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장공주의 부름
* * *
목운요는 고개를 숙인 채 월왕 옆을 걷다가 막사 근처에 도착했을 때에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전하,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월왕은 고개를 돌려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목운요의 눈은 언제나 맑고 투명해서 하늘의 별보다 더 반짝였다.
“네가 맹언연의 몸에 뱀을 놓은 것이냐?”
“저는 그저 맹언연의 옷에 뱀이 좋아하는 향을 뿌렸을 뿐입니다. 뱀이 공교롭게도 정말 옷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습니다.”
월왕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원한이 생기면 곧바로 갚아 주는 목운요의 태도는 과연 한결같았다.
“네 막사에 독사를 풀게 한 게 맹언연이라고 추측한 것이냐?”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런데 짐을 챙길 때 금란이 귀걸이 한쪽을 주웠지요.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는데, 맹언연의 시녀가 하고 있던 것과 같은 귀걸이였습니다.”
“그렇게 된 거였군.”
귓가에 닿는 월왕의 선명한 목소리는 누구든 혹할 만했다.
목운요는 마음이 평온하지 못했다.
“오늘 저를 도와주시는 바람에 귀찮게 되신 건 아닙니까?”
월왕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성가실 일은 없다.”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마음의 벽이 조금 허물어진 후에도 일부러 그와의 관계를 도외시해 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월왕과 자신의 신분 차이였다.
월왕은 비록 황상의 총애를 받진 못하지만, 이 나라의 황자였다. 게다가 그 능력이나 기품, 도량……. 어느 하나 다른 황자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언젠가는 회색 허물을 벗어 던지고 기량을 뽐낼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맹언연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자신은 출신이 비천했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번들 신분을 바꿀 순 없었다.
“운요, 무슨 생각을 하지? 내일 네게 기마 사냥을 알려 줄까 하는데, 괜찮겠느냐?”
목운요가 침묵하자, 월왕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보는 눈이 많아서 그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난 사람들 눈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오늘 사람들 앞에 나선 것으로 월왕은 이미 자신의 결심을 표현했다. 신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목운요뿐이었다.
마음이 점점 복잡해진 목운요는 멍하니 뒤로 물러나다 발을 헛디뎠다.
“앗-”
그때, 월왕이 손을 뻗어 목운요를 품에 안았다. 품에 안긴 이는 가냘프고 보드라워, 조금만 힘을 줘도 품에서 바스러질 것 같았다. 하다못해 내뱉는 숨결조차도 연약했다.
“전하!”
목운요가 놀라서 소리쳤다. 자신을 받아 준 건 고마웠지만, 계속 껴안고 있는 건 정말이지…….
그제야 월왕은 조심스럽게 목운요를 놓아주었다. 조금 전 행동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흠흠, 아직 내상이 낫질 않았다…….”
목운요의 두 눈에 분노 한 가닥이 스쳐 지나갔다.
“대체 그 변명을 몇 번이나 쓰시는 겁니까?”
“크흠, 이번에는 진짜다…….”
“그럼 몸조리부터 잘하셔야겠습니다.”
막사로 돌아온 목운요는 화가 나는 한편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내려놓은 뒤, 간단히 씻고 침상에 올라 휴식을 취했다.
그날 밤에는 마음 편히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금란이 옷가지들을 잔뜩 내왔다.
“소저, 오늘은 어떤 기마복을 입으시겠어요?”
“어제 살구색을 입었으니 오늘은 자주색 기마복을 입어야겠네요.”
“네, 소저.”
목운요가 고른 기마복은 화려하지 않은 데다 색이 어두워서 어린 여자가 입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걸치니 어둡기만 하던 자줏빛이 백옥 같은 피부를 더 또렷이 보이게 했다.
금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너무 곱습니다. 어떤 색을 고르든 소저께서 걸치면 모두 아름답게 변하는 것 같아요.”
“그래 봤자 소용없어요. 지금은 금란에게 줄 돈도 없는걸요.”
작게 웃은 목운요가 채비를 마친 후 막사를 나서는데, 멀리서 곡 마마가 다가왔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곡 마마, 어쩐 일이신가요?”
“그게, 장공주께서 아끼시던 옷이 나뭇가지에 걸려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목 소저에게 옷의 수선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알겠습니다.”
장공주의 막사는 가장 중앙에 있었고, 경비가 삼엄했다.
목운요는 장공주의 막사에 도착한 후,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지길 조용히 기다렸다.
곡 마마가 잠시 아뢰더니 막사 문을 열었다.
“목 소저, 들어오십시오.”
“곡 마마가 고생이 많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장공주는 고귀한 흑적색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치마에는 금색 봉황이 수놓여 있었는데,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던지 곧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목운요가 의덕 장공주를 뵙습니다.”
목운요는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머리를 굴렸다.
장공주가 자신을 부른 건 옷의 수선 때문이 아니었다. 옷이 망가지면 사람을 시켜 똑같이 만들라고 하면 되지, 신경을 쓰며 수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어나라. 곡 마마는 자리를 안내하게.”
장공주의 표정이 나쁘지 않자 목운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감사합니다, 공주 전하.”
곡 마마는 자리를 안내한 후 뒤로 물러났다.
“내가 오늘 너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으냐?”
장공주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언뜻 담소나 나누기 위해 목운요를 부른 것 같았다.
목운요는 바로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월왕 전하 때문에 저를 부르신 겁니까?”
모르는 척하지 않는 목운요를 보고 장공주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맞다. 어제 군월은 널 도왔고, 맹 태사의 손녀를 다치게 했지. 황자의 기품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맹 태사와 적이 되었다. 난 그 행동이 현명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목운요는 침묵했다.
“목운요, 네가 소씨 가문 노부인의 외손녀기는 하지만, 군월과는 어울리는 신분이 아니다. 하나 군월이 제 체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널 도운 것을 보니 네게 꽤 진심인가 보더구나. 너는 어떠하지? 군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있느냐?”
목운요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월왕을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감정을 억누르려고 해도 도무지 억눌러지지 않았다.
“공주 전하, 제게 월왕 전하를 멀리하라고 경고하시는 겁니까?”
목운요를 살피던 장공주의 안색이 돌연 차가워졌다.
“내 뜻이 그러하다면 순순히 군월을 떠날 테냐?”
목운요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보였다. 잠시 후, 목운요는 고개를 들어 장공주를 바라봤다.
“만약 공주 전하께서 며칠 전에 제게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면 저는 공주 전하의 말씀에 수긍하여 바로 월왕 전하를 떠났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장공주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네가 떠나기 싫다고 하면, 너를 쫓아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목운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장공주를 바라봤다.
“저를 내쫓을 방법이 많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히 제안드립니다. 월왕 전하께서 저를 등지신다면 공주 전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제가 알아서 월왕 전하를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월왕 전하께서 절 등지지 않으시면 저도 먼저 전하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장공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는 고귀한 기세로 사방을 짓눌러 상대방의 마음을 두렵게 만들었다.
“잘 생각하고 하는 말이냐?”
“네.”
목운요는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분명히 어젯밤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과연 월왕과 자신 사이에 미래가 있을지 따져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장공주가 자신을 몰아붙이며 물어 오니 이상하게도 물러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선택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길이 험하더라도 온 힘을 다해 그 길을 걸어가고 싶었다.
막사에 침묵이 찾아왔다.
한참 후, 장공주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건 모르겠다만 너희 둘이 성격은 아주 잘 맞는 것 같구나.”
목운요는 의아한 표정으로 장공주를 응시했다. 그녀는 능글맞게 미소 짓고 있었다.
“왜? 내가 연인을 갈라놓는 악독한 사람인 줄 알았느냐?”
목운요는 아직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날 떠보신 건가?’
장공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앉아라. 네가 차를 아주 맛있게 우린다고 들었다. 내게 차 한 잔 우려 주지 않겠느냐?”
목운요는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그에 옆을 지키던 시녀가 즉시 다기를 내왔다.
목운요는 꼼꼼하게 손을 닦고 크게 숨을 들이켜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힌 후 탁상 뒤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섬세한 손길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막사 안에 향긋한 차 냄새가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장공주는 흡족한 얼굴을 지었다.
“차 우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목운요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대답했다.
“꾸준히 연습한 덕분입니다.”
“아무리 꾸준하게 연습한다고 해도 이 정도 경지에 오르는 건 쉽지 않다. 아무래도 넌 재주를 타고난 것 같구나. 불선루의 운영도 잘되고 있다지?”
순간 목운요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장공주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인지, 아니면 불선루의 주인이 월왕이라는 것을 알고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현재 불선루의 지점은 총 여덟 곳입니다. 장사가 잘되어서 매달 많은 이윤을 내고 있지요.”
“그럼 됐다. 시간은 충분하니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된다. 계획한 일을 차분히 진행하는 것이 멀리 보는 방법이다.”
목운요는 역시 장공주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종종 나를 찾아와 이야기나 나누자꾸나.”
월왕이 오랫동안 홀로 지내다 어렵게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났으니, 장공주는 그 상대에게 최대한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때, 문어귀에서 곡 마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 전하, 월왕 전하가 알현하고자 찾아오셨습니다. 막사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