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소우의의 목적
“시작해라.”
장공주가 담담히 말했다.
“……그럼 재주를 뽐내 보겠습니다.”
소우의는 오장육부가 불같은 분노에 타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혀를 꽉 깨물고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하며, 빨간 입술의 입꼬리를 올렸다.
이내 남색 꽃무늬 북을 앞에 둔 그녀가 까치발을 하자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목운요는 약간 넋을 놓았다. 그러다 이내 입가에 약하게 호선을 그렸다.
‘소우의……. 역시 예상 밖이야.’
적지 않은 관원들은 소우의의 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릉 최고 미인 소우의의 발이 아니던가! 평소에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소우의의 맨발까지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실컷 눈요기할 좋은 기회였다.
빠른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우의는 경쾌하지만 강한 박자에 따라 사뿐사뿐 발을 내딛다가, 돌연 빙글 돌았다.
새까맣고 긴 머리칼이 높은 곳에서 빙빙 돌자, 가녀리고 백옥처럼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춤사위에 따라 옷소매에 뿌려 둔 아늑한 향이 퍼져 나갔다.
둥둥둥둥…….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찻잔도 잊은 채 소우의의 춤사위를 구경했다.
점점 달아오르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소우의의 가슴속엔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팔이 부러졌을 때의 고통, 목운요에게 목숨을 위협받았던 치욕이 떠올랐다. 증오심이 깊어질수록, 춤추는 자태는 더욱 고혹적으로 사람을 홀렸다.
북소리가 빨라지며 분위기가 고조됐을 때, 소우의는 갑작스레 춤을 멈추고 북 위에 올라섰다. 빛나는 이마와 목덜미에서 은은한 땀방울이 흘렀고, 길고 아름다운 눈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황상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는 놀란 눈빛으로 소우의를 바라봤다.
“네가 호선무를 이렇게 잘 추는지 몰랐구나.”
소우의는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황상의 칭찬에 황공하옵니다.”
주위 사람들도 입 밖으로 칭찬의 소리를 냈고, 한순간에 소우의는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장공주는 고개를 돌려 목운요를 봤다. 살짝 휘어진 목운요의 두 눈에는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조소가 엿보였다. 그 모습에 장공주는 걱정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소문원의 어둡게 가라앉았던 얼굴도 비로소 풀렸다. 얼마 전 그는 부득이하게 맹 씨를 버렸다. 그리고 소우의에겐 외출 금지령까지 내렸다.
그에 청녕 공주가 찾아와 맹 씨와 소우의를 데리고 가겠다고 고했다. 소문원은 놓아주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을 맹씨 가문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소우의의 맨발을 본 소문원은 불효자식을 끌어 내리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러웠지만, 다행히 황상이 칭찬을 하셨기에 어느 정도 체면을 차린 셈이었다.
주변의 동료들이 술잔을 들고 소문원에게 축하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언제나 가문의 위엄을 과시하던 소씨 가문의 큰 아가씨가 이젠 많은 사람 앞에서 맨발을 보이며 춤을 췄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팔며 생계를 이어 가는 무희라고 볼 것이다. 세상에 이런 대갓집 규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소 대인은 딸아이 교육 한번 잘했구려. 모두 호선무에 매료되었소.”
“맞소.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니까. 여식에게 글공부와 칠현금, 장기가 아닌 춤추는 자태를 연습시키다니.”
소문원은 그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겉으로는 평온한 척하려 애썼다.
“딸아이가 우둔하여 대인들의 칭찬을 받기엔 많이 부족하오.”
소문원을 비웃겠다는 목표를 달성한 관원들은 서로 술을 권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소문원은 완전히 뒷전이 되었다.
한편 소우의는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청녕 공주를 발견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외조모가 싫어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목운요는 장공주의 눈에 들었지만, 자신은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소우의는 오늘따라 모친 맹 씨가 몹시 미웠다. 만약 모친이 완벽하게 준비했다면, 자신의 인생이 이리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소씨 가문은 지금도 예전처럼 사람들에게 존경받았을 터였다.
이제 가족과 모친이 도움을 주지 못하니 소우의는 혼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 유일하게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자신의 외모였다.
여인의 아름다운 용모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과 같다는 말이 있다. 맞은편에 철옹성이 있어도, 미모라는 검이 철옹성을 열 수 있다고 했다. 소우의는 아름다운 얼굴에 자신의 앞날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그때, 환관이 들어와 아뢰었다.
“황상과 장공주 전하께 아룁니다. 불꽃놀이 공연이 준비되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우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장공주에게 말했다.
“올해 불꽃놀이에는 새로운 모양이 많다더군요. 함께 가서 구경하시죠.”
“좋습니다.”
목운요는 앞으로 나아가 장공주가 일어나는 걸 도왔다. 어머니는 금 부인과 함께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전각 앞에서는 이미 모든 불을 꺼 둔 상태였다. 황제와 장공주가 자리에 앉자, 곧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더니 하늘 높이 솟구쳤다. 이내 폭발 소리와 함께 빨간 불꽃이 터졌다가 서서히 아래로 흘러내리며 황금빛 용 모양을 만들어 갔다.
황금빛 용이 서서히 흩어지자 뒤이어 봉황이 춤추며 날아올랐다. 봉황은 아무도 막지 못할 기세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목을 곧게 펴며 하늘 높이 치솟았다.
목운요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장면을 처음 봤기에,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장공주 옆에 서 있던 월왕은 그런 목운요를 바라보다 어둠을 틈타 목운요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에 화들짝 놀란 목운요가 황급히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른 목운요는 손을 빼려고 몇 번이나 힘을 주어 봤으나 벗어나지 못하자, 결국 참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늘 입은 옷은 소매가 길어 손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작을 알리는 봉황 불꽃 공연이 끝난 후에는, 모란 불꽃, 연꽃 불꽃, 녹산호 불꽃, 패랭이꽃 불꽃 등이 펼쳐졌다. 여러 가지 모양의 불꽃이 잇달아 터지는 모습을 보며 황제는 크게 만족했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자 황궁에 등불이 켜지며 전각 앞을 비추었다. 목운요는 재빠르게 손을 빼냈다. 월왕도 장난을 그만두고 살며시 두어 걸음 물러나 목운요와 거리를 유지했다.
황상과 장공주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나머지 사람들은 자유롭게 궐 안을 다녔다.
월왕은 술을 음미하며 맞은편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목운요를 바라봤다. 목운요의 손끝에서 전해진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그때, 진왕이 웃는 얼굴로 월왕을 응시했다.
“넷째야, 나는 네가 사랑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보아하니 내가 크게 착각한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넌 무슨 말인 것 같으냐?”
진왕은 월왕을 향해 웃어 보였다. 빙산 같던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목운요라니!
진왕은 불꽃놀이 도중 월왕과 목운요가 손잡은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뒤였다.
월왕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 그래? 물론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배필이다. 목소저는 얼굴도 곱고, 하운방과 불선루도 가지고 있지. 게다가 고모님께서 어여삐 여기시니, 네가 마음에 품을 만해.”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진왕의 입꼬리가 점점 더 호선을 그렸다.
“그럼 네가 인정하지 않으니, 내가 좋아해도 되겠느냐? 사실 처음 목 소저를 봤을 때 나도 그 모습에 마음이 넘어가 버렸지.”
월왕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차갑고 예리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 한번 해 보시죠.”
진왕은 가볍게 웃었다.
“농담이다. 군자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 법이지! 우린 친형제 아니더냐? 여자 하나 때문에 척을 져서야 되겠느냐?”
‘목운요를 향한 마음이 아주 깊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겠어.’
* * *
궁중 연회가 끝난 후.
덕비가 머무는 취용거(翠榕居)에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소우의가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동안 의녀는 덕비의 무릎에 약을 발랐다. 그러다 약간 힘이 들어갔는지 인상을 찌푸린 덕비가 의녀의 뺨을 내리쳤다.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찰싹’ 소리에 소우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무지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뺨을 맞은 의녀는 변함없이 공손한 태도로 덕비의 무릎을 안마한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제야 덕비는 놀란 표정의 소우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까딱여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소우의, 이리 와라. 얼굴 좀 보자.”
이에 소우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덕비가 매섭게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소우의는 무릎을 꿇은 채로 덕비 앞으로 가서 얼굴을 보였다.
덕비는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소우의의 아래턱을 잡고 혀끝을 차며 찬탄했다.
“하늘이 내려 주신 얼굴이로구나. 궁에서 수년을 살았지만, 너처럼 예쁜 아이는 처음 본다.”
“덕비 마마…….”
소우의는 잘게 몸을 떨었다. 덕비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왜, 두려우냐?”
덕비가 얕게 웃었다.
“그리 반반한 얼굴로 어찌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냐? 아무래도 네가 우둔하긴 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