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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262화 (262/442)

262화 저도 월왕 전하를 좋아해요

* * *

목운요는 자신이 방에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나도록 허기가 들어오지 않자 조금씩 불안해졌다.

‘혹시 월왕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그때, 허기가 미소를 띤 채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시녀에게 환복과 세수를 도와 달라고 한 뒤 손을 비비며 냉기를 녹였다.

“날씨가 너무 춥네요.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건 몇 년 만인 것 같아요. 그보다 방금 운요 동생이 월왕 전하께 이불을 드리는 걸 봤어요. 이불을 더 가져오라고 했으니 쓰도록 해요.”

“원래 금란과 금교에게 준비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언니 덕분에 수고를 덜었네요.”

짧게 웃은 허기가 옷을 갈아입고 화덕 옆에 앉았다.

“이곳엔 난로와 모피가 있는데도 추위를 견디기 힘드네요. 월왕 전하는 월서 같은 혹한의 지역에서 몇 년 동안 어찌 견디신 건지 모르겠어요……. 나 좀 봐. 속마음을 매번 입 밖으로 꺼내게 되네요. 내가 이런 말을 해서 신경 쓰이는 건 아니죠?”

목운요는 곱게 웃는 허기를 따라 짙은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이나 월왕 전하를 언급하시는 걸 보니 전하께 꽤 호감이 있는 것 같군요.”

그에 허기가 양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맞아요.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염치없다고 하겠지만, 난 남들이 욕하는 게 두려워서 내 마음을 왜곡하고 싶진 않아요. 운요 동생은 날 비웃지 않을 거죠?”

목운요는 잠시 숨을 멈췄다. 두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문득 회귀 전 진왕부에서 만난 독 낭자가 떠올랐다. 독 낭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부를 독살하고, 자기 얼굴을 망가뜨렸으며, 심지어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까지 되었다.

목운요가 독 낭자에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술에 취해 미친 듯이 웃더니 딱 한 마디를 했다.

“후회 안 해.”

목운요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렵게 얻은 마음인데 어찌 비웃을 수 있겠어요?”

허기는 눈부시게 웃었다.

“동생이 날 비웃지 않으면 됐어요. 월왕 전하께선 워낙 차가운 분이셔서 쉽게 다가가지 못하겠네요. 그런 전하께서 동생에겐 잘 대해 주시니, 기회가 된다면 나를 도와주면 안 돼요?”

목운요는 천천히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살짝 고개를 저었다.

“언니, 정말 미안해요. 저도 월왕 전하를 좋아해요. 그래서 언니를 도울 수 없을 것 같아요.”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것처럼 몸과 마음이 홀가분했다.

허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봤다.

“운요 동생, 장난이죠?”

“예전엔 제 마음을 몰랐어요. 그런데 언니가 말하는 걸 들은 후에야 깨닫게 됐어요. 상대방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요.”

“동생…….”

허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의 호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요. 한 사람만 그분의 빛을 보는 건 말도 안 되죠. 처음에 운요 동생을 봤을 때, 난 우리가 꽤 닮았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사람을 보는 눈까지 닮았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네요. 하지만 부디 그것 때문에 나와 멀어지려고는 하지 말아 줘요.”

목운요는 시선을 들어 허기를 살폈다. 허기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알아내려고 급급해하지 않아도 곧 알게 될 터였다.

“시간이 늦었네요. 얼른 쉬죠.”

“좋아요.”

목운요는 그날 밤 유독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난 목운요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창밖을 바라봤다.

폭설은 멈췄고, 하룻밤 사이 내린 눈이 온 대지를 덮고 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땅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숨이 멎을 정도였다.

그녀는 절경을 뒤로한 채 문밖을 살폈다. 눈사람을 만들어 주겠다더니, 눈 쌓인 땅은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잠시 후, 승려들이 재빠른 솜씨로 정원에 쌓인 눈을 쓸었다. 눈이 조금씩 치워지는 걸 본 목운요의 얼굴은 점점 침울해졌다.

장공주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까지도 목운요는 풀이 죽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어젯밤에 제대로 쉬지 못했어?”

시무룩한 목운요의 모습에 장공주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별것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월왕 전하께선 어찌 문안 인사를 올리지 않으십니까?”

“이미 다녀갔다. 서릉에 일이 생겨서 일찍 내려간다더구나.”

장공주는 목운요의 안색을 보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요가 순식간에 군월에게 채여 가겠어.’

월왕이 이미 보화사를 떠났다는 걸 알게 되자, 목운요는 실망감과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자선 행사에 변고가 생겨서 급히 보화사를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정오가 되자 일행은 서릉으로 향했다. 안전을 위해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가다 보니 날이 저물 때쯤에야 서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흔들리는 마차 위에 있어서일까. 목운요는 가슴이 굉장히 답답하다고 느꼈다.

소청은 안색이 좋지 않은 목운요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요아야, 곧 집이니 조금만 더 참아라.”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막지 못하고 눈가가 빨갛게 변했다.

“어머니,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소청은 손을 뻗어 목운요의 이마를 만졌다. 이마가 뜨거웠다. 열이 나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곧장 의원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막 공주부로 돌아가려던 장공주가 그 소식을 듣고 태의를 불러오게 했다.

목운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열에 시달리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심지어 몸까지 조금씩 떨려 왔다.

장공주는 옆에서 손수건을 들어 목운요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아침에는 멀쩡했는데 어찌 이렇게 갑자기…….”

목운요가 몽롱한 채로 눈을 떴다. 걱정 어린 장공주의 얼굴에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외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큰 병이 아니니 금방 나을 겁니다.”

그 말을 하는 목운요를 보고 있으니 장공주의 마음이 더욱 문드러졌다.

“태의가 곧 도착한다고 하니 어서 한숨 자고 있으렴.”

목운요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정신이 혼미한 채로 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깨자 방 안에 촛불이 켜져 있었고, 소청이 옆에 앉아 있었다.

“요아야, 깼구나. 어서 일어나서 약을 마시고 다시 자도록 해.”

목운요는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만 움직여도 머리가 몹시 어지러웠고 귓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수많은 모기가 옆에서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 주무세요? 제 옆은 다른 사람에게 지키라고 하면 되잖아요.”

“넌 한번 병이 나면 크게 고생하잖니. 그런 널 두고 방에 가 봤자 잠들지 못할 거야. 차라리 네 옆을 지키는 게 마음 편하지. 네 외할머니께서도 널 돌보겠다고 하셨는데,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그냥 돌아가 쉬시라고 했다.”

“네, 잘하셨어요. 약 먹고 쉬면 곧 괜찮아질 테니 어머니도 어서 돌아가 쉬세요. 초췌하신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너무 아파요.”

“착한 것. 네가 약 먹는 것만 보고 가서 쉬마.”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이곤 탕약 그릇을 들었다. 탕약이 굉장히 진한지 냄새만 맡아도 쓰디썼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심호흡과 함께 사발에 가득한 탕약을 목으로 쏟아부었다.

수면을 촉진하는 약효가 있는 탕약이었기에 목운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이 몽롱해졌다.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땐 하늘이 밝아진 후였다.

눈을 뜬 목운요는 금란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몸을 일으켜 앉으니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비단 도포를 입은 월왕이었다.

월왕의 차가운 시선은 목운요에게 향한 순간, 근심으로 물들었다.

“어찌 감기에 걸린 것이야?”

그에 목운요는 마음속의 억울함이 짙어졌다. 저 사람만 아니었으면 마음이 어지러워 추운 겨울날 산책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운요의 안색을 살핀 월왕은 빠르게 다가와 곁에 앉았다.

“운요, 화내지 마라. 내가 잘못했다.”

목운요는 코가 간지러워지자 재채기를 하기 위해 소매를 들어 입을 막았다. 하지만 재채기는 나오지 않고 눈가만 빨개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월왕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목운요가 울려고 하는 듯 보이자 자신이 지은 죄가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서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운요, 네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뜨거운 목운요의 손과 달리 월왕의 손가락은 유난히 차가웠다. 목운요는 갑자기 맞닿은 차가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혼미하던 정신도 깨어나는 것 같았다.

“무슨 선물요? 선물 같지 않은 선물이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월왕은 곧장 비단 이불로 목운요를 세심하게 감쌌다. 그뿐 아니라 탕파(湯婆, 뜨거운 물을 넣어 몸을 따뜻하게 하는 기구)를 가져와 목운요의 품에 넣어 줬다. 그 후에야 그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목운요는 창가를 쳐다봤다. 창문 밖으로 푸른 대나무가 보였다. 날이 추워서 대나무 잎은 어두운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우뚝 솟은 대나무들이 비취옥처럼 빛나서 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즐거웠다.

목운요가 대나무를 감상하느라 정신이 나간 사이, 창턱에 작은 눈사람 하나가 올라왔다. 눈사람은 손바닥 두 개 정도의 크기였는데,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양쪽 귀 위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보드라운 비단 치마를 입은 채 뾰로통하게 고개를 살짝 든 모습이었다.

목운요는 두 눈을 깜빡이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하얀 눈으로 이렇게 정교한 모양을 만들다니, 월왕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눈사람이 하나 더 창가에 놓였다.

그 눈사람은 공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 억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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