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장공주의 지병이 도지다
서 씨 어르신 또한 몹시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예전의 나는 매일매일을 버티며 살아왔어. 한데 지금은 내 삶이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아무리 피곤해도 그저 기쁜 마음뿐이니 정말 잘된 일이지.”
“맞습니다! 전 하루빨리 하운방이 자수법을 전수하고, 불선루도 여러 곳 열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목 소저가 경릉성에서 나눠 주던 죽이 그렇게나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어간다던데…… 목 소저가 올해 서릉에서도 죽을 나눠 줄까요?”
“올해는 안 되지 않을까요? 하운방과 불선루가 서릉에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돈 쓸 곳이 많을 테니까요. 게다가 며칠 전 하운방을 지나가다 누군가가 목 소저를 봤는데, 손가락이 다 부었다고 하더군요…….”
“아이고, 어린 나이에 참 고생이 많지.”
“그러게요. 목 소저는 내 딸아이보다도 어린 나이인데 평탄한 삶도 못 살고 있잖습니까? 얼마 전에는 독사 부인이 목 소저를 죽이려 하는 걸 때마침 심 대인께서 목격하여 살았다더군요. 얼마나 다행인지…….”
“그나저나 올해 작황이 좋으니 우리도 경릉성 사람들처럼 집마다 식량을 조금씩 걷는 건 어떻겠습니까? 목 소저에게 조언을 얻어서 먹기 좋은 죽을 만드는 겁니다. 서릉의 온 백성이 함께 죽을 먹으면 얼마나 시끌벅적하고 좋아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황제는 유심히 듣고 있었다. 장공주가 말을 건 후에야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걷고 또 걸으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마음속엔 온통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 *
하운방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병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여인들은 자수법을 배우면 이런 아름다운 병풍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흥분했다.
자수 장사를 하는 다른 상인이 찾아와 병풍을 사려고도 했지만, 채의가 거절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먼저 반대하고 나섰다.
이 병풍은 백성들의 희망이었다. 하운방에 와서 병풍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어찌 남에게 팔도록 두겠는가?
황제는 하운방에 걸린 현판을 보더니 고개를 돌려 말했다.
“누님, 하운방의 채의라는 아이가 아름답다던데 가서 한번 살펴보는 게 어떻습니까?”
“좋지요.”
목운요는 위층에서 화첩을 뒤적이며 겨울옷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막 괜찮은 도안이 떠오르려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저, 아래층에 어떤 부인이 오셨는데, 채의 아가씨께서 파악하기 힘든 손님이라며 직접 오셨으면 한답니다.”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금방 내려갈게.”
평소 눈썰미가 좋은 채의도 알기 힘든 사람이라면 분명 평범한 부인이 아닐 터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목운요는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황상……. 그리고 장공주 전하?’
채의가 고개를 들고 목운요를 보았다.
“소저, 오셨습니까? 이분들께서 미인책 한 권을 사고 싶다 하십니다.”
목운요는 신속히 내려와 채의에게 말했다.
“오늘은 가게 문을 일찍 닫아 주세요.”
채의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목운요의 얼굴을 보고 속히 하인을 시켜 다른 손님들을 정중히 내보냈다.
손님들이 모두 나가자 목운요는 두 사람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황상과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순간 하운방에 있던 직원들이 깜짝 놀라 황망히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황제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주 안락하게 꾸며 놓았구나. 한눈에 보아도 장사가 잘될 것 같다.”
목운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황상의 후광을 입은 덕분이지요. 손님들이 황상께서 하사하신 현판을 보고 옷을 사러 옵니다.”
황상께서 친히 현판을 내리니 서릉의 부인들은 하운방의 옷을 좋아하지 않아도 한두 벌은 꼭 사 갔다.
황제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너는 무슨 일을 하건 언제나 짐에게 공을 돌리는구나.”
“그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목운요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그에 장공주가 손에 든 미인책을 내려놓았다.
“운요 말이 맞지요. 하운방이 이리 잘되는 까닭에는 황상의 공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목운요가 더욱 해사하게 웃었다. 반짝거리는 두 눈을 보고 있자니 두 사람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 미인책은 다른 이들이 보던 것이니,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새로 자수를 놓아 선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 수고할 것 없다. 이걸 가져가도 충분해. 앞으로 무척 바쁠 테니 우선 황상께서 명하신 일에 집중해야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필히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좋다.”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늦었구나. 우린 가 볼 데가 있으니 그럼 마저 업무를 보아라.”
장공주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려다가, 순간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황제가 깜짝 놀라며 장공주를 부축했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장공주의 입가에 검푸른 빛이 은은하게 퍼졌다. 그녀는 가슴팍의 옷을 세게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렸다.
“화, 황상…….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오래된 지병입니다…….”
장공주는 어렸을 적 가슴팍을 다친 적이 있었다. 당시 세심하게 치료받긴 했지만 아직 지병으로 남아 있어 종종 심한 통증을 느끼곤 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옆에 선 시위에게 명령했다.
“어서 태의를 불러와라. 모두 짐의 잘못이구나. 출궁할 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는데!”
그에 장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황상을 위로하는 말을 뱉으려 했으나 가슴의 통증이 심해서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상태가 예전보다 훨씬 심했다.
황제가 대경실색하며 말했다.
“누님! 어찌 그러십니까?”
목운요는 주먹을 꽉 쥐고 혀끝을 깨물더니 장공주 곁으로 다가갔다.
“황상, 실례지만 공주 전하를 반듯이 눕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의술을 조금 알고 있으니 부디 도울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그러자 황제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온몸에서 위엄이 풍겼다. 목운요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에선 살기가 어려 있었다.
“네가 의술을 안다고?”
‘아무한테나 누님의 안위를 맡길 것 같으냐!’
그 와중에도 장공주의 안색은 더욱 나빠졌고 숨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미약해졌다.
당황한 목운요는 황제를 헤아릴 틈도 없이 채의에게 오라고 눈짓했다. 그리고 장공주를 바닥에 눕히고 목을 감싸는 단추를 푼 뒤 가슴의 혈 자리에 은침을 놓았다.
황제는 더욱 매서워진 눈빛으로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목운요의 능숙한 솜씨를 보자 눈에 어린 살기는 점차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장공주의 상태는 여전히 위중했다. 은침을 놓았지만 아직도 호흡이 불안정하자 목운요는 무척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떠하냐?”
목운요가 장공주의 혈 자리를 문지르더니 재빨리 채의를 향해 처방을 읊었다.
“마황 석 돈, 차조기씨 두 돈, 그리고 머위 석 돈을 물 세 그릇과 함께 달여 오세요! 어서요!”
채의가 곧장 일어나서 뛰쳐나갔다. 황제는 시위에게 따라가라고 지시했다.
하운방에 있던 사람들은 행여나 목운요의 치료에 방해가 될까 봐 무릎을 꿇은 채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목운요는 이마의 땀을 닦을 새도 없이 계속 은침을 놓으며 병세를 완화하려 힘썼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다행히 마지막 은침을 놓자 장공주의 검푸른 낯빛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황제는 제왕의 위용을 신경 쓸 새도 없이 기뻐하며 장공주 곁으로 다가왔다.
“누님, 좀 어떠십니까?”
장공주는 안정된 눈빛으로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운요는 은침을 거두고 장공주 옆에 꿇어앉아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혔다.
“황상, 공주 전하의 병세가 잠시 안정되었으나 말씀을 하시기엔 아직 불편하실 것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고개를 들어 목운요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가득했다. 문득 목운요가 눈물을 흘렸다.
“왜 그러느냐?”
조금 전 위급한 상황이었을 땐 그 누구보다 침착하게 굴던 목운요가 왜 지금 눈물을 흘리는지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목운요는 얼른 눈물을 훔친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뒤늦게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조금 전 상황은 정말로 위급했기에, 혹여 공주 전하께 변고라도 생겼다가는 저와 어머니도 함께 저승으로 갔을 테니까요.”
장공주를 치료할 때는 너무 위급하여 못 느꼈는데 상황이 안정되니 긴장이 풀린 것이었다.
황제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가라앉은 눈으로 목운요를 응시했다.
“잘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녀는 정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만약 장공주에게 변고가 생겨 목숨이 위험해졌다면 자신은 몹시 분노하여 소씨 가문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사이 시위가 태의들을 데려왔다. 태의는 황제에게 예를 갖출 겨를도 없이 바로 장공주의 상태를 살폈다.
“황상, 공주 전하의 병세가 안정을 되찾았으니 소신은 가서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며칠간 약을 챙겨 드시면 곧 호전될 겁니다.”
황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누님은 오랫동안 지병을 앓으셨지만, 이번에는 유독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얼굴이 퍼렇게 질리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셨는데, 어찌 된 것인지 아는가?”
“그것은……. 공주 전하도 연로하시어 몸이 예전 같지 않기에 지병이 악화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짐이 그딴 소리나 들으려고 태의원(太医院)과 그대들을 모두 먹여 살렸다고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랫동안 누님을 보살폈지만 누님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신다. 쓸모없는 그대들을 짐이 계속 놔둬야겠는가?”
태의들은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 숨을 죽인 채 벌벌 떨기만 했다.
사람들은 황제의 냉랭한 말투와 노기에 눌려 숨을 내뱉기도 힘들었다.
“시간을 줄 테니 누님의 몸을 호전시켜 놓도록. 오늘과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엄중한 벌을 내릴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게!”
“네, 명 받들겠습니다.”
그때, 채의가 급하게 약사발을 들고 왔다.
“소저, 약을 달여 왔습니다.”
태의는 약사발을 보고 조심스럽게 한 숟가락을 맛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