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월왕의 다정한 면모
장공주는 소청과 함께 목운요의 계례 때 어떤 예복을 입을지 논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곡 마마의 얘기를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비와 허기가 돌아왔다고?”
“네, 전하. 허기 소저께서 지금 밖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공주는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곧 미소 지었다.
“역시 빈틈이 없다니까. 가세. 나가서 만나야겠어.”
장공주가 나오는 것을 본 허기는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렸다.
“장공주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일어나라. 오늘 날씨가 유달리 추워서 오는 길도 힘들었을 텐데, 힘들게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이리 와 봐라. 예전보다 많이 야윈 것 같다.”
허기는 장공주의 치마에 구김이 간 것을 보고 재빨리 꿇어앉아 구김을 정리해 주었다. 거침없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속엔 언제나 장공주 전하의 걱정뿐입니다. 급히 오다가 마차도 뒤집어졌지 뭐예요?”
장공주는 제 치마의 구김을 정리하는 허기를 향해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어서 일어나거라. 아무튼 네 부친은 듬직한 구석이 없어. 아무리 말해도 듣질 않으니……. 맞다, 운요는 만났느냐?”
“아까 사찰 입구에서 만났습니다. 목 소저가 길을 안내해 주셨어요.”
허기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말투에서 목운요에 대한 친근함이 묻어났다.
장공주는 목운요에게 손짓했다.
“허기는 내 수양아들의 딸이다. 너보다 한 살이 많으니, 기 언니라고 부르면 된다.”
목운요는 미소 지으며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기 언니께 인사 올립니다.”
“운요 동생, 예는 차리지 않아도 돼요. 나도 운요 동생에게 도움을 받았는걸요.”
허기는 다정하게 목운요의 손을 이끌었다.
“예전부터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겐 오라버니만 두 분 있거든요. 그래서 평소에 속 얘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소원을 이뤘네요.”
문득 허기가 장공주 옆에 서 있는 소청을 발견하곤 호기심 어린 눈빛을 했다.
“저분은 누구신지…….”
목운요가 말했다.
“제 어머니세요.”
허기는 시원시원하게 인사를 올렸다.
“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허 소저, 그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않아도 돼요.”
장공주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됐다, 모두 일어나라. 오는 길이 상당히 추웠을 테니 곡 마마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마.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몸을 녹이자꾸나.”
식사는 빠르게 차려졌다. 식탁 가운데 신선로가 올라오자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채소가 다 익은 걸 확인한 목운요는 젓가락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허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장공주의 그릇에 채소를 올렸다.
목운요는 살짝 멈칫하다가 채소를 소청의 그릇에 올렸다.
“장공주 전하, 많이 드세요. 작년에 보화사의 채소가 생각난다고 하셨잖습니까?”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장공주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거라면 제가 모두 꿰차고 있죠.”
“됐다. 수선 떨지 말고 어서 앉아서 식사나 하자.”
하지만 허기는 장공주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장공주의 식사가 끝난 후에야 간단하게 음식 몇 점을 집어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목운요는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금란과 금교가 침상 정리를 돕다가 물었다.
“소저, 허 소저는 어떤 분 같습니까?”
목운요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어떤 사람인지 어찌 판단하겠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소저께 적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설마 장공주 전하께서 소저를 손녀로 삼으시어 기분이 나쁜 걸까요?”
“허 대인은 장공주 전하께서 직접 수양아들로 삼으신 분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허 소저는 수양 손녀고, 나는 공식적인 외손녀죠. 허 소저에게 내가 조금의 방해도 되지 않는데 내게 적의를 품어서 뭐 하겠어요?”
금교는 입을 삐쭉 내밀며 작게 말했다.
“소씨 가문도 그랬잖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가장 짐작하기 어려운걸요.”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내가 볼 때 장공주 전하께선 허 소저에게 정이 많으신 것 같아요. 사사로운 질투심 때문에 장공주 전하를 난처하게 해선 안 되죠.”
“……네, 소저.”
목운요가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 돌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란이 문을 여니, 종이우산을 들고 서 있는 허기가 보였다.
“운요 동생, 장공주 전하가 계신 곁채는 불편해서 운요 동생과 있으려고 하는데, 내가 방해하는 걸까요?”
“아니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안 그래도 저 혼자 묵기엔 좀 넓네요.”
“그럼 실례 좀 할게요. 밖에 눈이 많이 오네요. 서릉의 자선 행사는 어찌 되어 가는지 모르겠어요.”
“월왕 전하께서 직접 준비하시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 * *
서릉의 하늘에서도 눈발이 날렸지만 백성들의 웃음은 끊기지 않았다. 거리마다 죽을 나누어 주는 막사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고, 백성들은 손에 그릇을 쥐고 죽을 맛있게 먹었다.
“올해 죽은 유달리 더 맛있는 것 같군요.”
“많은 사람이 좋은 쌀을 기부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백가반(百家饭, 많은 집에서 쌀을 빌어 지은 밥, 재액을 막아 준다고 함.) 아니겠습니까?”
월왕은 막사에서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요가 잘 있는지 모르겠군. 나를 그리워할까?’
그때, 우항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왕야, 장공주 전하께선 보화사에 며칠간 머무르실 예정이랍니다. 또한 연주의 허 소저가 돌아와서 보화사에 함께 있답니다.”
“허비도 돌아온 건가?”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허 소저는 왕야께 향낭까지 만들어 주셨죠.”
사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허 소저는 월왕에게 아름답게 수놓은 향낭을 만들어 선물했다. 다만 월왕이 그걸 어디에 두었는진 모르는 일이었다.
“눈이 내리니 보화사에 계신 고모님이 걱정되는구나. 둘째 형님께 나 대신 이곳을 봐 달라고 전해 다오. 나는 산에 올라갔다 와야겠다.”
“사람을 보내 유왕 전하께 말을 전하라고 하고, 저도 보화사에 함께 가겠습니다.”
“너는 경릉성으로 가서 진 총관을 찾아가는 게 더 나을 것 같구나.”
우항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앞으로 쓸데없는 말은 삼가겠습니다.”
요즘 진 총관은 점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우의는 종일 그의 지시를 따르느라 그야말로 날듯이 돌아다녔다. 며칠 전에도 서신을 보내 원망의 소리를 해 댄 우의였다. 그렇게 되는 건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 * *
목운요는 다소 피곤했으나, 옆에서 허기가 신이 나서 말하고 있어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운요 동생이 가을 사냥에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곳은 어때요? 재밌었나요?”
“전 기마와 사냥에는 소질이 없어서, 그저 따라다니고 구경했을 뿐이에요.”
문득 허기의 얼굴에 그리움이 올라왔다.
“나도 사 년 전에 기마와 궁술을 배운 적이 있어요. 월왕 전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제대로 배우지 못했죠.”
그 말에 목운요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찻잔 안의 찻물에 작은 파도가 일었다.
허기는 말을 이어 갔다.
“그럼 동생은 이번 사냥에서 월왕 전하를 봤겠네요?”
“네, 보았지요.”
찻잔을 내려놓자, 찻잔 속의 작은 파도가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속의 파도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사이 허기가 천천히 웃음을 거뒀다.
“사실 이번에 서릉에 돌아온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장공주 전하가 그리워서죠. 장공주 전하의 곁에서 전하를 보살펴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둘째는, 서릉에 돌아왔다는 월왕 전하를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목운요는 눈을 부릅떴다. 피곤은 완전히 가신 지 오래였다.
허기는 추억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속마음을 고했다.
“처음 월왕 전하를 만난 건 육 년 전이었어요. 영웅다운 기개를 따라올 자가 없었죠. 다만 월왕 전하의 주변에는 늘 고독이 맴돌아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그리고 다시 만난 건 사 년 전이었어요. 서툴게 말에 오르는 저를 보시더니 언제나 차갑던 전하의 입꼬리가 비로소 올라갔어요. 운요 동생이 이런 감정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차가운 사람일수록 웃을 때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더라고요.”
심장이 요동쳤지만, 목운요는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장공주께서 동생을 외손녀로 명하셨으니, 동생은 월왕 전하를 외당숙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월왕 전하를 오래 알고 지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예요. 겉보기엔 차가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마음이 따뜻한 분이거든요. 어렸을 땐 철이 없어서 내 마음도 잘 간수할 줄 몰랐어요. 그래서 밤새워 향낭을 만들어 월왕 전하께 선물로 드렸죠. 그때 전하께서 나를 얼마나 웃기게 보셨을까요?”
허기의 말을 들으며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자신은 월왕에게 적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빙등, 진주 비녀, 옷감, 장식품, 그리고 눈여우도 선물받았고, 고양이 비녀도 받았다.
물론 자신도 월왕에게 선물을 했다. 하운방에서 얻은 이윤을 넘겨줬고, 불선루를 위해 이것저것 계획하고, 경릉성의 소금 사건에까지 개입해 월왕이 돈을 벌 수 있게 도왔다.
하지만 그 선물들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고, 월왕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더 컸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 불편한 건 아니죠?”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허기는 다정하게 목운요의 손을 당기며 기뻐했다.
“난 어려서부터 연주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서릉의 소저들을 잘 모르는데, 정말 운 좋게 동생을 만났네요. 동생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난 우리가 마음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앞으로도 잘 지내봐요.”
“네.”
“내 얘기만 한다고 시간도 잊었네요.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할까요?”
“좋아요.”
침상은 넓어서 목운요와 허기가 함께 자도 비좁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기의 호흡은 평온해졌지만, 그 옆에 누운 목운요는 어떻게 해도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월왕이 자신에게만 다정한 줄 알았다. 한데 다른 여자의 입에서 월왕의 다정한 면모를 듣게 되자 마음이 따끔거렸다.
방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목운요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자, 몸을 일으켜 종이우산을 들고 방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