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단서
온 마마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설득했다.
“노부인, 초조하신 건 압니다. 하지만 약을 드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부인께선 소씨 가문의 기둥이시니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더 가라앉히셔야 합니다.”
노부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소문원이 바로 앞에 있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편 어머니의 아픈 모습을 눈 뜨고 볼 수 없던 소문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다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으니 얼른 일어나실 수 있도록 잘 보살펴 주시오.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소.”
온 마마가 무릎 꿇고 인사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들이 정성껏 노부인을 돌보겠습니다.”
“어…… 억…….”
노부인 손 씨는 노발대발하며 소문원을 붙잡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소문원은 그 뜻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사이 임 의녀는 노부인을 일으켜 세우고, 온 마마는 노부인의 입가에 약그릇을 가져갔다.
“노부인, 어서 약을 드세요. 약에 독을 타진 않았으니 안심하시고요. 목 소저께서 노부인을 잘 보살피라고 분부했습니다. 나중에 문안도 오시겠대요.”
노부인은 손을 휘저어 약그릇을 내동댕이치려고 했으나 온 마마가 가볍게 제압했다.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드세요.”
온 마마는 임 의녀와 함께 노부인의 입에 약을 부었다.
노부인은 온 마마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눈빛으로 두 사람의 살점을 도려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인도 압니다. 노부인께선 제가 왜 배신했는지 이해할 수 없으시겠지요. 사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소인도 이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나이가 지긋한지라 더는 업보를 쌓기가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노부인께서 계속 잘못을 저지르시는 걸 보고 싶지 않았지요. 우는 노부인의 친손녀입니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아이에게 어찌 그리 무자비하게 손을 쓰신 겁니까? 게다가 소인도 나이가 드니 점점 목숨을 아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는 노부인의 야심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싶지 않습니다.”
노부인은 온 마마와 임 의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속으로 미친 듯이 저주를 퍼부었다.
그녀는 평생 심혈을 기울여 소씨 가문을 한 단계씩 출세시켰다. 이제 한 층 더 올라갈 기회를 목전에 두었는데, 목운요가 소씨 가문의 뿌리를 흔들고 근간을 부술 줄이야.
노부인은 자신의 패배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목운요가 진실을 알게 된들 어떠한가? 증거를 하나도 찾지 못할 텐데! 증거가 없으면 소씨 가문을 단죄할 수 없을 테고, 그럼 가문이 재기할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 * *
황궁 안, 장공주가 월왕과 황제를 불러 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황제는 떨떠름한 얼굴로 월왕을 힐긋 보더니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월왕은 궁녀가 들고 온 술주전자를 받아서 황제의 잔에 술을 따랐다.
“부황, 춘추가 많으시니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시고 두 잔만 드십시오.”
황제가 크게 코웃음 쳤다.
“담도 크구나. 감히 짐의 행동에 참견하는 것이냐?”
월왕은 대답하지 않고 장공주의 잔에도 술을 따른 후 자신의 술잔을 들어 두 사람에게 예를 표했다.
“소자가 경솔하여 부황과 고모님께 근심을 끼쳐 드렸으니 이 술을 통해 두 분께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월왕이 고개를 젖히고 술잔을 비우자 황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네 그 성질을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손해를 입을 것이다. 짐과 네 고모가 평생 보호해 줄 수는 없어.”
장공주가 빙긋 웃었다.
“군월의 성격은 황상을 닮았습니다. 여태껏 황상의 성격이 바뀌신 적이 있습니까?”
“누님은 항상 저 아이 편을 드시는군요.”
“작은 일로 부자지간의 정이 상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은 식사에 집중하고 다른 얘긴 꺼내지 맙시다. 군월이 소씨 가문에 쳐들어간 일에 대해선 내일 천천히 따져 보고요.”
황제는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월왕과 이렇게 같이 앉아서 밥을 먹는 건 손에 꼽을 만큼 무척이나 드물었다. 매년 황제의 탄생일에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데다, 월왕은 기분을 맞추는 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선물도 절대 과한 것을 바치지 않았다.
한 해, 한 해 지나며 월왕의 성격은 더욱 냉랭해졌고 눈빛은 더욱 강인해졌다. 월서에서 고생하면서도 원망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 아버지로서 미안함이 무척 컸다.
한편 식사가 끝나고도 월왕이 계속 자리에 앉아 있자, 장공주는 월왕이 자신에게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곤,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에 회양 육공주가 소란을 일으켰다던데, 황상께서 가 보시지요. 마음에 둔 소청오가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으니 상처를 받은 듯합니다. 공주의 모비(母妃)조차 말리지 못하고 있으니 더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황제의 눈썹을 움찔거렸다. 월왕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는데 장공주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짐은 이만 가 볼 테니, 군월과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장공주는 황제가 떠나자마자 영군월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일이 벌어지니 갑자기 겁이 난 것이냐?”
월왕은 장공주의 따스한 미소를 보자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고모님,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여쭤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장공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말하는 데에 거침없는 녀석이 오늘은 웬일이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 거냐?”
계속 주저하던 월왕이 이내 결심을 세웠다.
“고모님께서 잃어버리신 여식, 그러니까 제 사촌 누이의 몸에…… 혹시 모반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순간 장공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 어찌 그런 걸 묻는 것이냐?”
“그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장공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월왕을 향한 눈빛이 마치 마음을 꿰뚫을 것 같았다.
“네가 괜히 그런 질문을 할 아이가 아니란 걸 안다. 무슨 소식이라도 들은 게냐?”
월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청과 목운요에 대한 소식을 알려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혹시라도 사실이 아니면 괜한 희망만 드리는 게 아닐까?’
장공주는 몸을 일으키더니 월왕의 앞으로 다가가 희망에 부푼 눈으로 물었다.
“무슨 단서라도 찾은 것이냐?”
모반에 관한 질문을 한다는 건 분명 누군가를 확인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군월이 그런 말을 할 리 없었다.
월왕이 고개를 들었다. 물기 어린 장공주의 눈을 보자 가슴이 저렸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고모님, 전…….”
거짓을 말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장공주와 눈이 마주치자 그럴 수가 없었다.
월왕이 머뭇거리니 장공주의 눈은 더욱 희망에 부풀었다. 마치 겨울 하늘에 피어오르는 불꽃놀이처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피어나는 듯했다.
“군월아……. 단서를 찾은 거지, 그렇지?”
한참 동안 굳어 있던 월왕은 끝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장공주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 딸은, 딸아이는…… 어떻게 지내더냐?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어? 아니면 시집가서 아이를 낳았더냐? 딸아이의 부군은 어떻더냐? 아이는 효심이 깊고 올바른 아이냐……?”
장공주는 손으로 가슴을 꽉 쥐다가,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반쯤 꿇어앉았다.
“내 아이…….”
무려 삼십 년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 바였다.
“드디어 단서를 찾았구나. 잘됐어, 참으로 다행이다…….”
월왕은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장공주를 부축했다.
“고모님, 흥분하지 마십시오. 아주 사소한 단서를 찾은 것뿐입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요…….”
장공주는 몇 차례 심호흡을 하며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군월, 내 딸아이는…….”
“제가 알고 있는 정보가 맞다면, 아직 살아 계십니다. 아무 근심 없이 잘 살고 계십니다. 시집을 가셨고, 슬하에 딸이 하나 있더군요. 그 아이는 아주 영리하고, 효심도 깊습니다.”
“그래그래…….”
장공주가 굵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지난 삼십 년간 밤낮으로 염불하며 잃어버린 딸을 위해 복을 빌었다. 하지만 거의 매일 밤 꿈속에서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이곳저곳 떠도는 딸아이를 보았다. 꿈속의 딸은 그러다 결국 죽고 말았다.
과거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때 왜 조심하지 않았는지, 왜 더 많은 호위를 대동하지 않았는지 수없이 자신을 책망했다.
장공주가 월왕의 손을 꼭 붙잡았다. 흥분으로 일렁이는 눈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어디에 있더냐?”
“아직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얻은 정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요.”
“괜찮다. 확실한 증거를 찾지 않아도 돼. 아이를 본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내 자식인지 아닌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군월, 넌 모르겠지만 어미는 제 아이를 몰라볼 수 없단다. 보면 바로 알 수 있어.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누이의 이름은 소청입니다. 누이가 낳은 딸의 이름은 목운요이고요…….”
장공주는 넋이 나가 꽉 잡고 있던 월왕의 손을 서서히 놓았다.
“소청……? 목운요……?”
“제가 얻은 정보는 목운요가 직접 말해 준 겁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원래는 확실한 증거를 찾은 후에 알려 드릴 생각이었으나, 고모님께서 이렇게나 기대하시니 저도 차마 참지 못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월왕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장공주를 바라봤다. 그가 기억하는 자신의 고모는 언제나 전략에 능하며 이성적이고 고요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정신이 나가 버린 모습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