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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259화 (259/442)

259화 새로운 세상

* * *

눈발은 점점 거세졌다.

목운요는 손을 뻗어 내리는 눈을 받아 보았다. 눈송이는 손바닥 위로 떨어지자마자 녹아서 물방울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손이 서서히 차가워지자 눈송이가 손바닥 위에서도 녹지 않았다.

손가락은 얼어서 감각이 없었지만, 마음속은 시간이 갈수록 복잡해져만 갔다.

그때, 금란과 금교가 빠른 걸음으로 나와 목운요에게 외투를 걸쳐 줬다.

“소저, 여기서 뭐 하세요? 눈이 많이 내리니 어서 돌아가시죠.”

“북방의 눈을 본 지도 정말 오랜만이네요. 눈 내리는 걸 감상하고 싶으니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어요.”

금교는 목운요를 심히 걱정했다.

“소저, 눈발이 보통이 아닙니다. 감기에 걸리시면 지난 새해처럼 많이 힘드실 거예요.”

“괜찮아요.”

목운요는 말을 마친 후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금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금란을 쳐다봤다.

“어쩌지?”

“소저께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해 드리자. 요즘 별의별 일이 많았잖아? 부인 앞에서는 괜찮은 척하셔도 속으로는 걱정이 태산이셨을 거야. 이렇게 걷기라도 하면 마음이 풀리실지도 모르지.”

“한데 소저 혼자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괜찮아. 육냥이 몰래 따라가고 있거든.”

“그럼 다행이고.”

목운요는 종이우산을 들고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넓디넓은 보화사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나무들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향만이 남아 있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냇가에 다다랐다.

지난번에 이곳에 왔을 땐 등불이 가득했는데, 이번엔 냇물이 모두 얼어 있었다. 그래서 하늘의 별을 비추는 맑은 물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눈발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목운요가 방심한 사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우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운요는 땅에 떨어진 종이우산을 보며 알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

그때, 사뿐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육냥이 우산을 주워 들고 목운요에게 공손히 건넸다.

“주인님, 날이 찹니다. 어서 우산을 쓰십시오.”

육냥의 옷은 무척 얇았다. 눈 속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머리카락과 어깨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오직 집중한 두 눈에만 온기가 있었다.

그런 육냥의 모습에 목운요는 무척 당황했다.

“너…….”

육냥은 별것 아니라는 듯 제 몸에 쌓인 눈을 털어 냈다.

“저는 무공으로 다져진 몸이라 이 정도 날씨는 별것 아닙니다.”

목운요가 종이우산을 받아 들지 않자 육냥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 줬다.

“육냥, 네가 내 곁에서 지낸 지도 꽤 오래됐구나. 나는 네 진짜 신분이 무엇인지, 네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도 없다. 이런 내가 밉지 않아?”

목운요는 육냥을 그저 자신의 아랫사람으로만 여기며 그의 충성심을 마음 편히 누리고 그의 능력을 이용했다. 이를 떠올리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 이름은 주인님께서 주셨잖습니까? 저는 육냥입니다.”

육냥은 자신의 진짜 이름과 신분을 말해 버리면 더는 그녀의 곁에 남지 못할 것만 같았다.

차분한 얼굴의 육냥을 보니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내가 네 성격을 잠시 잊었구나. 육냥, 하지만 너무 바보처럼 굴면 안 돼. 예전의 나는 그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상인의 손에 여섯 냥을 쥐여 주고 널 샀다. 그러나 상대에게 간이라도 내줄 듯 대한다면 결국 상처받는 건 육냥 너야.”

육냥의 머릿속에 처음 목운요를 만났던 때가 스쳐 지나갔다. 당시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인생의 고통을 모르는 어린 도련님 같았다.

한데 여섯 냥에 자신을 사면서도 목운요의 눈에는 그 어떤 경시나 경멸도 없었다. 큰돈을 들여 장검을 사 줬으며, 옷과 음식을 제공해 줬고, 자신을 믿었다.

그게 바로 육냥이 목숨을 걸고 목운요를 따르는 이유였다. 그녀는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육냥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목운요는 얕게 한숨을 내뱉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내 곁을 지키고 싶지 않다면 언제든 말해. 그리고 그때는 네 진짜 이름과 신분을 내게 알려 주면 좋겠다.”

“알겠습니다…….”

목운요는 우산을 들고 있으면서 제 몸에 쌓인 눈은 신경 쓰지 않는 육냥을 바라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명은 어찌 되었지?”

“릉왕에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증거 인멸을 위해 진왕이 제명을 죽이려 했고, 제명이 그것을 알고 나서는 마음을 돌려 릉왕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고 있죠. 머지않아 습보헌도 서릉에 개업할 겁니다.”

“제명의 일 처리는 언제나 마음이 놓인단 말이야. 다른 건?”

“예전에 샀던 식량을 진 총관에게 헐값에 팔았습니다. 요즘에는 비단, 천을 팔아서 돈 몇 푼을 벌었는데 벌어들인 돈을 모두 습보헌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목운요가 작게 웃었다.

“그런 인재는 정말 보기 드물지. 사람을 보내 잘 지켜보라고 해. 릉왕이 제명을 의심하면 바로 철수해야 해. 절대로 제명을 위험에 빠뜨려선 안 돼.”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운요는 육냥의 몸에 쌓인 눈을 바라봤다. 조금 녹아내린 눈은 그의 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장공주 전하께서 많은 사람을 대동하여 주변을 지키고 있으니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 전에 입은 상처가 말끔히 낫지 않았으니 푹 쉬어. 언제나 날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어.”

“제겐 주인님의 안위가 더 중요합니다.”

“마음 놓으래도. 일찍 돌아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어. 감기 옮기지 말고.”

목운요는 육냥의 손에서 종이우산을 가져와 곁채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육냥은 목운요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세상이 온통 흑과 백으로 가득한 가운데, 유일하게 그녀에게서만 색채가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육냥의 세상 같았다.

원래 그의 세상은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텅 비어서 육냥 자신도 무감각해지고 절망에 빠졌을 때, 온갖 색채에 휘감긴 목운요가 제멋대로 그의 세계에 쳐들어왔다. 그리고 그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갔다.

그는 과거의 이름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신분은 더욱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은 육냥이다. 목운요의 앞에선, 영원히 육냥으로 불릴 것이다.

* * *

곁채에 돌아와 보니 회랑에 잔뜩 긴장한 금란과 금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금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속삭였다.

“소저, 월왕 전하께서 안에 계십니다.”

목운요는 깜짝 놀랐다. 우산을 든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마음이 꽁꽁 언 눈밭보다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난 장공주 전하께 가 볼게요.”

말을 마치고 뒤돌아 걸어가는데, 뒤에서 방문이 열리더니 월왕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월왕은 곧장 목운요 앞을 막아섰다.

“어딜 갔다 왔느냐?”

“월왕 전하를 뵙습니다.”

곧 허기가 당황하며 나왔다. 볼이 조금 발그레했다.

“동생, 왔어요?”

목운요는 애써 참으려 노력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설경이 멋져서 잠깐 나갔다 왔습니다. 장공주 전하께서도 잠에서 깨셨을 것 같으니 한번 가 보겠습니다.”

목운요는 말을 마치자마자 월왕 곁을 차갑게 지나갔다.

한편 월왕을 쳐다보는 허기의 눈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월왕 전하, 밖이 춥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셔서 따뜻한 차 한잔 드시지요.”

“괜찮다.”

월왕은 허기를 향해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목운요를 쫓아갔다.

붉었던 허기의 얼굴이 조금씩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이내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더니 월왕과 목운요의 발자국을 따라 장공주의 곁채로 향했다.

목운요의 얼굴에서 냉기가 사라지지 않자 월왕은 마음이 불안했다.

“운요야, 방에는 네가 있는 줄 알고 들어간 것이다.”

“그래도 허기 언니께서 계셨으니 다행입니다. 두 분께서는 사 년 만에 만나셨으니 오랜만에 옛 추억도 떠오르셨겠지요. 예전에 언니께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면서요?”

목운요는 자신의 말이 불온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 질투하는 것이냐?”

목운요는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기쁨으로 반짝이는 월왕의 눈을 보자 더욱 화가 치솟는 것 같았다.

“전하께선 자선 행사를 주관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찌 이곳에 오신 겁니까?”

“네가 눈사람을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만들어 주려고 서둘러 왔다.”

그녀는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우산을 꽉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월왕의 눈에서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마치 눈 덮인 땅에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난 것 같았다.

그에 목운요는 더욱 화가 났다. 월왕은 전혀 해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건 분명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려서 그녀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눈 쌓인 길이 미끄러운지라 그녀는 우산까지 버려 두고 치맛자락을 잡은 채 계속 걸어갔다.

그러자 월왕이 떨어진 우산을 줍더니 목운요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허 소저는 고모님의 수양아들인 허 대인의 딸이라 몇 번 본 적 있지만, 그것 말고 다른 인연은 없다.”

목운요는 월왕을 힐끔 보았다. 전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향낭을 받으셨다던데요.”

“향낭?”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월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기가 내게 향낭을 주려고는 했었지. 그런데 받지 않고 책상 위에 두고 갔다.”

“사 년 전 일을 그리 정확히 기억하시다니, 혹시 그때 향낭을 받지 않은 걸 후회하고 계신 건 아닙니까?”

월왕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날을 세운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마음씨가 점점 더 짓궂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났는데도 오히려 신이 나는 걸 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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