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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245화 (245/442)

245화 너무도 빠른 실연

채의가 안에 있던 사람들을 물리자 실내가 조용해졌다.

이내 소청이 월왕을 향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영 공자님…… 아니, 이제는 응당 월왕 전하라고 불러야겠지요. 오늘 저희 모녀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개무량합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반면 목운요는 눈은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고민이 있는 거지?’

소청은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는지라 좀 피곤하네요. 위층에서 좀 쉬고 싶은데…… 요아야, 네가 월왕 전하를 모시거라.”

“네, 먼저 쉬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소청이 떠나자 월왕은 천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 부인은 온화한 인물이지만 어찌 됐든 운요의 어머니였다. 그 생각만 하면 혹 결례라도 범할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운요야, 부황께서 오늘 일을 전해 들으셨을 테니 나는 황궁으로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다. 일이 모두 일단락될 때까지 하운방에서 자수법을 전하려던 계획은 잠시 미뤄 두자.”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에 월왕은 목운요의 얼굴로 손을 뻗어 미간을 펴 주려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목운요가 고개를 옆으로 피해 버렸다. 그녀에게선 설명하기 힘든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운요야, 왜 그러느냐?”

목운요는 눈을 들고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월왕 전하, 아무래도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순간 월왕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일 년의 약속을 떠올리며 목운요의 어깨를 잡았다.

“농을 하는 게지? 그렇지?”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이런 일에 농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운요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괴로웠다.

월왕은 목운요가 아플까 봐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분명 사냥터에서 일 년이 지나도 서로의 마음이 변치 않으면 혼인하자고 굳게 약속을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거지?’

“제가 숨겨진 비밀을 발견했으니까요.”

목운요는 사실을 숨기려는 생각도 해 봤지만, 월왕의 눈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뜨거운 눈빛의 그는 마치 목운요에게 모든 것을 건 사람 같았다. 이렇게 순수한 사람의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할 수 있을 때 끊어 내야 했다.

“무슨 일이길래 그런 결심을 한 거냐.”

“저희 어머니는 소씨 가문 노부인의 딸이 아닙니다.”

월왕은 거친 숨을 쉬며 목운요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게 어때서? 소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더 좋은 것 아니냐? 그게 우리 둘하고 무슨 상관이지?”

“어머니께선 의덕 장공주 전하의 잃어버린 자식이시니까요.”

그 순간, 월왕의 눈빛이 무너졌다.

대청에 침묵이 찾아왔다. 너무 조용해서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잠시 후, 월왕이 천천히 손을 뗐다.

어깨를 누르던 힘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을 느끼자, 목운요는 마음속의 떨림을 억누르며 미소 지으려 애썼다.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밖에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제가 월왕 전하를 외당숙이라고 부르게 될 줄이야…….”

한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월왕이 목운요를 와락 끌어안았다. 맑고 찬 숨결이 한순간에 몸을 감싸자, 그녀는 더 이상 웃어 보이지 못했다.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월왕은 필사적으로 품 안의 목운요를 껴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운요, 괜찮다, 괜찮아……. 진짜가 아닐 수도 있어. 넌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은 것이냐? 누가 너를 일부러 속인 것일 수도…….”

“노부인이 직접 인정했습니다. 이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이 맞을 거예요.”

그는 목운요를 놓아준 뒤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이 일은 내가 해결하마. 우리 사이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혹 증거가 있느냐?”

“증거가 없어도 상황을 바꿀 순 없습니다.”

“난 상관없다!”

월왕의 검고 깊은 눈은 꼭 먹물 같았다. 격한 감정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월왕이 억누르자 이내 꼼짝 못 하고 수그러들었다.

“운요, 나는 상관없어!”

목운요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월왕 전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아십니까?”

친척끼리의 혼인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과 월왕은 단지 한 항렬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이는 의지와 결심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그럼에도 월왕은 확실한 눈빛을 보였다. 세찬 천둥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모습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나는 상관없다. 난 이만 입궁할 테니, 너는 가서 소 부인을 잘 달래 드려라.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월왕 전하!”

문밖으로 나서는 월왕에 목운요가 소리쳐 그를 멈춰 세웠다.

월왕은 잠시 발을 주춤했으나, 몸을 돌리지 않고 이전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놓아라. 괜찮을 거다. 그리고 난 네가 나를 ‘월왕 전하’가 아닌 ‘사야’라고 부르는 것이 좋아.”

말을 마친 후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목운요는 제자리에 선 채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서서히 평정을 되찾는 두 눈이 파도가 그친 고요한 바다 같았다.

이내 그녀는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려다 계단 끝에 서서 멍하게 서 있는 소청을 발견했다.

“어머니……?”

소청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넋을 잃고 있었다. 계단을 꽉 잡은 손은 하얬고, 온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방금 네가 한 말이 사실이니?”

목운요는 소청을 얼른 방까지 부축해서 앉혔다.

“저도 오늘 우 언니의 얘기를 듣고 알았어요.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노부인을 찾아간 것이고요.”

소청의 눈엔 믿을 수 없다는 빛이 그득했다.

“소씨 가문이 어쩜 그렇게 대담하게 군 것이지?”

“노부인은 자신의 친손녀인 소우에게도 손을 댔어요. 부귀를 누리려고 애초부터 위험을 감수한 거죠.”

소청은 잠시 침묵하다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소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래도 마음이 한결 편하구나. 이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어.”

“원래는 증거를 좀 더 찾아보고 나중에 알려 드리려고 했어요. 한데 벌써 듣게 되실 줄은…….”

소청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찾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

“그동안 작은 단서 하나도 찾은 사람이 없지 않니? 아마 증거는 이미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을 거다. 증거를 찾으려다 오히려 좋은 날들을 허비해 버릴 수 있어. 운명이라면 원하지 않아도 내 것이 되고, 운명이 아닌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단다. 어쩌면 이 어미와 장공주 전하 사이에는 모녀의 인연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난 지금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너와 월왕 전하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월왕 전하께 좋은 감정이 있는 건 맞지만, 꼭 맺어지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러니 과감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죠.”

“귀한 보물을 구하기는 쉬워도 사랑하는 낭군을 만나기는 어려운 법이야. 아까 전하와 나눈 대화는 이 어미도 들었다. 전하는 황자의 신분이시니 너보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차고 넘치시겠지. 네게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한 것 자체가 힘든 결정이셨을 거다. 너에 대한 마음이 깊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목운요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면 그 끝이 좋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상관없다고 하셔도 우리가 친척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요아야…….”

소청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봤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조금 힘들겠지만, 언젠간 괜찮아지겠죠.”

목운요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고인 눈물을 감추려 했다.

원래 사랑은 씨앗 같은 것이다. 인내심을 갖고 세심하게 아끼다 보면, 어느새 싹이 터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하지만 자란 사랑을 끊으려면 꽃을 꺾고 뿌리를 통째로 뽑아내야 한다. 그 고통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법이었다.

* * *

한편 월왕은 황제에게 알현을 청하자마자 곧바로 불려 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장공주도 자리에 있었다.

“부황과 고모님을 뵙습니다.”

황제의 눈엔 노기가 가득했다. 황제는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월왕의 앞으로 던져 버렸다.

“네가 한 짓을 봐라!”

월왕은 상소문은 보지도 않고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소자는 멋대로 이부 상서 소 대인의 저택에 들어갔으며, 소 대인의 수하들이 군용 장궁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직접 죽였습니다. 지은 죄가 무거운 것을 아니, 부디 벌을 내려 주십시오.”

서릉의 황자들은 항시 서로를 감시했다. 월왕이 사람을 대동하여 소씨 가문에 쳐들어갔으니, 누군가가 고자질할 것은 당연했다. 월왕은 부황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네 죄질이 무겁다는 것은 아느냐?”

월왕은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제가 그때 쳐들어가지 않았다면 소문원이 소 부인과 목운요를 죽였을 겁니다. 사람을 살려야 했기에 많은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순천부에 알리면 되지 않았느냐!”

“상황이 워낙 긴박하여 무모하게라도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소씨 가문에 사병이 있었습니다. 군용 장궁을 든 궁수들이었죠. 황자인 제가 이를 어찌 못 본 체하고 지나가겠습니까?”

황제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이를 악물었다. 이내 그가 고개를 돌려 장공주에게 말했다.

“누님, 저것 좀 보십시오. 아직도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당당하게 나오는군요. 도리를 모르는 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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