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소씨 가문과 인연을 끊다
“두 사람을 쫓아내?”
소문원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
“목운요, 우리 가문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것이냐?”
장공주는 목운요를 외손녀로 삼았다. 이들 모녀를 가문에서 쫓아낸다면 소씨 가문이 장공주에게 불만이 있고, 장공주가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을 경시한다는 뜻이 되었다.
“평판이 조금 떨어지든가, 아니면 가문이 망하든가입니다. 제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죠?”
목운요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소문원을 쳐다봤다.
‘평판? 소씨 가문에 평판이랄 것이 남아 있던가?’
소문원은 깊게 숨을 쉬었다.
“좋다. 그렇게 하마.”
이제 그는 더 이상 목운요를 이용할 수 없었다.
“소 대인께선 역시 지혜로우시군요.”
목운요는 소문원에게 끝까지 저항할 기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문원이 소씨 가문의 버팀목인 것 같지만, 사실 실세는 노부인이었다. 그런 노부인이 쓰러졌으니 소씨 가문도 절반은 무너진 셈이라, 이제는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벅찼다.
그리고 소우의는 입궁하여 황상을 모실 준비를 하고 있었고, 소청오는 육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의 구경거리만 늘어나는 셈이었다. 서릉의 백성들은 반년은 무료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리라.
소문원은 이를 악물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목적을 달성한 목운요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이부인에게 물었다.
“이부인, 요즘 잘 지내세요?”
“신경 써 줘서 고맙구나. 요즘 모든 것이 좋단다.”
척 씨는 마음이 복잡했다. 지난날 목운요의 편에 선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척 씨의 식솔도 일찍이 끝장났을 것이다.
“이부인께서 저를 환영하신다면 함께 서원에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환영하고말고. 어서 가자꾸나.”
목운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위에서 씩씩거리는 노부인 손 씨를 보며 미소 지었다.
“노부인, 몸조리 잘하세요. 다음에 시간이 되면 또 뵈러 오겠습니다.”
노부인은 이를 악물고 끊임없이 삿대질했다.
‘빌어먹을 것! 목운요, 저 못돼먹은 것! 내가 귀신이 되더라도 반드시 목운요와 소청을 뒤따라가 곱게 죽지 못하게 만들 것이야!’
노부인의 악에 받친 눈을 본 목운요는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살랑이며 밖으로 나갔다.
서원으로 가자, 목운요의 주변을 감싸던 독기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이부인에게 미안하다는 듯 예를 올렸다.
“아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인사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세요.”
“이렇게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된다. 네가 날 돕지 않았으면 우는 벌써 저승길에 올랐을 테니까.”
그때, 방에 있던 소우가 냉큼 마중 나왔다.
“운요 동생! 왜 이제야 왔어요? 날 잊은 건 아니죠? 만약 날 잊는다면 반드시 복수할 거예요!”
이부인은 몹시 놀랐다.
“우야, 무례하게 굴지 마라.”
소우는 깜짝 놀랐다. 목운요 뒤에 따라온 사람들을 보고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운요…….”
“언니의 복수 따윈 무섭지 않아요.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으니 싸워도 날 이기지 못할걸요?”
목운요는 소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새해에 좋은 물건을 많이 받았죠? 언니니까 제게 새해 선물을 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에 소우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다시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너무 오랜만에 왔잖아요. 좋은 물건이 있어도 동생에게 주지 않고 내가 가질 거예요.”
이부인은 소우를 대하는 목운요의 태도를 보고 한시름 놓았다. 목운요와 소우가 귀엽게 티격태격하는 사이, 그녀는 소청을 접대했다.
방 안에 들어온 목운요는 소우를 자리에 앉힌 후 맥을 짚었다.
“맥박이 훨씬 안정을 되찾았네요. 조금만 더 몸조리에 신경 쓰면 괜찮아질 거예요.”
소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그런데…….”
목운요는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다.
“왜 그래요? 언니는 예전에도 줄곧 나를 잘 챙겨 줬잖아요. 이제 내가 소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서 챙겨 주기 싫은 건가요?”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소우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정말…… 정말로 날 언니로 삼는 건가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날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친구로 지내도 좋아요. 자매보다 더 좋은 친구가 되는 거예요. 어때요?”
“좋죠. 그럼 받은 새해 선물 몇 개를 더 얹어 줘요.”
“사람을 보내 가져오라고 할게요. 전부 줄게요. 내가 받은 선물을 전부 줄게요!”
소우가 웃자 양 볼에 깊은 보조개가 파였다. 유독 귀여운 모습이었다.
목운요는 손가락을 뻗어 소우의 보조개를 찌르고 따라 웃었다.
자신의 인생은 이제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어머니가 있고, 외할머니가 있고, 의부와 의모님이 있고…… 월왕도 있다.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종일 복수와 싸움을 생각하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누려야 했다.
이젠 소우라는 친구까지 생겼으니,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 순조롭길 바랄 뿐이었다.
잠시 후, 이부인이 의원의 방문을 알려 왔다.
목운요의 손을 꼭 잡은 소우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날 보러 꼭 와야 해요. 안 그럼 내가 찾으러 갈 거예요.”
목운요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우가 떠난 뒤, 이부인은 불안한 마음을 드러낸 채 목운요를 쳐다보았다.
“운요야, 의덕 장공주께서 정말 다 알아 버린 거니?”
“네, 그렇게 됐어요.”
“그럼 소씨 가문이…….”
장공주의 딸에 대한 마음은 서릉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제 소씨 가문이 소청을 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걱정 마세요, 이부인. 장공주 전하는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시는 분입니다.”
간신히 진정을 되찾은 척 씨는 손을 꽉 잡았다.
“그래. 장공주 전하께선 현명하고 아량이 넓으시니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추궁하진 않을 거야……. 운요야, 네가 장공주 전하께 좋게 얘기해 주렴…….”
“그렇게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이부인의 기색이 유난히 조심스러운 걸 눈치챈 목운요는 간단한 인사말만 건넨 뒤 자리를 떴다.
* * *
오장이 뒤집힐 지경으로 화가 난 소문원은 동원으로 돌아가 소청오를 불러들였다.
“아버지.”
진왕부에 인사드리러 가려던 참이었던 소청오는 소문원의 부름에 바로 되돌아왔다.
“청오야, 의덕 장공주께서 소청의 출신에 관해 다 알아 버렸다는구나.”
흠칫 놀란 소청오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전하께서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믿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목운요의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듯하구나.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해. 안 그러면 소씨 집안은 정말 끝이야.”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소청오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애초에 조부모님께서 소청을 숨겨 둔 이유는, 다름 아닌 장공주로부터 상을 받기 위해서였지요. 그렇다면 기존 계획대로 진행하는 게 어떨까요?”
“기존 계획대로가 웬 말이냐! 목운요는 우리가 하는 말을 쉽게 믿지 않을 게야.”
“목운요가 믿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소씨 가문을 살리는 거예요. 지금 의덕 장공주는 저희를 자신의 딸을 숨긴 원수로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딸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라면요?”
“이 방법이 먹힌다면야 더할 나위 없지. 근데 의덕 장공주나 황상이나 그리 호락호락한 분들이 아니다. 뒷일까지 잘 고려해야 해. 자칫 전부 다 망치는 수가 있어.”
“조부모님께서도 딸을 잃어버렸는데, 범인은 조모님께 앙심을 품은 하인이었던 겁니다. 복수에 눈이 먼 그는 소씨 가문의 딸을 인신 매매업자에게 넘겼고, 우연히 장공주의 딸과 함께 시골로 입양된 것이죠. 그러다 소씨 가문의 딸이 물에 빠진 장공주의 딸을 구하려다 요절하였고, 소씨 가문의 증표가 소청의 손에 들어가서 소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게 된 겁니다.”
“과연 장공주 전하와 소청이 그걸 믿을까?”
“소청은 그때 워낙 어려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거예요. 저희가 어떻게 이야기를 엮어 가나에 달렸어요. 물론 어느 정도 증거를 내세워야겠지요.”
“소청의 출신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은 그 당시에 모조리 다 없애 버렸다. 그나마 쓸 만한 게 하나 있긴 한데, 네 조모님께 있다. 내가 가져올 수는 있어.”
“다행이네요. 한데 소청을 거둔 소력(苏力)과 왕 씨는 믿을 만한 자들인가요?”
“당연하지. 그러니 네 조모께서도 그들에게 소청을 맡긴 것이다. 그나저나 혹시라도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소문원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소씨 가문이 이미 장공주의 눈엣가시가 된 마당에, 그까짓 게 뭐가 두렵겠나. 청오야, 네 계획대로 진행하자꾸나.”
“네, 아버지.”
동원을 나선 소청오는 눈을 지그시 감고 복잡한 생각들을 억눌렀다. 목운요와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둘 사이의 추억은 오롯이 과거일 뿐, 지금은 그냥 원수 사이였다.
소씨 가문을 지키려는 그와, 진실을 밝히려는 목운요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아무리 가슴이 무너질 만큼 힘들어도, 그는 자신의 선택을 고수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