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죽음을 자초하는 맹한동
장공주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지났다고, 참. 내가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월왕에게 난 아주 바빠서 만나 줄 시간이 없다고 하게. 할 일이 없으면 사냥터로 나가서 좋은 모피나 구해 오라고도 전해 주게나.”
곡 마마도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바로 전하겠습니다.”
목운요를 바라보는 장공주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군월은 겉보기엔 냉정한 사람 같지만, 신경 쓰는 일이 생기면 그거 말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아이야. 게다가 성격이 얼마나 답답한지, 제 부황을 만날 때도 아부 한마디 하는 꼴을 못 봤다. 그런 성격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하는 편이지.”
목운요는 잠시 정신을 팔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월왕과 장공주가 알고 있는 월왕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목운요 앞에서 월왕은 이런저런 꾀를 부리며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내상이 낫지 않아 정신이 없는 거라며 시치미를 떼기도 했다. 평소엔 아무리 차가운 사람이어도, 목운요를 보는 두 눈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월왕은 그녀에게 제멋대로 굴지도, 고집을 피우지도 않았다.
장공주는 미소 띤 채 입을 다물었다. 귀한 보물을 구하기는 쉬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곡 마마가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공주 전하께 아룁니다. 월왕 전하께서 사냥감을 잡아 오셨습니다.”
“이렇게 빨리 잡아 왔다고? 설마 토끼 두 마리를 가져온 건 아니겠지?”
장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요, 너도 나와 함께 가 보자꾸나.”
계속 이 아이를 잡아 놓았다간 월왕이 막사 안으로 쳐들어올 기세였다.
장공주가 막사의 문을 나서자마자 온 신경을 막사에 집중한 월왕이 보였다.
“고모님을 뵙습니다.”
그가 공손히 인사했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목운요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야 월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탁자에는 사냥감이 몇 마리 놓여 있었다. 모두 눈에 화살을 맞고 죽어서 출혈이 많지 않았고, 가죽도 크게 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째 하루 만에 네 사냥 솜씨가 크게 발전한 것 같구나. 어제는 온종일 토끼 한 마리밖에 잡아 오지 못하더니, 오늘은 짧은 시간에 사냥감을 여섯 마리나 잡아 오고 말이야.”
장공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다가 손을 내저었다.
“됐다, 됐어. 너희는 젊으니 이 늙은이와는 말도 섞기 싫겠지. 어서 가서 볼일들 봐라.”
그에 월왕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고모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모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사냥터에 온 김에 재밌게 놀다 가야 하지 않겠어? 어서 가 보거라.”
“……네.”
월왕을 따라 주둔지 밖으로 향하는 길에는 온갖 따가운 눈초리들이 쏟아졌다. 목운요는 이에 살짝 인상을 썼지만, 월왕과의 거리를 벌리진 않았다.
주둔지를 벗어나서야 월왕은 걸음을 멈췄다.
“운요, 고모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목운요는 깨끗한 잔디를 찾아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나요?”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그래도 내가 어젯밤 맹언연을 다치게 한 것과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목운요는 순간 상처받은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공주 전하께선 제가 월왕 전하께 폐를 끼쳤다고 하셨어요. 저 때문에 전하가 맹씨 가문과 척지게 됐으니 앞으로 닥쳐올 역경이 많을 거라 하셨습니다. 게다가 저와 전하의 신분 차가 너무 많이 나서 함께할 수 없을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월왕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그는 목운요 앞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난 어렸을 때부터 부황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월서에 가고부터는 조정의 사람들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원한을 맺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 그리고 네 신분이 어디가 어때서? 황족이 뭐 별것이냐? 내게 신분이라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까지 혼자 지내지 않고 벌써 혼인했을 거다.”
목운요는 살짝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쪼그리고 앉은 월왕을 바라봤다. 그를 보고 있자니 얼굴에 저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농담입니다. 공주 전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냥 차를 끓여 달라 하셨고, 앞으로 시간이 나면 종종 찾아와 대화를 나누자고 하셨습니다.”
애초에 목운요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새로운 삶이 생겼다. 이번에도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면 회귀 전과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정말이더냐?”
“물론이지요.”
산들바람이 불어오더니 주변이 시원해졌다. 목운요는 살랑이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곱게 눈웃음을 치며 월왕에게 말했다.
“제게 기마를 가르쳐 준다고 하셨죠? 그 말…… 아직 유효한가요?”
월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자.”
그에 목운요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남녀칠세부동석도 모르십니까? 예절 지키는 법을 배우셔야겠군요.”
순간 월왕의 두 눈이 갈 곳을 잃었다. 그러다 목운요가 말 근처로 가는 것을 보고 냉큼 그녀를 따라갔다.
월왕의 말은 아주 건장하고 힘이 넘치는 흑마였다. 목운요가 제게 오는 걸 보자 투레질을 하며 두 발자국 다가갔다.
목운요는 신기해하며 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월왕은 옆에 서서 목운요의 해사한 얼굴을 바라봤다. 온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목운요가 고개를 돌려 월왕에게 물었다.
“말에 타 봐도 되나요?”
월왕은 목운요의 허리를 잡고 힘을 주어 말 위로 올린 뒤, 말고삐를 넘겨주었다.
“잘 잡아라. 내가 말을 끌 테니 너무 무서워하진 말고.”
말은 천천히 두어 걸음 걷기 시작했다.
목운요는 긴장했는지 볼이 은은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그럼 조심하셔야 합니다. 절대로 제가 떨어지게 두지 마세요.”
“그건 잘 모르겠구나. 만약 내 쪽으로 넘어지면 널 받아 줄 수 있지만, 반대편으로 고꾸라지면 어찌 될지 모르거든.”
“공주 전하께선 월왕 전하가 과묵하다고 하셨는데, 그간 잘못 아셨나 보네요.”
“그것과 이건 다르지.”
“뭐가 다릅니까?”
“장공주 전하는 오랫동안 봐 온 사이라 내가 딱히 무얼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차리시지. 하지만, 너는…….”
월왕이 갑자기 말을 흐렸다. 분명 평소와 같은 ‘너’라는 말인데 이상하게도 깊은 감정이 묻어 있는 느낌이었다.
목운요는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뭐요?”
월왕은 걸음을 멈추고 목운요를 바라봤다. 그의 두 눈은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처럼 맑고 깊었다.
“넌 내가 좋아하는 여인이다. 그러니 열심히 노력해야 널 내 사람으로 만들지 않겠느냐.”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숨이 멎어, 있는 힘껏 말고삐를 쥐었다.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머쓱해진 월왕은 가벼운 기침을 해 댔다.
“어디서 배우긴. 널 보니 떠오른 것들이다.”
월왕은 자신에게 말주변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오죽하면 성 공공이 ‘이대로 살다간 고독사할지도 모른다.’며 걱정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목운요를 만난 후부턴 그녀가 제 마음을 모두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목운요는 월왕을 자세히 바라봤다.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는지 심장 뛰는 소리가 제 귀에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전하…….”
한데 목운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돌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월왕은 재빠르게 목운요를 이끌어 말의 등을 끌어안게 했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온 화살 하나가 목운요의 머리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갔다.
탓-!
목운요가 꽂고 있던 푸른빛의 옥비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운요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차가운 눈빛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옮겨 갔다.
맹한동이 느긋하게 말을 몰며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 든 활은 목운요를 겨냥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런. 목 소저 아닙니까. 숲속에 수상한 그림자가 보이길래 돌아다니는 여우인 줄 알았지 뭡니까? 목 소저가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목 소저가 다쳤다면 나는…….”
맹한동은 비소를 띤 채 입을 놀리다, 목운요의 옆에 있는 월왕을 보더니 아연실색해져서 황급히 말에서 내려왔다.
“월, 월왕 전하…….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저, 저는…….”
월왕의 엄청난 살기가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월왕은 곧장 활과 화살을 꺼내 맹한동을 향해 겨눴다. 활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때, 목운요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여우는 저도 못 봤습니다. 다만 개새끼 한 마리는 봤죠.”
그러나 맹한동은 목운요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용서해 달라고 사정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워, 월왕 전하. 방금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사냥터에선 매년 사람들이 실수로 다치기도 하잖습니까? 방금 제가 활을 잘못 겨누긴 했지만, 전하와 목 소저가 다치진 않았으니 부디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고 해도, 월왕은 황자였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황제가 일개 맹한동을 위해 제 아들을 벌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저, 전하……!”
월왕이 활시위를 당겼던 손을 놓으려 하자, 맹한동은 바로 몸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월왕은 맹한동이 스무 걸음 정도 도망친 후에 활시위를 놓았다.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맹한동을 향해 날아갔다. 화살은 그의 머리 위에 놓인 순금 상투관에 꽂혔다.
맹한동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정신없이 손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다행히 상투관만 상하고 머리는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워 월왕에게 다시 사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몸을 돌리자마자 자신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는 월왕이 눈에 들어왔다. 맹한동의 두 눈에 공포심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