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호전된 소우
속히 건너온 소문원이 송구한 얼굴로 노부인을 보았다.
“어머니께 문안드립니다. 늦은 밤까지 소란이 일다니, 이게 다 아들이 못난 탓입니다.”
“우리 모자 사이에 인사치레는 거두자꾸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목운요를 처리하는 일이다.”
목운요가 월왕, 장공주와 친해진 것에 노부인은 불안을 느꼈다. 그녀가 세간의 눈에 띌수록 소씨 가문이 위험해지므로 절대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되었다.
잠시 침묵하던 소문원이 곧 입을 열었다.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저희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노부인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한낱 시골 계집애가 하루아침에 득세하여 황상의 눈에 들더니, 장공주 전하의 마음마저 살 줄 누가 알았겠느냐!”
소문원도 같이 탄식했다.
“이대로라면 더욱더 목운요를 건드리기 힘들 겁니다. 애당초 이럴 줄 알았다면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암암리에 저 모녀를 처리했어야 합니다.”
소청과 목운요가 소씨 가문에 처음 왔을 때는 양이 호랑이 입으로 들어온 꼴이라 함부로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자마자 소씨 가문을 위아래로 들쑤실 줄 누가 알았겠는가?
노부인이 손에 쥔 염주를 굴리다 머리가 아픈 듯 눈썹을 찌푸렸다.
“목운요의 위세가 커지고 사황자의 마음마저 기울고 있으니 절대 정면 돌파해선 안 되지. 천천히 은밀한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혹시 어머니께 무슨 묘책이 없으십니까?”
“시월 십오일은 목운요가 열다섯이 되는 날이니 큰 잔치를 준비할 것이다. 마침 우도 몸이 안 좋아 열다섯에 계례를 치르지 못했으니 함께 준비하면 되겠어.”
“우의 몸이 약한데 이부인이 동의하겠습니까?”
“무슨 동의가 필요하겠느냐?”
눈을 뜬 노부인의 표정이 점점 차분해졌다.
“이 일은 내가 맡을 테니 넌 관여하지 마라. 그나저나 육공주 전하가 청오를 마음에 두셨다고?”
소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데 큰 소동이 나는 바람에 대학사님의 딸 장완이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좀 이따 청오에게 선물을 준비해서 직접 장씨 가문을 찾아가라고 해라.”
“육공주 전하와 잘되는 게 저희 가문에는 훨씬 유리하긴 하지 않나요?”
노부인 손 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조정의 관리라는 놈이 왜 이리 꽉 막혔어? 절대 우리 가문이 먼저 배신해선 안 된다. 장씨 가문이 알아서 혼인을 물러야지. 애초에 청오와 장완의 혼사가 정해진 건 장 대학사가 조정에서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은 데다 기왕 더 좋은 선택지가 생겼으니 질질 끌 순 없지.”
“혼인을 물리는 건 중대사인데 장씨 가문에서 동의하겠습니까?”
“장씨 가문이 동의하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육공주 전하가 어떻게 하시느냐지. 황상이 육공주 전하를 지극히 아끼시니 공주 전하가 나서서 악역을 자처하면 그만이야. 아무리 장씨 가문이라도 황상 앞에서 별수 있겠느냐?”
그래도 소문원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청오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약속을 중시하는 아이인지라 공주 전하를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말거라. 청오도 뭘 선택해야 할지 어련히 알 거다. 돌아가면 청오를 잘 타일러라. 우의한테도 당분간은 소란 피우지 말라 이르고. 소씨 가문에 여아가 그 아이 하나밖에 없는 건 아니니, 계속 분수를 지키지 않으면 곤란하다. 아한은 공주 전하의 목숨을 구했고, 아정, 아령도 용모가 괜찮고 영리한 편이지. 우의가 계속 일의 경중을 모르면 이 할미도 더는 품에 끼고 있을 수 없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우의를 잘 지도하겠습니다.”
“그래, 돌아가 봐라.”
소문원이 인사하고 나가자 노부인이 손안의 염주를 뚝 끊었다. 동그란 염주 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 마마가 서둘러 염주 구슬들을 집어 들었다.
“노부인, 이건 가장 좋아하시는 염주가 아닙니까.”
“온 마마, 가서 불경 두 권을 가져오게. 필사를 하며 우를 위해 기도해야겠어.”
“요 이틀간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잖습니까?”
“어서 가지고 오지 않고 뭐 하나? 할미의 마지막 마음을 다하는 것이네.”
노부인의 눈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소씨 가문에서는 소우가 태어날 때부터 비단옷에 진귀한 약재를 지원하며 많은 돈을 썼다. 그러니 이제 보답을 받을 차례였다.
온 마마는 가슴이 점점 떨려 왔지만, 감히 대꾸하지 못한 채 천천히 물러났다.
* * *
목운요가 제월각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소우가 찾아왔다.
소우의 몸은 여전히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야윈 채였지만, 예전에 비해 훨씬 건강해져 있었다.
목운요는 빙긋 웃으며 소우를 맞이했다.
“언니를 뵙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리지 말아요. 그보다 사냥터에서 제대로 못 먹었어요? 왜 이리 야위었어요?”
목운요는 소우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틀 정도 푹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언니도 그간 잘 지내셨죠?”
“나는 잘 지냈어요. 사냥터에서 내 생각은 안 했나요?”
소우는 질문을 던진 후 저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며 긴장한 얼굴로 목운요를 바라봤다.
목운요는 잠시 당황했으나 바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언니를 자주 생각했지요. 제 마음을 어찌 아셨어요?”
목운요의 대답을 들은 소우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어쩐지 요 며칠 계속 재채기가 나더라고요. 어머니께선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하셨죠. 동생이 사냥터에서 종일 나를 떠올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목운요는 그런 소우가 귀여워 미소가 절로 나왔다.
“저는 사냥터에서 재채기가 나지 않았는데. 소우 언니는 제 생각을 하지 않았나 봐요.”
“그건……! 당연히 생각했죠. 그런데 동생보단 덜 생각했나 봐요.”
그에 목운요는 눈웃음을 지으며 소우의 맥을 짚었다.
“요즘 몸은 좀 어떤 것 같나요?”
“좋았어요.”
소우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자, 뺨에 얕은 보조개가 팼다.
목운요는 참지 못하고 손가락을 들어 소우의 보조개를 콕 눌렀다. 놀라서 두 눈이 커진 소우를 보고 있으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많이 좀 먹어요. 포동포동해져야 보조개를 누를 때 촉감이 좋으니까요.”
소우는 빨개진 얼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내 두 볼에 바람을 넣어 빵빵하게 만든 후 목운요를 노려봤다.
“동생……!”
삐친 기색이 역력한 그 모습에 목운요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사냥터에서 꽤 괜찮은 모피를 가져왔으니 골라 보세요. 언니에게 맞는 옷을 지으라고 할게요.”
“고작 모피를 뇌물로 주려는 거예요?”
소우가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목운요의 기분이 상할까 봐 몰래 눈치를 살피는 게 훤히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하면 화를 풀겠어요?”
“시월 십오일이 동생의 생일이라고 들었어요. 그날 내가 동생에게 발계(发笄, 계례 때 꽂는 비녀)를 꽂아 주는 건 어때요? 전엔 몸이 좋지 않아 연회를 즐기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계례를 즐기고 싶어요.”
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던 소청과 이부인은 그 얘기를 듣고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
소우가 고개를 돌려 이부인을 보았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몸이 많이 좋아졌어요. 전 그저 운요 동생에게 발계를 꽂아 주려는 것뿐이에요. 제 소원이니 부디 허락해 주세요!”
그에 이부인이 소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방금 네 조모님께 다녀오는 길이다. 요즘 네 몸이 많이 호전되었으니 예전에 치르지 못한 네 계례를 함께 열라고 하시더구나. 어차피 너와 운요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 않으니 계례를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정말요?”
소우는 눈을 반짝이며 크게 기뻐했다.
“운요 동생, 동생도 들었죠? 우리가 함께 계례를 치를 수 있대요!”
그 모습에 이부인의 얼굴에 또렷한 미소가 퍼졌다.
“계례의 예법은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단다. 모든 예를 행하려면 적어도 한 시진은 필요할 거야. 그러니 그동안 약도 잘 챙겨 먹으며 몸조리에 신경 써야 한다. 알겠지?”
“어머니, 염려 놓으세요. 꼭 몸조리에 신경 쓸게요.”
몸이 호전되는 기색이 보이자, 소우의 성격도 활발해졌다. 종일 이부인의 옆에서 장난치고 애교를 떨어 서원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계례를 거하게 열기로 했으니 사전에 귀빈을 초대해야 하는데, 운요는 누구를 초대할 생각이니?”
“전 서릉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분을 초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외숙모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 네 계례를 빈틈없이 준비해 주마.”
이에 감사를 표한 목운요가 금란에게 물었다.
“금란, 사냥터에서 하사받은 모피는 가져왔죠?”
“네, 소저. 다른 방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목운요는 소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니, 어서 가서 골라 보세요. 늦으면 안 드릴 거예요.”
“쩨쩨하긴! 많이 고를 테니 아까워하지나 말아요.”
소우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란이 소우를 데리고 자리를 뜨자, 이부인이 목운요에게 웃으며 말했다.
“우를 일부러 다른 곳으로 보낸 걸 보니, 내게 할 말이 있나 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