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일 년의 약속
“월, 월왕 전하……. 제 조부이신 맹 태사를 보시어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목 소저를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월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활시위를 놓을 뿐이었다.
화살은 맹한동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고, 정확히 그의 손을 꿰뚫었다.
맹한동은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붉은 피가 손바닥을 타고 땅으로 흘렀다. 아주 처참한 모습이었다.
잠시 뒤, 맹한동이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월왕 전하, 이렇게 복수하니 마음이 풀리십니까?”
월왕은 서늘한 눈으로 맹한동을 바라보다, 태연스레 화살을 뽑아 들었다. 다시금 활시위가 당겨졌다.
그에 맹한동은 두 눈을 부릅떴다. 주체할 수 없이 짙은 공포심이 차오르자 그는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워, 월왕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목 소저를 성가시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애원해도 월왕이 활을 거두지 않자 맹한동은 다급하게 목운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인은 마음이 약하기 마련이었다. 목운요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터였다.
“목 소저, 제가 경솔하게 행동한 탓에 소저를 다치게 할 뻔했습니다. 나중에 반드시 댁을 찾아가 큰 선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한 번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사 전하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러자 목운요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맹한동의 손바닥을 한번 훑어보았다.
“맹 공자님, 아까 제 머리가 화살에 꿰뚫렸다면 지금처럼 제게 용서를 구하실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소저의 목숨을 빼앗으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고,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목운요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께서도 죽이려는 뜻은 없으실 테니까요. 공자님께선 맹 태사의 손자이신데 사냥터에서 목숨을 다하시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곧장 화살이 날아가 맹한동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맹한동은 울부짖으며 땅에 고꾸라졌다.
그제야 월왕은 활과 화살을 내려놓았다. 그는 땅에 떨어진 비녀를 줍더니 목운요에게 건네주었다.
목운요는 손수건을 꺼내서 부서진 비녀를 감싼 후 바닥에 쓰러진 맹한동을 바라보았다.
“맹 공자님, 아까 목숨만 살려 주면 직접 찾아와서 큰 선물로 사죄한다 하셨지요? 그 말 가슴에 새겨 두었으니 절대 잊지 마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월왕은 목운요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끌며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고 한참 후, 맹한동이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두 사람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원한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월왕, 목운요……!’
* * *
한참을 가고 난 뒤 월왕이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조심해라. 맹씨 가문은 보기보다 쉬운 상대가 아니니까.”
“네, 주의하겠습니다.”
월왕의 눈에 웃음기가 번졌다. 연정을 품은 후로 목운요가 차가운 눈을 하는 것마저도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월왕은 멈춰 서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산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저 산기슭까지는 꽤 평탄한 지대라 말을 타고 달리기에 좋았다.
“운요야, 말을 빨리 달리면 어떻겠느냐?”
“네?”
목운요는 당혹스러워했다.
“저는 말을 처음 타 봅니다. 그래서…….”
그에 월왕이 씩 웃더니 훌쩍 말 위로 뛰어올라 목운요의 뒤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목운요를 품에 안은 채 고삐를 힘껏 당기며 소리쳤다.
“이랴!”
말이 히이잉 소리를 내더니 앞을 향해 질주했다. 양옆의 경치가 빠르게 뒤로 지나갔고,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처음엔 당황하던 목운요도 적응이 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빠른 속도로 달리니 바람을 거스르고 날아가는 것만 같아 호기로운 느낌이 들었다.
이내 산기슭을 향해 달리던 말이 멈추었다.
월왕은 조심스레 목운요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월왕부는 연무장을 따로 갖추고 있으니 언제든 말을 타러 와도 된다.”
목운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 그동안 속에 쌓인 답답함이 다 사라진 것만 같았다.
“네. 말을 타러 가고 싶을 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자주 놀러 가긴 힘들겠지요?”
“네가 열다섯이 되면 부황께 혼인을 선포해 달라 청하겠다. 어떠하냐?”
순간 목운요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혼인을 선포해 달라 청하신다고요?”
황제가 선포하는 혼인은 정실을 맞이할 때만 가능했다. 하지만 목운요의 신분으로 볼 때 왕비가 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래. 네가 열다섯이 되면 너를 내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
월왕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조급하단 걸 알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목운요를 얼른 아내로 맞이하여 매 순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목운요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잘 생각해 보신 것 맞습니까? 솔직하게 따져 보자면 지금 제 신분은 일개 장사치입니다. 그런 저를 비로 맞이할 수 있으십니까?”
월왕은 그녀가 어떤 염려를 하는지 잘 알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월왕은 못 할지라도 영군월은 할 수 있다.”
목운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저는 열다섯입니다. 그동안 하운방과 불선루를 돌보느라 바빠서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지요. 앞으로 일 년간은 어머니 곁을 지키며 잘 모셔 드리고 싶습니다.”
“일 년 동안?”
“네. 만약 일 년이 지나도 여전히 오늘과 같은 마음이시라면 기쁜 마음으로 사황자님께 시집가겠습니다.”
그에 월왕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
“좋다. 그럼 일 년 후에 부황께 말씀드리마. 그때는 반드시 널 내 아내로 맞이하겠다.”
목운요는 활짝 미소 지었다.
지금은 자신도, 월왕도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일 년 뒤면 절반쯤은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도 둘의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안정적인 생활을 함께할 수 있으리라.
월왕의 얼굴에도 절로 웃음이 피었다. 목운요의 미소엔 형용할 수 없는 전염성이 있어서 주위의 경치마저 더 아름답게 변했다. 저 미소를 위해서라도 월왕은 충분히 일 년을 기다릴 수 있었다.
* * *
목운요와 월왕이 막사로 돌아오자 금위군이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월왕은 속히 소리쳤다.
“무엄하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목운요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간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표정이 어두운 유왕이 서둘러 앞으로 나왔다.
“맹씨 가문의 맹한동이 죽었다. 맹습이 부황께 와서, 네가 맹한동을 살해했다고 호소하더구나. 몸에 꽂힌 화살에 네 표식이 있었다.”
사냥터에서는 모두가 개별 표식이 달린 화살을 사용했다. 나중에 수렵물을 집계할 때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얼른 부황의 막사로 가 보아라. 부디 조심하고.”
유왕이 월왕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에 옆에 있던 목운요가 입을 열었다.
“유왕 전하, 괜찮으시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목운요가 그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이내 유왕의 눈에 기쁜 빛이 번뜩였다.
* * *
황제의 막사에는 맹한동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목운요는 월왕을 따라 예를 올린 후 시선을 내렸다.
월왕은 아까 산에서 총 세 발의 화살을 쏘았다. 첫 번째 화살은 맹한동의 상투관을 부수었고, 두 번째 화살은 맹한동의 손을 꿰뚫었다. 그리고 마지막 화살은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런데 지금 맹한동에게는 화살이 하나 더 박혀 있었다. 다름 아닌 가슴 쪽이었다.
황제는 두 사람을 옥죄는 위압감을 풍겼다.
“사황자가 무고한 인명을 앗아 갔다고 맹습이 호소했다. 짐이 조사해 보니 맹한동을 죽인 저 화살에 네 표식이 있더구나.”
월왕이 고개를 돌려 맹한동의 시체를 보았다.
“맹한동의 손과 어깨에 있는 화살은 제가 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가슴에 박혀 목숨을 앗아 간 화살은 저와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부황, 소상히 조사해 주십시오.”
옆에서 눈물을 닦는 맹습의 얼굴은 무척 비통해 보였다.
“월왕 전하, 한동은 다소 심술궂긴 하지만, 본성은 착한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가 전하께 어떤 노여움을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살해하셔야 했습니까?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월왕의 눈에 차가운 한기가 스쳤다.
“맹 대인의 말대로라면 맹한동이 무슨 짓을 하든 본 왕이 용서해야 했단 말이오?”
“소신, 그런 뜻이 아니오라…….”
“그 뜻이 아니라면 맹한동이 죽을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어찌 확신하오?”
월왕이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말할 줄 몰랐던 맹습은 잠시 당황하더니 다시금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동은 제 분수를 아는 아이입니다. 평소에 예절도 바르고…….”
“그럼 본 왕이 분수도 모르고 행동했다는 것이오? 황실에 대한 망언은 참수할 만한 대역죄요. 맹 대인도 잘 알고 있지 않소?”
맹습이 황망히 고개를 젓더니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황상, 소신은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월왕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맹한동은 본 왕을 향해 화살을 쏘았소. 고의로 본 왕을 암살하려 한 것이었는데, 다행히 목 소저가 옆에 있어 참극을 막을 수 있었소. 맹한동이 본 왕의 목숨을 빼앗진 않았기에 본 왕도 맹한동의 손과 어깨에만 상처를 입혀 작은 벌을 큰 교훈으로 삼게 하였소. 이래도 맹 대인은 본 왕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시오?”
“한동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월왕이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부황, 누군가 일부러 저를 모함하고 사지로 내몰기 위해 맹한동을 살해한 것입니다. 부디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