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기러기로 서신을 전하다
월왕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하운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크니 운요에게 가기가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운요에게 따로 전달하지.”
성 공공은 무척 아쉬워하다가 다시 희망에 부풀었다.
“전하, 언제 목 소저를 초대하실 겁니까? 집에 어디 손볼 곳은 없을까요? 이곳은 지은 지 오래되어 낡은 데가 많습니다. 소저들은 강남풍의 정원을 좋아한다면서요? 연무장을 깎아 내고 진귀한 화초를 좀 심으면 어떻겠습니까? 연못을 파서 수양버들도 좀 심고, 흐르는 물을 끌어다가 큰 물고기도 기르고…….”
우항은 발등에 난 발자국을 털어 내며 성 공공의 말을 끊었다.
“그쯤 하십시오. 더 하다가는 월왕부 전체가 사라지겠습니다. 연무장은 전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공간인데 그런 곳을 어찌 깎아 내겠습니까? 그리고 흐르는 물을 끌어오다니요? 서릉에서 특별히 물길이라도 파 준답니까?”
성 공공은 즐겁게 상상하고 있다가 바로 얼굴이 굳었다. 원래도 눈 한쪽이 멀어서 다소 거친 인상이었는데, 지금의 얼굴은 밤중에 우는 어린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라고?”
서둘러 우항이 손사래를 쳤다.
“노, 농담입니다. 저도 월왕부를 좀 손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성 공공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어……? 전하께서 어디 가셨지?”
우항과 성 공공은 대화하느라 정신이 팔려 월왕이 사라진 것을 보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 * *
목운요는 후원에서 채의가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다, 마지막 동작이 끝나자 박수를 쳤다.
“정말 한눈에 담기 벅찰 정도로 아름답군요.”
채의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목운요에게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소저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예의는 거둬도 좋아요. 그동안 춤을 연습하느라 수고가 많았어요.”
채의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소저께서 소인을 불구덩이에서 구해 주셨으니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그저 춤을 추는 것쯤은 전혀 수고랄 게 없지요.”
회귀 전, 채의는 서릉의 유명한 명기였다. 하지만 명성이 정점에 달했을 때 강에 투신해서 자살하고 말았다. 기방 주인이 귀인의 수청을 들라고 강요하자 순결을 잃고 싶지 않아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춤에 능한 여인을 찾던 목운요는 육냥에게 채의의 몸값을 치르게 하고 하운방으로 데려왔다.
“춤은 충분히 되었으니 오늘 연습은 이만하고 푹 쉬어요.”
“네, 소저.”
이내 목운요가 떠나려고 하던 중 돌연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꾸욱꾸욱 물수리, 강의 섬에 사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도 인영이 보이지 않자 목운요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누구냐?”
“참하고 고운 아가씨, 군자의 좋은 배필이네.”
금란과 사서가 재빨리 목운요 곁으로 달려왔다.
“누가 귀신 같은 농간을 부리는 것이지?”
그때,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앵무새가 날아와 꽃가지 위에 앉았다. 몸집이 크고 붉은색과 녹색이 섞인 화려한 새였다. 새는 목을 길게 빼며 다시 소리 질렀다.
“꾸욱꾸욱 물수리, 강의 섬에 사네. 참하고 고운 아가씨, 군자의 좋은 배필이네.”
금란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저 앵무새가 시를 읊는데요? 게다가 목에는 무슨 주머니를 걸고 있습니다.”
목운요는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넌 어디서 온 새니?”
앵무새가 목운요의 발치로 날아왔다. 그러고는 가슴을 쭉 펴고 목을 내민 채 계속 시를 읊었다.
“꾸욱꾸욱 물수리…….”
호기심이 든 목운요는 쪼그리고 앉아 새의 목에 걸린 주머니에서 서신을 하나 꺼냈다. 서신 봉투에는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고양이 그림 옆에는 ‘요(瑶)’ 자도 작게 쓰여 있었다.
목운요는 편지를 열어 읽어 본 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앵무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이름이 뭐니?”
그 말을 듣고 앵무새는 날개를 퍼덕이며 소리쳤다.
“기러기! 기러기!”
금란과 시녀들이 앵무새를 둘러싸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앵무새인데 어찌 이름이 기러기라는 걸까요?”
목운요가 서신을 챙기며 말했다.
“금란, 신선한 과일을 잘라 와서 앵무새에게 먹여 줘요.”
“네, 소저.”
목운요는 서신을 다시 읽어 보며 더욱 짙은 눈웃음을 지었다. 서신을 보자 머릿속으로 시 한 구가 떠올랐다.
기러기로 서신을 전하며, 서로 끝없는 그리움을 말하네.
금란이 앵무새에게 과일을 먹이는 사이, 목운요는 방으로 들어가 흰 종이에 다섯 글자를 적었다.
[알겠습니다.]
경릉성에서 머물던 시절, 월왕은 무척 간결한 답신만 보내왔다. 이제는 그에게 똑같이 되돌려줄 때였다.
목운요는 서신을 넣은 주머니를 앵무새의 목에 건 후 깃털을 쓰다듬었다.
앵무새는 날갯짓을 하더니 신속히 담장 밖으로 날아올랐다.
월왕이 손을 들자 앵무새가 그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종이가 만져지자 기뻐했다가, 서신에 적힌 내용을 읽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고작 ‘알겠습니다.’ 다섯 글자라고?”
* * *
서릉의 불선루를 맡을 이는 악 씨였다. 악 씨는 월왕의 심복으로, 이미 진 총관 밑에서 불선루의 모든 일을 숙지한 뒤였다.
마침 시간이 남자 목운요는 악 씨와의 만남을 가졌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악 점주, 어서 일어나세요. 불선루의 개업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다고요?”
“맞습니다. 최근 하운방의 개업 준비는 거의 끝마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불선루는 어찌하면 좋을지 가르침을 주십사 하고 찾아왔습니다.”
악 점주는 계면쩍어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 총관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목 소저께 가르침을 청하라고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목운요는 미소 지었다.
“사실 불선루는 찻집이니 모든 것이 하운방과 다릅니다. 하운방은 부인들과 아가씨들을 상대하는 반면, 불선루는 남자 손님이 많죠. 그러니 두 상점의 개업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어요.”
목운요의 말을 들은 악 씨는 바로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목운요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운방은 이곳저곳 떠벌리며 소문을 내도 좋습니다. 아무리 명성이 자자해도 결국 자수방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반면 불선루는 사람들에게 믿음직하다는 인상을 줘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개업식을 성대하게 치를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평범하고 잔잔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어떻게 불선루에 사람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용하고 천천히 가는 것이 오래가는 것이라고 하죠. 만약 생각이 있으시다면 경릉성에서 노점 찻집을 세웠던 것을 모방해 보세요. 사람들에게 차를 한 잔씩 나눠 주는 것도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악 점주는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네,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소저께서 예전에 진 총관께 당부하셨던 것처럼, 노점 찻집이 다른 이의 생업에 지장이 가지 않게끔 특별히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에게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겁니다. 서릉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인이 넘쳐나는 곳이니 절대 그 누구에게도 밉보여선 안 돼요. 차 시중을 드는 점원들에게도 되도록 말을 아끼고 자기 본분대로 차만 잘 우려내라고 하세요.”
사실 불선루를 여는 목적은 월왕을 도와 서릉의 소식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서릉엔 세상 물정에 빠삭한 자들이 많아, 조금만 잘못해도 목적을 들키기 십상이었다.
몇 개월- 아니, 반년 정도는 최대한 의심받지 않으면서 기반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악 점주는 냉큼 목운요에게 예를 갖췄다.
“가르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저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전 이만 돌아가서 개업을 준비하겠습니다.”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란, 악 점주를 배웅해 줘요.”
악 점주를 보낸 후, 목운요는 자신도 모르게 제명을 떠올렸다. 지금쯤 제명이 대황자 릉왕을 찾아갔을 것이다.
* * *
그날 밤, 릉왕부.
의원이 조심스럽게 은침을 거두며 옆에 있는 총관에게 말했다.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만, 이것도 한때이니 옆에서 잘 돌봐야 합니다. 때맞춰 탕약을 먹이시면 밤중에는 정신이 돌아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의원을 보낸 후, 걸음을 옮긴 총관은 서재에서 책을 읽던 릉왕에게 말했다.
“전하, 확실히 예전에 양주에서 소금 상인을 모함한 제명이 맞습니다.”
릉왕은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제명이라…….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다닌 자가 제 발로 찾아올 줄은 몰랐군. 그를 죽이려 한 자가 누구인지는 알아냈나?”
“범인은 이미 자결한 후였기에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명에게서 불에 타 찢어진 쪽지 하나를 발견했으니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쪽지를 건네받은 릉왕은 쪽지 위의 글씨를 보고 두 눈을 번뜩였다.
“이 필적은 진왕의 것인데……. 다른 건 못 찾았나?”
“네, 없었습니다.”
릉왕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돌연 웃음 지었다.
“사람을 붙여 제명을 잘 돌보게. 절대로 죽게 두어선 안 돼. 그리고 진왕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는지 예의주시하게. 제명이 일어나면 내게 보고하고.”
“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