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263화 (263/442)

263화 다시 기회를 주마

목운요는 아픈 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월왕은 웃는 얼굴의 목운요를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가서 따뜻한 물을 따라 주었다.

“원래는 보화사에서 눈사람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가 허기와 같은 방을 이용하다 보니, 허기에게 방해받기 싫었어. 게다가 하필 폭설이 와서 자선 행사의 막사가 무너졌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서둘러 떠난 것이다. 네가 눈사람을 신경 쓰는 줄 알았다면 눈사람부터 만들어 주고 돌아갔을 텐데…….”

목운요는 심기가 불편한 눈빛을 보였다.

“제가 언제 눈사람을 신경 썼다는 거예요?”

그에 월왕은 옅게 웃은 후, 어젯밤 봤던 목운요를 떠올렸다.

목운요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심한 감기에 걸렸다는 말을 전해 들은 후, 그는 한시도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중에 갔더니 잠든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 채 괴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사람……. 약속도 안 지키고……. 눈사람 만들어 준다고 했으면서…….”

피식 웃은 월왕이 눈사람을 방 안으로 넣고 창문을 굳게 닫았다.

“둘 중 뭐가 맘에 드느냐?”

목운요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두 개 다 주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월왕이 꿇어앉은 모양의 눈사람을 들어 목운요 앞에 놓았다.

“그래서 화가 났느냐?”

그녀는 눈사람을 보다가 다시 월왕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월왕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눈사람을 봐서 이번엔 용서해 드릴게요.”

눈웃음이 가득 번진 월왕의 얼굴은 빛이 나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운요야, 정말 고맙다.”

목운요는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사람을 만졌다.

“잠시만 쓰다듬거라. 눈이 너무 차서 네 감기가 심해지면 고모님께서 날 가만두시지 않을 테니까.”

확실히 손끝이 얼얼했다. 그녀는 부르르 떨며 손을 월왕의 손 위에 올렸다.

“정말 차갑네요.”

월왕은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에 아주 기쁜 빛이 스쳤다.

“운요, 너…….”

그에 목운요는 곧장 손을 빼며 월왕의 기쁜 얼굴을 외면했다.

“네? 뭐가요? 감기가 심하게 들어 정신이 흐려졌는지, 제가 뭘 한 건지 모르겠네요.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이제 그만 가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너와 여기 같이 있을 거다.”

순간 목운요의 귀가 빨개졌다. 이에 월왕은 더 즐거워져서 기쁜 마음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운요야,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하냐?”

목운요는 붉어진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린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월왕 전하, 좀 이따 외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오실 테니 얼른 가 보십시오. 눈사람은 추운 곳에 놔두시고요. 감기가 다 나으면 눈사람을 보러 가겠습니다.”

“날 뭐라고 불렀지?”

“월왕 전하?”

월왕은 이불로 꽁꽁 싸맨 목운요를 손으로 쿡쿡 찔렀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마. 이번에도 틀린 대답을 하면 눈사람을 때리겠다.”

목운요에게는 손을 쓸 수 없으나 눈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목운요는 월왕 때문에 웃음이 나와 두 눈을 빼꼼히 드러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외당숙이라고 부를까요?”

월왕은 화가 치밀어 차가운 손가락으로 목운요의 미간을 눌렀다.

“마지막 기회다.”

목운요는 웃음기가 넘치는 눈으로 월왕을 바라보다가 조그맣게 얘기했다.

“사야…….”

그 한마디에 월왕은 가슴이 철렁했다. 순식간에 온몸이 저릿해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만 가 보마. 궁으로 가서 부황께 자선 행사에 관해 보고드린 뒤 오후에 널 보러 오겠다. 얌전히 약 잘 먹고 있거라.”

“사야께서는 어째 점점 더 말씀이 많아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손가락을 떼더니 목운요의 코끝을 살며시 문질렀다. 차가움에 찡긋거리는 코를 보자 웃음이 터졌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귀엽게 보이는지 잘 아는 듯했다. 목운요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심란해진 마음을 깨달은 월왕은 재빨리 일어났다. 한 번 더 보았다가는 어떤 실례를 범할지 몰랐다.

“그럼 정말 가 보마.”

목운요는 월왕의 인영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뒹굴었다. 곧 입가에 미소가 짙게 번졌다.

월왕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란과 금교가 탕약과 대야를 들고 왔다. 둘은 목운요의 세면을 도운 후 탕약을 건넸다.

“소저, 따뜻할 때 어서 드십시오. 식으면 맛이 더 나빠질 겁니다.”

목운요는 단념한 채 탕약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설탕에 절인 과일을 집어 먹으며 쓴맛을 달랬다.

“어머니께선 지금 주무시나요?”

“아니요. 부인께서는 현재 앞마당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장공주 전하의 수양아들인 허 대인께서 허 소저와 함께 오셨어요. 이따가 소저를 뵈러 오실 거라고 해요.”

“알았어요.”

목운요는 다시 침대 머리에 기댄 채 금란의 말을 들었다.

“그보다 어제 자선 행사가 무척 떠들썩했답니다. 백성들이 하운방을 칭찬해 마지않았어요. 소씨 가문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는데, 청녕 공주께서 소씨 가문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우 아가씨의 건강이 많이 좋아지셔서 이틀 후에 부인과 소저를 보러 오신다고 합니다.”

“알겠어요.”

금란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소저,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대학사부 장 소저의 병이 위중하여 설날을 넘기기 힘드시다고 합니다.”

목운요가 고개를 들었다.

“저번에 태의가 진료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부상도 거의 다 나았다고 했잖아요. 어찌 그리 갑자기 심해진 거죠?”

“듣자 하니 몸의 상처는 거의 나았으나, 혼인이 파기된 후 마음의 병이 깊어지신 듯합니다.”

소청오 얘기를 할 때마다 반짝거리던 장완의 눈빛이 생각나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장완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걸 계속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이었다.

“금란, 붓과 먹을 준비해 줘요. 서신을 쓸 테니 선물과 함께 학사부에 전해 주고요. 최대한 장 소저께 직접 전해 줘야 해요.”

“네, 소저.”

목운요가 편지를 써서 금란에게 건네는 사이, 허기가 방문해 왔다.

“동생, 오늘은 몸이 좀 어때요?”

“언니께 걱정을 끼쳐 드렸네요. 이틀 정도만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

“장공주 전하께서도 어제 밤새 걱정하셨어요. 연말이 코앞인데 얼른 나아야지요. 몸보신에 좋은 약재를 좀 가지고 왔어요. 태의님께서도 지금 먹는 약과 함께 복용해도 된다고 하셨으니 시녀들을 시켜 달여 먹어요.”

허기의 뒤에 있던 시녀가 약재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 하니 나는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병문안하러 올게요.”

“금란, 나 대신 언니를 배웅해 줘요.”

허기가 떠난 후, 목운요의 시선이 탁상 위에 놓인 약재로 향하자 금교는 재빨리 약재를 가져왔다.

“소저, 약재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약재는 별문제가 없어요. 딱 봐도 최상급이거든요.”

“그런데 왜 안색이 좋지 않으신가요?”

“장공주 전하께서 부르신 태의의 품성이 어떤 것 같나요?”

“장공주 전하께서 직접 지명하셨으니 최고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의원이라는 자가 멋대로 내가 사용한 처방전을 누설한 것에 대해서는요?”

목운요가 손을 뻗어 상자 안의 인삼 한 뿌리를 들고 흔들었다.

금교는 방금 허기가 했던 말을 떠올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허 소저는 이 약재들을 태의에게 확인받았다고 했어요. 태의가 소저의 처방을 허 소저에게 알렸을까 봐 걱정하시는 거죠?”

‘허 소저가 보내온 약재 중엔 소저께서 복용하시는 약과 충돌하는 것이 없었어.’

목운요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걸지도 몰라요. 괜찮을 테니 약재를 잘 정리해 줘요.”

허기가 월왕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그녀는 피어나는 편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넘겨짚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네, 소저.”

* * *

치료가 적절했던 건지, 며칠 후 목운요는 많이 호전되었다.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문 안쪽에 서서, 금란과 금교가 문 위에 등롱을 매다는 걸 지켜봤다.

소청은 목운요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다가갔다.

“겨우 나았는데 이렇게 찬 바람을 쐬다간 상태가 다시 악화할 거다. 계속 이러면 며칠 동안 집에 가둬 놓고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게 할 거야.”

“방금 나온 거예요. 금란과 금교가 증인이에요.”

금란과 금교는 등롱을 걸고 맑게 웃었다.

“소저께서 저희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셨는데, 역시 부인께서는 소저를 잘 다루시는군요.”

목운요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새해이니 세뱃돈을 주려 했는데, 이제 보니 세뱃돈이 필요 없는 모양이네요.”

“꼬박 일 년 동안 세뱃돈을 받을 내일만 기다렸는걸요!”

금란과 금교가 연거푸 용서를 빌었다.

그때, 장공주가 사람을 대동하고 찾아왔다. 정원에 가득한 웃음소리에 장공주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멀리서도 신난 너희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무슨 재밌는 일이 있는 것이야? 나도 함께하자꾸나.”

목운요는 곧장 외할머니라고 부르려다가, 장공주의 뒤에 있는 허기를 보고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어서 제 편이 되어 주십시오. 금란과 금교 두 사람이 세뱃돈을 달라고 난리입니다!”

장공주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운요, 너는 아무튼 구두쇠라니까. 그래 봤자 세뱃돈 아니더냐? 내일 금란과 금교를 내게 보내면 후한 세뱃돈을 주마.”

장공주는 목운요에게 언제나 충성을 다하는 두 시녀를 푸대접할 생각이 없었다.

금란과 금교는 장공주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이에 목운요가 장공주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럼 저도 세뱃돈을 주세요.”

“이미 예전에 곡 마마를 통해 창고를 열어 주라 하지 않았더냐. 물건은 골랐고?”

“그럼 내일은 아예 창고에서 지내야겠습니다.”

장공주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퍼졌다.

“하여튼. 열다섯 살이나 먹었으면서 아직도 어린아이 같구나.”

정말이지, 얼음덩어리 같은 월왕과 어찌 함께하게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