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260화 (260/442)

260화 질투가 심해지다

“네가 주는 건 풀 한 포기라도 아쉽지만, 남이 주는 건 금은보화라도 아쉽지 않아.”

그녀는 월왕의 진지한 표정에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께선 현재 자금이 부족하시니 누군가 금은보화를 준다면 절대로 안 놓치실 거잖아요?”

“나는 부황께 총애받지도 못하니 날 그리 중히 여기는 사람은 없어. 오직 너만 날 보배로 여기고 금은보화를 줄 생각을 하지.”

목운요의 뺨이 별안간 발그레해졌다.

“누가 전하를 보배로 여긴다고요?”

월왕은 그런 목운요를 바라보며 경쾌하게 한 글자를 말했다.

“너.”

목운요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등 뒤에서 허기가 걸어오는 것을 보곤 장공주의 곁채로 빠르게 들어갔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잡으며 안으로 들어오자 곡 마마는 깜짝 놀랐다.

“아이고, 소저, 어찌 이리 오셨습니까? 여봐라, 어서 소저께 드릴 깨끗한 옷과 신발을 가져와라.”

월왕은 목운요의 흠뻑 젖은 꽃신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젖었다니, 정말 아까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나?’

그사이 하인이 서둘러 목운요에게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제야 곡 마마는 월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인이 실례를 범했습니다. 월왕 전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네. 우선 운요를 잘 챙겨 주게나.”

그때, 허기가 따라 들어왔다.

“왜 이리 바삐 가셨습니까? 뒤에서 따라잡으려 해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아깐 저 때문에 놀라셨지요?”

미간을 찌푸린 월왕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아까는 목운요가 방에 있는 줄 알고 들어갔다가,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이 그녀가 아니란 걸 깨닫고는 급히 밖으로 나왔다. 허기와는 아무런 접촉도 없었으나 허기의 말이나 표정 때문에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월왕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곡 마마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 소저께서도 오셨습니까? 장공주 전하께선 지금쯤 일어나셨을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먼저 들어가셔서 공주 전하의 머리를 빗질해 주시겠습니까? 소인은 목 소저를 마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목운요는 깨끗한 옷과 신발을 받고 곡 마마를 따라 옆방으로 향했다.

“소인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편히 갈아입으세요. 분부하실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마마.”

그녀가 옷을 갈아입자 곡 마마가 들어와서 치마를 정리해 주었다.

“허 소저와 함께 방을 사용하는 게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지금 머무르는 방이 넓은 편이라 문제없습니다.”

목운요는 살짝 웃어 보였지만 어두운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럼 다행입니다. 아까 공주 전하께서 소저를 걱정하셨거든요. 눈이 그치면 얼른 하산하는 게 좋겠습니다.”

곡 마마는 목운요의 치마를 다 정리한 후 하인을 시켜 생강차를 가져왔다.

“두어 모금만 드셔도 몸 안의 한기가 사라질 겁니다. 한데 혹시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목운요는 생강차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았다. 공기 중으로 흩날리는 김처럼 가슴 한구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같았다.

“곡 마마께선 장공주 전하 곁에 오래 계셨으니 견식도 풍부하시지요? 제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어서 가르침을 좀 청하고 싶습니다. 마마께서 보시기엔 제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될 것 같습니까?”

“가르침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소인의 생각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소인이 장공주 전하의 시중을 든 지 벌써 삼십 년이 다 되었네요. 그동안 많은 일을 보고 겪었지만, 여전히 헷갈리는 일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냉철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어떤 때는 본심을 따라서 마음 가는 대로 행하는 게 나을 때도 있지요.”

“그럼 냉철하게 생각할 일과 마음 가는 대로 해야 할 일을 어찌 구분합니까?”

“지금 소저께서 생각하시는 일은, 냉철히 생각하면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있는 일입니까?”

목운요의 눈빛이 흔들렸다. 월왕과의 관계를 끊어 내는 게 가장 합당하다는 걸 알기에 내린 결심인데도 어쩐지 그대로 실천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작은 일 하나를 이리 신경 쓰지 않는가.

목운요가 침묵하자 곡 마마가 웃으며 말했다.

“백 번 고민해도 여전히 마음에서 지울 수 없다면 본능대로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인생은 고작 몇십 년인데 매사 일일이 골몰할 필요 있겠습니까?”

목운요는 찻잔을 세게 감싸 쥐었다. 뜨거운 잔에 손바닥이 데었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곡 마마, 감사합니다.”

사실은 곡 마마에게 물어본 것 자체가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만약 놓을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저께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혹 고민이 계속되신다면 장공주 전하께 물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분명 도움을 주실 겁니다.”

목운요는 생강차를 조금씩 마셔 다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외할머니를 뵈러 가 봐야겠네요.”

대청으로 가니 장공주가 허기를 칭찬하고 있었다.

“네 머리 빗는 솜씨는 여전히 훌륭하구나. 하인들보다 훨씬 낫다.”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운요야, 어서 와라. 나중에 운요 너도 허기에게 머리 빗는 법 좀 배워 보아라.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청이가 매일 빗겨 주느냐? 정말 응석받이라니까.”

목운요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공주 전하께선 매일 절 놀리시는 데 재미를 붙이셨지요? 사실 저도 솜씨 좋게 머리 빗을 줄 압니다.”

장공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래. 오늘은 안 놀리마. 밖에 눈이 내리니 안에서 그림패 놀이나 할까?”

“좋습니다. 제 실력이 뛰어난지라 은자를 많이 준비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장공주는 참지 못하고 목운요의 미간을 콕 찔렀다.

“나중에 지고 나서 코나 훌쩍이지 말아라.”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십니다. 제가 가진 돈이 꽤 많거든요?”

“그래그래. 그럼 봐주지 않으마. 여기서 돈을 벌면 설날에 주머니가 넉넉해지고 좋겠구나.”

방 안이 곧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에 월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고모님, 저도 끼워 주시지요. 운요야, 내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으니 네 돈을 좀 빌려야겠다.”

아무리 의덕 장공주라도 목운요보다 돈이 많지는 않았다.

“그럼 이자를 붙여서 빌려드리겠습니다.”

목운요는 월왕을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나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이자를 꼭 많이 붙일 테다.’

“좋다. 네 마음대로 해라.”

월왕이 웃음기 짙은 목소리로 답했다.

곡 마마가 그림패를 가져오는 사이, 장공주는 소청을 불러서 어떻게 하는 놀이인지 조곤조곤 가르쳐 주었다.

목운요는 고개를 돌려 허기를 바라보았다.

“언니도 함께하시겠어요?”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최근에 다도 연습을 하고 있어서 차를 몇 잔 우려 대접하겠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연주에서도 불선루의 명성이 대단하답니다. 운요 동생 앞에서 차를 우린다니,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네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같이 배우는 거지요.”

이내 넷은 그림패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월왕과 목운요는 서로 마주 앉았는데, 월왕이 무슨 수를 쓰는 것인지는 몰라도 매번 목운요가 가장 처참하게 패했다.

장공주는 손에 든 은표 한 묶음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오늘 내 운수가 정말 좋구나. 이 은표를 모아서 설날에 너희 세뱃돈을 줄 수 있겠어.”

목운요는 남몰래 월왕을 노려보며 소청과 자리를 바꾸려고 마음먹었다.

“월왕 전하 앞자리는 운수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다른 자리로 바꾸겠습니다.”

장공주가 웃으며 승낙했다.

“그래, 그러려무나.”

그러나 자리를 바꾼 후에도 목운요의 운수는 바뀌지 않았다. 이어진 판에서는 소청이 가볍게 연승했다.

목운요는 맥이 빠져서 휑한 탁상 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또 졌네요.”

뾰로통해진 목운요를 보자 월왕은 손가락이 간질간질했다. 부풀어 오른 뺨을 콕콕 찌르고 싶었다.

그사이 장공주는 은표 두 장을 꺼내 목운요에게 건넸다.

“자, 이 돈으로 다음 판에 본전을 되찾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

하지만 두 판을 더 해도 목운요는 연신 돈만 잃을 뿐이었다. 외려 기운이 너무 안 좋다며 얼른 손을 씻고 오라는 놀림을 받았다.

이에 목운요는 곡 마마에게 자리를 넘긴 후 정말로 손을 씻으러 갔다.

젖은 손을 닦으려 하는데 어느새 다가온 허기가 손수건을 건넸다.

“운요 동생은 장공주 전하와 사이가 무척 좋은 것 같네요. 보기만 해도 부러워요.”

“언니도 장공주 전하와 사이가 좋으시잖아요?”

“저도 참, 오해할 만한 말을 했네요. 동생을 질투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감개무량해서요. 공주 전하께서 저리 밝게 웃으시는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어요.”

허기의 벅찬 얼굴은 진심 같았다.

그에 목운요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월왕 때문에 돋았던 마음의 가시들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허기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장공주 전하를 모신 부분은 감사히 여겨야 했다.

“장공주 전하께서는 언니를 볼 때도 무척 즐거워하시던걸요.”

“앞으로는 같이 공주 전하를 잘 모셔요. 그럼 더욱 좋아하실 테니까요.”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월왕이 뒷짐을 지고 걸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월왕은 곧장 목운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손을 씻는데 무슨 시간이 이리 오래 걸리느냐?”

“허기 언니와 잠깐 대화를 좀 나누었습니다. 한데 그림패 놀이를 하시다 말고 어찌 여기까지 오셨어요?”

“돈을 모두 잃었다. 은자 좀 빌려다오.”

월왕의 당당한 말투에 목운요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단속이 필요할 듯싶었다.

“돈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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