뭐예요.”
선물을 받고 싶어 안달 난 월왕의 모습을 떠올린 목운요가 웃음을 금치 못했다.
“싸우다니요.”
금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월왕 전하께선 성격이 차갑기는 하나 소저한테만큼은 더없이 관대하시잖아요. 소저 앞에서는 화도 안 내시겠죠.”
그에 금란이 얼른 눈치를 줬다. 지나치게 솔직한 금교는 속에 비밀 하나 없었다. 가끔 보면 사서보다도 못했다.
목운요는 그런 둘을 향해 콧방귀를 꼈다.
“둘이 고생이 많은 것 같아 세뱃돈을 주려고 했건만, 그냥 내가 가져야겠네요.”
“소저, 제가 오래전부터 봐 둔 연지가 있습니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결국 금란과 금교는 평소 자주 목운요를 약 올린 대가로, 눈앞에서 세뱃돈을 놓쳤다.
* * *
그 시각 월왕부.
월왕이 도착하자 성 공공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왕야, 드디어 오셨군요. 목 소저께서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어서 확인해 보시지요.”
“……선물? 운요가 보낸 게 확실한가?”
“네. 방금 다녀갔습니다.”
내내 어두웠던 월왕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본 그는 숨을 가볍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물색 의복 한 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