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풀을 베어 뱀을 놀라게 하다
“외할머니, 한 가지 의논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아라.”
“만약 소우의가 후궁이 되는 데 성공하면 사람들 눈에 저희는 황실의 자매가 되겠지요. 하나는 공주 전하의 외손녀인데, 하나는 황상을 받드는 후궁이라니. 이건 정말…….”
장공주가 눈썹을 찌푸렸다.
“네 말이 맞다. 요즘 도는 소문들이 정말 듣기 좋지 않더구나.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목운요는 잠시 눈빛이 어두워졌다.
“나중에 어색해지기 전에, 지금 확실히 소씨 가문과 관계를 끊는 게 낫겠습니다.”
“소씨 가문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은 거냐?”
“네. 외할머니께서도 제 이름을 족보에 넣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럼 어머니께서 앞으로 소씨 가문과 아예 왕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낫지요.”
장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네가 그리 결심했다면 나도 반대할 생각 없다.”
장공주는 진작부터 소씨 가문을 증오하고 있었다. 증거만 있었어도 소씨 가문을 이대로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장공주가 동의하자 목운요는 온몸에 힘이 넘치는 것 같아서, 웃음을 지으며 장공주의 품에 안겼다.
회귀 전에 너무 고생해서 이번 생에선 하늘이 특별히 보상해 주는 걸까?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목운요는 그동안의 고통마저 진심으로 감사했다.
장공주는 잠시 몸이 뻣뻣해졌다가 얼른 손을 뻗어 목운요를 끌어안았다.
최근 함께 지내며 장공주는 목운요의 성격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겉보기엔 온화해 보여도 실제로는 무척 냉정한 아이였다. 외할머니인 자신과도 시종일관 거리를 유지했는데, 지금은 그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다.
“운요야, 새해가 밝았으니 이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네가 뭘 하든 나와 네 어미는 너를 응원한단다.”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외할머니. 감사합니다.”
“바보 같긴.”
* * *
소문원은 아침 일찍부터 노부인 손 씨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방에 있던 이부인 척 씨가 서둘러 소문원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아주버님을 뵙습니다.”
“제수씨, 예는 거두시지요. 어머니는 좀 어떠십니까?”
척 씨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탄식했다.
“예전과 같습니다. 많은 의원들이 와서 진료해 보았지만 호전되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성미는 더 고약해지셨고요.”
침대에 누운 노부인 손 씨가 죽일 듯이 이부인을 노려보며, 이부인의 얼굴을 할퀴고 싶은 듯 자꾸 공중에 손을 휘저었다.
‘저 몹쓸 년! 방금 날 비웃더니 어디서 착한 척이냐? 내가 침대에 누워서 말을 못 하는 건 척 씨와 목운요의 짓이다! 이 원한을 반드시 갚을 것이다. 저 두 년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야!’
이부인이 나아가 노부인의 손을 잡더니 걱정스레 말했다.
“어머니, 이리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니 효심 깊은 소 부인과 목 소저가 문안을 드리러 올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의원들 말을 잘 들으시고 제시간에 약을 드셔서 얼른 일어나셔야지요.”
약을 먹으라고? 의원들도 이부인이 매수한 자들인데 그걸 왜 먹겠는가? 약을 먹으면 병이 낫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 노부인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분명 내게 복수하려는 것이다. 소우, 그것의 원수를 갚으려고! 과거에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되었어. 그것도 죽여 버렸어야 했다고!’
노부인의 미칠 듯한 살기를 느낀 이부인 척 씨의 눈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이내 그녀가 노부인의 손을 세게 잡았다.
“어머니, 안심하고 기다리세요. 두 사람이 오면 바로 여기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녀가 와서 보고했다.
“소 부인과 목 소저께서 오셨습니다.”
이부인 척 씨가 활짝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서 안으로 데려오너라.”
“네.”
일각 정도 지나서야 문 앞에 발소리가 들렸다.
목운요와 소청이 여섯 명의 시녀를 대동한 채 등장했다. 장공주가 보낸 마마도 있어서, 위풍당당한 일행이 노부인 손 씨의 방을 가득 메웠다.
그 모습에 소문원은 탄식을 내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새해 인사를 하러 온 건가, 아니면 위협하려고 온 건가?’
시녀들이 목운요의 외투를 벗겨 주자 목운요는 소청과 함께 나아가 인사를 올렸다.
“노부인, 소 대인, 그리고 이부인을 뵙습니다.”
소문원은 눈을 부릅떴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감히 소 대인이라고 부르다니? 정신이 나간 것인가? 게다가 새해 인사를 올리러 와서 큰절을 올리진 않고 되레 도도하게 굴다니,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이 두렵지도 않은가?’
목운요는 소청을 부축하며 자리에 앉았다.
“소 대인께선 새해 벽두부터 어찌 그리 화를 내십니까? 무언가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노부인이 눈을 부릅뜨더니 목운요를 향해 ‘읍, 읍!’ 하며 울부짖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말이 나오지 않아 아무도 노부인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노부인, 왜 그러십니까? 선물이 없어 꾸짖으시는 겁니까? 억울합니다. 금란, 준비한 선물을 가져와요.”
금란이 각종 약재를 들고 왔다.
“모두 몸을 보양하는 데 좋은 약재들입니다. 노부인은 연세가 있으시니, 평소에 많이 드셔야 합니다.”
소문원이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너 지금 고의로 그러는 것이냐?”
‘설날에 어찌 약재를 선물할 수가 있는가? 이건 일 년 내내 탕약을 입에 달고 살라는 저주가 아닌가?’
그에 목운요가 차가운 눈으로 소문원을 훑어보았다.
“무엇이 말입니까? 약재를 보내는 게 관을 보내는 것보단 낫지 않나요?”
“너……! 무엄하다! 노부인은 네 외할머니이고 난 네 외숙부다. 웃어른께 그리 말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웃어른? 하,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까?”
“너, 너……. 혹 뭘 알고 있는 것이냐?”
“알아야 할 것도, 알지 않아도 될 것도 결국엔 모두 알게 되었지요. 제 대답에 만족하십니까?”
“너…… 너……!”
소문원은 할 말을 잃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온몸을 위아래로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언제……. 말도 안 돼…….”
목운요는 입꼬리를 올리며 금란의 손에서 약재를 가지고 오더니 탁상 위로 던졌다.
“이젠 제가 이 약재를 드리는 게 합당한 것 같습니까?”
불안하게 앉은 소문원은 놀란 눈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늘게 뜬 눈에 살의가 번득였다.
그의 표정을 본 목운요가 비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사람을 죽여 입을 봉할 생각을 하십니까? 저번 일로는 교훈이 충분치 않았나 봅니다.”
소문원이 이를 악물었다.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저는 소씨 가문을 몰살해 버리고 싶습니다. 소 대인께서 제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목운요! 사람을 기만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제가요? 여태껏 말도 안 되는 죄를 저지른 소문원, 당신의 가문이야말로 사람을 기만한 것 아닌가요?”
목운요가 탁상을 쾅 치며 일어나자 온몸에 압도적인 위엄이 감돌았다.
노부인은 확고해서, 아무리 오랫동안 온 마마와 임우함에게 시달렸어도 절대 그날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소문원이 가장 좋은 돌파구였다.
오늘은 반드시 풀을 베어서 뱀을 놀라게 해야 했다.
소문원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우리 가문은 한 점 부끄럼이 없다! 우리 가문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제가 증거를 못 찾았을 거라고 확신하시나 봅니다? 맞아요. 아직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 대인께서는 조정에 오랫동안 몸담고 계셨으니 이미 알고 계시겠죠. 이제 증거의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정말로 장공주 전하의 마음에 들어 외손녀로 임명되었을까요?”
놀란 소문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맞습니다. 의덕 장공주 전하께서는 이미 제 어머니를 진짜 딸로 인정하셨어요. 그러니 저도 진짜 외손녀가 된 셈이죠.
“말도 안 돼……. 장공주 전하께서 사실을 알고 계신다면, 왜 우리 가문을…….”
“왜 가문을 멸하지 않고 그냥 두셨냐고요?”
목운요는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이유야 간단합니다. 제가 사정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소씨 가문을 단번에 망하게 하는 건 너무 아쉽더라고요. 서서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하려고 했죠.”
소문원의 손이 덜덜 떨렸다. 목운요를 바라보는 두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너무 긴장하여 어떻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야 하는지도 잊었고, 남은 것은 목에 칼이 들어온 것과 같은 공포뿐이었다.
장공주가 알아 버렸다. 소청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소씨 가문이 자신의 딸을 숨겼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생각만 해도 절망적인 사태였다.
소문원의 얼굴을 본 목운요는 가볍게 웃었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설마 노부인이 이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침상 위의 노부인 손 씨는 으르렁거리며 시퍼런 칼날 같은 눈빛으로 목운요를 노려봤다.
목운요는 태연하게 노부인을 쳐다봤다.
“잊을 뻔했네요. 노부인께선 지금 말을 못 하시죠?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신다니, 참으로 안타까울 수 없군요.”
소문원은 한참 후에야 안정을 되찾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려 애썼다.
“오늘 무슨 목적으로 온 것이냐?”
“목적이라……. 목적이 있긴 합니다만.”
목운요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목소리는 깨진 옥 조각처럼 날카로웠다.
“오늘부로 소씨 가문에서 저와 어머니를 쫓아냈다고 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