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월왕의 세뱃돈
* * *
시끌벅적한 아침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들이 문안을 왔다.
그들이 절을 마치자 장공주가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곤 목운요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운요야, 넌 이제 내 외손녀다. 아직 정식으로 선언하진 않았지만, 그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먼저 네 당숙들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렴.”
목운요는 얼떨떨했지만 곧 장공주의 말에 따라 인사를 올렸다.
“외당숙들을 뵙습니다.”
릉왕이 미소를 지으며 세뱃돈 봉투를 꺼냈다.
“네 몫을 미리 준비해 놓아서 다행이구나. 안 그랬으면 고모님 앞에서 체면을 잃을 뻔했어.”
“감사합니다, 큰외당숙. 새해에 모든 일이 뜻대로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에 유왕은 힘겹게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리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된다. 이건 내가 주는 세뱃돈이야. 앞으로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보내 주마.”
목운요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감사합니다. 새해엔 모두 뜻하시는 대로 운이 따르길 바랍니다.”
“별말을 다.”
갑작스레 다 큰 질녀가 생기다니 참으로 신기했다. 유왕은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월왕의 표정이 기대되었다. 마음에 둔 여자가 당숙이라고 불러도 저 냉랭한 표정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다음으로 진왕이 세뱃돈 봉투를 꺼냈다. 진왕은 세뱃돈에 이어 종이 한 장도 건네주었다.
“여기 세뱃돈이다. 그리고 얼마 후 정월 대보름날 옥생원(玉笙园)에서 등불 잔치를 열려고 하는데 운요 너도 특별히 초대하고 싶구나.”
‘정월 대보름?’
목운요는 절로 월왕이 생각났다. 작년 정월 대보름에는 불선루의 일로 바빠서 나중에야 그날이 월왕의 생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목운요가 만들어 준 국수가 월왕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도 알게 되었다.
올해엔 생일을 따로 축하해 주고 싶었건만, 갑자기 진왕의 등불 잔치에 초대받다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엔 소원을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월왕의 앞에 선 목운요는 그와 눈을 마주 보며 절을 올렸다. 그러나 눈빛에 어린 웃음은 차마 숨기지 못했다.
“넷째 외당숙께 인사 올립니다.”
월왕은 천천히 향낭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받아라.”
“감사합니다. 새해엔…… 외당숙께 돈이 끊임없이 굴러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월왕은 향낭을 만지작거리며, 저번에 자신이 너무 짓궂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했다. 다른 황자들에게는 행운과 소원 성취를 기원하더니, 자신의 차례에는 어찌 돈이 굴러 들어오라는 말을 하는지…….
목운요가 다음 황자에게도 문안 인사를 올리는 사이, 유왕이 월왕의 옆에 가서 그의 향낭을 바라봤다.
“넷째야, 이제껏 한 번도 향낭 같은 것을 차지 않더니 오늘은 어찌 생각이 바뀌었느냐?”
월왕은 짙은 남색 예복에 금관을 쓰고 기린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유달리 용맹해 보여서 허리에 맨 하얀 향낭이 유독 눈에 띄었다.
“고모님 앞입니다. 조용히 하십시오.”
그에 유왕은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던 진왕의 눈에 돌연 웃음기가 감돌았다.
“향낭 모양을 보니 여인의 것이로구나. 설마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 것이냐?”
진왕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전각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듣기에는 충분했다.
그사이 목운요가 절을 마치고 장공주 곁으로 갔다.
“진왕 전하, 그 향낭은 제가 드린 것입니다.”
“운요야, 그리 예의를 차리지 말아라. 방금 절을 올리지 않았느냐? 앞으로는 우리를 외당숙이라고만 부르면 된다.”
진왕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친근한 얼굴로 말하니 삼월의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네가 준 것이었구나. 난 또 사황자가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운요, 너도 사황자한테만 선물을 주다니 너무 편애하는 것 아니냐? 어찌 우리에게도 하나씩 주지 않고?”
목운요는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그건 설날 선물로 드린 게 아니라, 예전에 넷째 외당숙께서 저를 도와주신 데 대한 감사의 선물로 드린 겁니다. 나중에 셋째 외당숙께서도 저를 많이 도와주시면 꼭 하나 드리겠습니다.”
진왕이 낮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럼 앞으로 우리도 운요에게 잘 보여야겠어.”
목운요는 고개를 숙이며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오전 내내 돌아다니며 절을 올리고 문안 인사를 드리고 나자 목운요는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푹신한 침상에 기대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 금란이 다가와 물었다.
“소저, 소인이 주물러 드릴까요?”
“괜찮아요. 조금 쉬면 나아질 거예요. 아, 맞다. 방금 받은 세뱃돈 봉투들 좀 주겠어요?”
목운요는 다른 사람들의 봉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궁핍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는 월왕이 돈을 얼마나 줬을지 몹시 궁금했다.
금란이 재빨리 쟁반을 들고 와 목운요의 곁에 놓아주었다.
목운요는 봉투 하나를 뜯어 돈의 액수를 확인하더니 눈썹을 움찔거렸다.
“이만 냥을 주시다니, 릉왕 전하께서 손이 참 크시구나.”
반면 유왕의 세뱃돈은 굉장히 재미났는데, 봉투 안에 팔천팔백팔십팔 냥 팔 문(文)이 들어 있었다. 과연 길조가 가득한 돈이었다. 번듯한 황자님께서 잔돈은 어디서 구했을지 궁금했다.
진왕의 세뱃돈은 릉왕과 액수가 같은 이만 냥이었다.
목운요는 봉투를 옆에 놓고 진왕의 사업을 자세히 조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춘수방과 소씨 가문이 몰락하여 돈줄이 끊겼을 텐데, 대체 어디서 돈을 구해 자유롭게 쓰는 것일까?
마침내 월왕의 봉투 차례가 되었다. 목운요는 조급해하는 기색 없이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그러나 안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안이 비었을 리 없었다. 만약 정말 비었다면 반드시 월왕을 찾아가 따질 셈이었다.
결국 봉투를 찢어 보니 안에 종이가 들어 있었다. 은표는 아니었고 월왕의 친필 증서였다.
[나의 운요, 너는 귀중하기 그지없으니 응당 황금 만 냥을 담아야 마땅하지만, 수중이 곤궁하니 훗날 반드시 메꾸겠다는 증서로 대신한다. 추후 내가 황금 만 냥을 주지 못하면 내 물건 중 다른 것을 가져가도 좋다.]
“나의 운요…….”
네 글자를 속삭이며 목운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콧방귀를 뀌었다.
“과묵했던 예전이 더 나았어.”
그에 옆에 서 있던 금란이 소리 없이 웃었다.
목운요는 월왕이 쓴 증서를 꼼꼼히 챙겼다. 다음에 월왕을 만날 때 만약 황금 만 냥을 줄 여력이 없다면 어찌 갚을 것인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달콤해진 그녀는 침상에 기대 미소 짓다가, 이내 근심에 빠졌다.
‘내 마음은 다시 확인했지만, 앞으로 나는 월왕 전하를 외당숙이라고 불러야 한다. 나와 어머니의 진짜 신분, 그리고 월왕 전하와의 관계가 언젠가는 천하에 밝혀질 텐데, 그때 우린 어찌 처신해야 할까?’
그때, 장공주가 들어와 목운요의 근심 어린 얼굴을 보고 걱정했다.
“설날에 미간을 찌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외할머니, 오셨습니까?”
목운요가 서둘러 일어나 절을 올렸다.
“혹 피곤한 것이냐?”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장공주는 목운요가 머리에 꽂은 매화가 새겨진 옥비녀를 가볍게 쓰다듬더니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운요가 정말 다 컸구나. 조금만 지나면 금방 시집갈 나이이니 이 할미가 참으로 서운하구나.”
“그럼 영원히 외할머니와 어머니 곁에 있을게요.”
장공주는 품에 기댄 목운요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목운요와 월왕의 관계가 세간에 알려지면 두 사람의 혼인은 수많은 망언을 부를 터였다. 월왕에게 황위를 다툴 마음이 있다면 그런 오명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니 목운요는 그저 장공주와 어머니 곁을 지켜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바보같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장공주는 마음이 아파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아직은 모든 것을 밝힐 때가 아니었다. 먼지로 꽉 찬 과거사엔 피비린내가 지독하여, 진실을 밝혔다가는 조정에 지나친 파란을 일으킬 터였다.
황제는 늙고 황자들은 장성하였으니, 이 나라가 다시 혼란에 빠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목운요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속 얘기를 터놓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릉왕 전하와 진왕 전하께서 주신 세뱃돈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해서요. 돈을 너무 많이 주셨거든요.”
장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너는 내 외손녀이니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만 받아야지. 그저 세뱃돈일 뿐이니 편하게 생각해라.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장공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곡 마마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장공주 전하, 황상께서 대신들을 모두 접견하시고 후궁에 가서 연회를 베푸시며 공주 전하께서 오시길 청하십니다.”
“운요야, 여긴 정리하고 나와 같이 가자.”
“아뇨,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어머니와 출궁하고 싶습니다. 의부, 의모님을 뵙고 소씨 가문에도 가 봐야 합니다.”
목운요가 소씨 가문과 무슨 갈등이 있었건, 남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혈육이었기에 쉽게 연을 끊을 수 없었다. 설날에 인사를 드리러 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크게 비난할 터였다.
“알았다. 어차피 오늘 연회는 별로 재미없을 거란다. 그저 음악을 듣고 가무를 구경하는 것뿐이니 안 가도 그만이지. 하나 너와 청이 둘만 소씨 가문에 보내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소씨 가문이 또 이상한 간계를 부리지 못하도록 호위할 이를 보내마.”
“외할머니,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소씨 가문이 감히 절 건드리겠어요?”
“소씨 가문이 무슨 짓을 할지 어찌 아느냐? 그자들의 머리엔 뭐가 든 건지 모르겠다니까. 어제 소우의만 해도…… 되었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말해 봤자 기분만 상하니까.”
목운요는 웃으며 말을 아꼈지만, 속으로는 구역질이 났다.
소우의가 자신에게 복수할 방법을 모색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상 앞에서 알랑거릴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소우의는 황제의 나이가 자기 부친과 비슷한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녀는 취용거에 들어가 덕비의 도움을 받고 있었으며, 맹씨 가문의 청녕 공주가 계책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니 훗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면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