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수양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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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왕은 속히 입궐하여 황제에게 자선 행사를 열겠다고 설명했다. 장공주도 손을 보탠다는 말에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월왕의 자선 행사에 황제와 장공주까지 후원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관리들은 얼마를 기부해야 좋을지 서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기부에도 요령이 있어야 했다. 너무 많이 내면 뇌물을 받았거나 공금을 횡령했다고 의심받을 테고, 너무 적게 내면 선행을 꺼리는 인색한 자가 될 터였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릉왕과 진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일하게 유왕만이 무척 기뻐하며 월왕을 따로 불러내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나도 책임을 다할 테니.”
“감사합니다, 형님. 필요한 게 있으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월왕부를 고치고 있다며?”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네 집 주변에 관리들이 많이 살지 않느냐. 네가 건물을 허무는 소리를 듣고 다들 놀랐다고 하더라. 그리고…… 목 소저가 방문했다고 하던데?”
유왕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넷째 너도 나이가 충분히 찼지. 봐라, 회양도 내년이면 시집을 가지 않느냐?”
“급할 것 없습니다.”
유왕이 월왕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안 급하긴? 목 소저의 신분이 달라지지 않았느냐? 듣자 하니 사내놈들이 몰래 목 소저에 관해 수소문한다고 하더라.”
목운요는 조만간 장공주의 외손녀가 되는 데다 하운방과 불선루라는 굵직한 돈줄까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추었으니 은근히 많은 사내가 목운요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월왕은 자신도 모르게 쌀쌀맞은 말투로 물었다.
“누가 있죠?”
“누가 있냐니?”
유왕은 월왕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가, 그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보고는 목운요를 마음에 들어 하는 자가 누구냐는 뜻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크흠……. 조바심 내지 마라. 아직 구체적인 행동은 없으니 초조해할 필요 없다.”
월왕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뒤 유왕에게 인사를 건넸다.
“형님, 천천히 가십시오.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유왕이 말하기를 꺼린다면 자신이 직접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면 되었다.
잽싸게 떠나는 월왕을 보며 유왕은 자신도 모르게 코를 만지작거렸다. 넷째가 저렇게 진지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남몰래 정을 품은 사내들이 이제 행동을 자제하길 바라는 수밖에.
‘어쩐지 내가 너무 무책임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냐, 착각이야. 난 선의로 말해 준 거다. 잘못한 거 없다고! 그래, 그런 거야!’
월왕부.
월왕은 곧장 우항에게 목운요를 마음에 둔 사내들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마침 옆에 있던 성 공공이 이를 듣고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
“전하, 잘 키운 딸 하나에겐 사내 백 명이 청혼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목 소저는 아름답고, 성격도 온화하고, 견식도 풍부하고, 돈도 잘 버시니 어디에 내놔도 남자들이 눈독을 들일 겁니다.”
안색이 어두워진 월왕은 우항과 성 공공을 물린 후 구석의 서랍에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비녀 열두 개가 놓여 있었다. 비녀마다 제각기 십이간지 동물 모양으로 장식된 점이 독특했다.
사실 그는 전에 목운요의 집에서 설을 쇨 때 십이간지 떡을 처음 먹어 보았다. 그 후 월서에 가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 때마다 십이간지 동물 비녀를 만들었다.
올해는 그녀가 계례를 치르는 해이기도 해서 고양이 모양 비녀도 제작했다. 소씨 가문의 이부인 척 씨가 장신구를 선물할 때 몰래 안에 집어넣으면 목운요가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월왕의 손가락이 비녀 위를 스쳤다. 비녀에는 목운요의 띠에 해당하는 토끼가 새겨져 있었다. 이내 복잡한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더니 눈동자가 밤처럼 짙은 먹빛이 되었다.
‘운요는 내 것이다. 그 무엇도 우리를 가를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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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행사는 아주 떠들썩했다. 올해는 곡식이 많이 남아서 연말 풍경이 더욱 보기 좋았다. 게다가 여인들이 자수를 배워 적지 않은 돈을 벌어들였기에, 백성들의 열정이 유독 높았다.
월왕은 행사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렵사리 목운요를 보러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그녀가 이미 장공주와 함께 보화사에 참배하러 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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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잘 타는 목운요는 서리가 내리자 옷을 두껍게 챙겨 입었다.
장공주는 곡 마마에게서 손난로를 받아 들어 목운요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어서 받아라. 우리 운요 꽁꽁 얼라.”
목운요는 장공주와 소청을 번갈아 보더니 뺨이 살짝 붉어졌다.
“외할머니, 저는 두껍게 입어서 별로 안 춥습니다.”
“바람을 견디기 힘들 테니 들고 있으렴. 이따가 태의가 와서 몸 보양을 도와줄 거야. 이렇게 추위에 약하면 나중에 크게 고생할 수 있단다.”
보통 여자가 추위에 약하면 몸이 차서 그런 것이었다. 큰 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미리미리 보양해야 했다.
장공주가 아끼는 마음으로 한 말이라는 걸 알았기에 목운요는 얌전히 장공주를 따라 산 위로 향했다.
반 시진 정도 걷자 보화사 문 앞에 도착했다.
보화사의 주지 원광대사가 마침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장공주를 보자 허리를 숙이며 염불했다.
“아미타불. 장공주 전하, 참배하러 오신 겁니까?”
장공주가 미소를 지었다.
“네. 오랜 염원이 이루어졌으니 특별히 참배를 드리러 왔지요. 기다리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축하드리옵니다.”
“감사합니다, 대사.”
기복전으로 향한 목운요는 장공주를 따라 절을 올리다 자신을 바라보는 대사의 시선을 느꼈다.
“대사께선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미타불. 소저께선 통찰력이 깊고 총명하셔서 소승의 말은 필요 없을 듯합니다. 그저 소저의 슬픈 눈빛을 보니, 만사에 있어 마음 가는 대로 하시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목운요는 눈빛이 흔들리다가 이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럼 오랫동안 수행하신 대사께서는 이제 마음 가는 대로 행하실 수 있습니까?”
자고로 인생에는 온갖 번민이 있는 법. 만약 매사를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다면 이 세상은 난장판이 됐을 것이었다.
원광대사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목운요를 향해 두 손을 합장했다.
“소승이 오만했습니다. 오늘 하늘이 어두운 것을 보니 곧 큰 눈이 올 것 같군요. 곁채가 준비되었으니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감사합니다.”
장공주는 저번에 머물렀던 방과 같은 곳에 배정되었다. 목운요의 방은 그 옆으로, 이전에 월왕이 머문 방이었다.
방에 들어온 금란과 금교가 간단히 짐을 풀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목운요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소저,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저 정리하고 있어요. 나는 바깥을 한 바퀴 돌고 올 테니까.”
방 배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월왕도 이 침상 위에서 잤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방 안에 월왕의 서늘한 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보화사를 무작정 걸어가던 목운요는 어느새 절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다 긴 계단 아래에서 어떤 여자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여자는 절을 마치고 일어나서 치마를 정리하다가 목운요를 발견했다.
“혹시…… 목 소저십니까?”
목운요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네, 전 목운요라 합니다. 소저께서는 누구신지…….”
“역시 목 소저셨군요! 초면에 성급하게 물은 점은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허기(許琦)라고 합니다. 계속 연주(燕州)에서 살다가 오늘 아버지를 따라 서릉에 왔습니다.”
“허 소저시군요…….”
곰곰이 생각하던 목운요에게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장공주의 부마 허연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허패(許霈)였다. 장공주는 딸을 잃어버린 뒤 허패의 차남 허비(許斐)를 수양아들로 삼았다.
허기는 허비의 딸이었다.
허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 막 서릉에 와서 장공주 전하를 뵈러 갔다가 전하께서 보화사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원래는 산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리려다가, 아무래도 공주 전하가 그리워 올라왔지요. 공주 전하께선 지금 곁채에서 쉬고 계시나요?”
목운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공주 전하께선 동쪽에 있는 곁채에 계세요.”
“그렇군요. 그보다 바람이 세네요. 어쩌면 곧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어요. 목 소저도 이곳에서 찬 바람을 쐬지 말고 어서 방으로 돌아가 따뜻하게 몸을 녹이시죠.”
“고마워요, 허 소저.”
허기는 시원한 웃음을 띠고 눈을 맑게 빛냈다. 풍기는 분위기가 유달리 청량했다.
“어머, 마침 눈이 내리네요. 어서 곁채로 돌아가시죠.”
목운요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에서 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날리는 눈을 잡아 보았으나, 눈꽃은 따뜻한 손에 닿자 바로 물방울로 변해 버렸다.
“가시죠.”
곁채로 돌아가자마자 곡 마마가 외투를 벗겨 줬다.
“소저, 오셨군요. 장공주 전하께서 눈이 내리는 걸 보시고는 신선로를 준비하라 명하셨습니다. 한겨울 눈 오는 날이면 신선로를 먹는 게 가장 좋잖습니까?”
“곡 마마, 허 소저가 왔습니다.”
곡 마마가 허기를 발견하지 못하자, 목운요는 재빨리 그 사실을 알렸다.
곡 마마는 놀라서 냉큼 손을 들어 제 뺨을 살짝 내리쳤다.
“허 소저를 발견하지 못하다니, 제가 눈이 삐었나 봅니다. 언제 연주에서 돌아오신 겁니까? 어찌 서신 한 통 없이 오셨어요? 소식이 없으시니 장공주 전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모릅니다.”
“부친 말로는 장공주 전하께서 서릉에 오랫동안 머무실 거라고 하더군요. 장공주 전하가 걱정되어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바삐 왔습니다.”
“온몸이 찹니다. 어서 들어와 몸을 녹이십시오. 소인은 바로 장공주 전하께 아뢰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