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큰 나무 아래의 좋은 그늘
장공주의 눈물을 본 소청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장공주 전하…….”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목운요는 월왕과 시선을 맞춘 후 조용히 물러났다.
후원에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단단한 나뭇가지만 남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가로로 늘어진 나뭇가지에는 그네가 달려 있었다.
목운요는 그네에 앉아 밧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늘고 긴 속눈썹이 내려앉으며 검은 눈동자와 그 속의 감정을 가렸다.
“운요…….”
월왕의 부름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발끝으로 땅을 차자 그네가 조금씩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장공주 전하의 안색을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전하를 외당숙이라고 불러야 하는군요. 기쁘지 않으십니까?”
목운요의 미소가 칼이 되어 꽂혔다. 월왕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목운요는 개의치 않았다. 다시 한번 두 다리에 힘을 주자 그네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옅은 남색 비단 치마가 흔들리니 수놓인 나비들이 날개를 펼치고 나풀나풀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문득 독 낭자가 읊었던 시가 떠올랐다.
“사람과 신의 길이 다르니 아름다운 날에 함께하지 못함을 원망하네. 비단 소매를 들어 눈물을 가리지만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는구나. 좋은 만남이 영영 끊어질 것을 슬퍼하며 한번 떠나니 다른 곳에 있음을 서글퍼하네.”
자신과 월왕의 상황이 시의 내용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가는 길이 서로 다르니,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해도 짝이 될 수 없었다…….
그때, 월왕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네의 밧줄을 세게 잡았다.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한 목운요가 그네에서 떨어지려 하자, 월왕이 손을 뻗어 그 몸을 품에 안았다.
“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있을 거다. 날 믿어라.”
목운요는 추운 겨울밤 같은 월왕의 눈을 마주하자 호흡이 멈춰 버렸다.
어떤 사람은 진하고 향긋한 술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한다. 하지만 짧은 시간 맛볼 순 있어도 오랫동안 음미할 순 없다. 오랫동안 취해 버리면 술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맑고 깨끗한 물 같다. 색깔이 없고 향기가 없어서 평소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만, 사실 없어선 안 되는 꼭 필요한 존재다. 물은 시든 초목과 황량한 광야에 푸른빛을 돌게 했다.
목운요에게 월왕은 후자였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눈앞의 사람을 떠나보낸다고 생각하니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운요…….”
월왕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목운요의 눈을 들여다봤다.
“울지 마라. 다 괜찮을 거다.”
목운요는 뒤로 물러나 월왕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울지 않아요. 울 일이 아니잖습니까? 앞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났는걸요. 큰 나무 아래에는 좋은 그늘이 있는 법이니, 이제 사람들이 저와 어머니를 함부로 괴롭히지 못할 겁니다.”
월왕은 빨개진 목운요의 눈을 안쓰럽게 바라보다, 날이 춥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곧장 외투 한 벌을 가져와 목운요에게 걸쳐 주었다.
외투를 걸친 목운요는 다시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월왕이 자신을 위해 줄수록 슬픔은 점점 더 짙어졌다. 마음속에 가득한 슬픔에 심장이 파묻혀 버리는 느낌이었다.
한참 후, 곡 마마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월왕과 목운요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월왕 전하, 목 소저. 장공주 전하께서 두 분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알겠다.”
* * *
대청 안.
장공주는 소청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눈이 붉었다. 그러나 그들을 에워쌌던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자리에 기쁨과 행복만이 가득했다.
목운요는 월왕을 따라 예를 갖췄다.
“의덕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장공주는 곧장 목운요를 일으켜 세웠다.
“운요야,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목운요는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천천히 웃었다.
“염려 놓으십시오. 그동안 저와 어머니는 잘 지냈습니다.”
장공주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론 애석한 마음이 더 컸다.
가정 형편도 어려웠던 데다, 조모는 악랄한 사람이었고,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다니……. 어린아이에겐 모든 것이 엄청난 시련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목운요는 그것을 모두 견뎌 내고 하운방과 불선루까지 세웠다. 그 과정에서 겪었을 고생과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운요 네 모친은 내가 예전에 잃어버렸던 딸이다. 그러니 너는 내 외손녀야.”
장공주는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불안했다.
잔악무도한 소씨 가문에서 소청이 안전할 수 있었던 건 총명한 목운요 덕분이었다. 혹 책임을 다하지 못한 외조모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진 않을까?
장공주의 흔들리는 두 눈을 본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곡선을 그린 두 눈에선 빛이 반짝였다.
“장공주 전하께선 저와 어머니께 잘 대해 주실 거지요? 소씨 가문 사람들처럼 저희를 이용하고 없애 버리실 건 아니죠?”
“온 힘을 다하여 너와 네 어미를 챙기마. 더욱이 남들이 너희 두 사람을 해하게 두지 않으마.”
장공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그녀에게 부귀영화와 권력, 위엄 따위는 다 소용없었다. 소청과 목운요야말로 삼십 년 동안 기다려 온 희망이고, 목숨이었다.
목운요는 밝게 웃으며 보란 듯이 장공주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장공주에게 외쳤다.
“외할머니!”
“아아…….”
장공주가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양손에 각각 소청과 목운요를 붙잡으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인생이 완벽해졌다고 느꼈다.
“그래, 아가……. 너희 둘 다 고생 많았다.”
곡 마마는 옆에서 눈물을 닦았다.
‘장공주 전하의 바람이 드디어 이뤄졌구나! 하늘이 도우신 게야!’
세 사람이 한참 동안 눈물을 그치지 않자, 월왕이 그들을 타일렀다.
“고모님, 오늘은 기뻐해야 할 날이니 그만 눈물을 거두십시오.”
장공주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오늘은 기뻐해야 맞아. 청아, 운요야. 나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자꾸나. 다시는 너희를 고생하게 두지 않으마.”
소청의 원래 이름은 허연한이었다. 하지만 장공주는 소청이 원래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딸이 돌아와 곁에 있는 것이 중요하지,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면 될 일이었다.
장공주의 말에 소청은 멈칫했다. 그러자 장공주는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청아, 혹 이 어미가 미운 것이냐? 수십 년간 이 어미는 계속 너를 찾으려 했어. 하지만 그 어떤 소식도 찾아내지 못했지…….”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은 제 신분을 증명할 그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경솔하게 어머니를 따라갔다간 끝없는 유언비어만 쏟아져 나올 겁니다.”
장공주가 미간을 찌푸리자 주위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감히 누가 내 딸을 건드려!”
그에 소청은 목운요에게 장공주를 설득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목운요는 앞으로 나아가 장공주의 손을 붙잡았다.
“외할머니께선 어머니를 한눈에 알아보셨지만, 사람들은 혈육지간의 통하는 느낌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지금 저희가 외할머니와 함께 황궁으로 간다면 틀림없이 귀찮은 일들이 발생할 거예요. 저희는 떳떳하게 외할머니 곁에 서고 싶고, 정당한 명분 아래 효를 다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증거를 찾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장공주가 손을 뻗어 목운요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네 마음은 잘 안다. 하나…….”
오랜 세월 끝에 딸을 찾은 데다가 귀여운 외손녀까지 생겼으니 장공주는 한시도 둘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날이 긴걸요. 신분을 증명할 증거만 찾으면 모든 문제가 술술 풀릴 겁니다. 게다가 제가 지금 하운방과 불선루의 일로 바쁜지라 황궁에 거하면 왕래가 편하지 않아요. 그러니 외할머니께서 조금만 너그러이 봐주세요.”
혈연관계가 맞다는 확언을 듣자 절로 애교 섞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애교는 제대로 통했다. 장공주는 목운요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래, 네 뜻대로 하마. 공주부의 수리를 핑계로 나도 황궁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너희와 왕래하기도 편할 거야.”
목운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장공주와 소청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도록 일부러 요리를 준비하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이에 곡 마마가 와서 거들었고 월왕도 끼어드니 순식간에 주방이 아주 떠들썩해졌다.
목운요는 솜씨가 좋아서 갖가지 음식을 잽싸게 만들어 냈다.
장공주는 그녀가 만든 음식을 행복한 기분으로 먹었다. 실제로도 궁에서 먹던 음식보다 훨씬 맛있었다. 곡 마마는 이러다 공주 전하가 체하시는 것은 아닌지 옆에서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금 대화를 나누던 중 소씨 가문의 이야기가 나왔다.
장공주는 무척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
“청아, 운요야, 걱정 말거라. 소씨 가문이 감히 그런 계략을 쓰다니, 내가 반드시 갚아 주마!”
장공주의 진심 어린 분노에 목운요는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자들 때문에 괜히 손을 더럽히실 필요 없습니다. 직접 손쓰지 않아도 그들이 저지른 악행이 워낙 많아 충분히 골치 아파할 겁니다.”
목운요가 자신을 걱정하자 장공주는 전에 없던 편안함을 느꼈다.
“운요야, 걱정하지 마라. 이 외할머니가 알아서 잘 처리하마.”
‘내 딸과 외손녀가 그동안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소씨 가문이 어떤 짓을 했는지 하나하나 소상히 조사하여 그 대가를 모두 치르게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