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215화 (215/442)

215화 뱀을 좋아하나 봅니다

인영의 주인은 목운요의 앞에 멈춰 서서 햇빛을 가려 주었다. 목운요는 햇빛에 적응하기도 전에, 미간에 차가운 손끝이 닿는 것을 느꼈다.

웃음 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운요.”

잠에서 막 깨어난 목운요는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그리고 불만이 섞인 눈빛으로 월왕을 봤다.

“전하께선 어찌 사냥하러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왜 그리 피곤해해? 어젯밤에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냐?”

“막사의 위치가 좋지 않아 편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월왕은 말이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도록 말고삐를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목운요에게서 조금 떨어진 풀밭에 앉았다.

“맹씨 가문 짓이냐? 아니면 소씨 가문?”

사냥터에서 좋지 않은 막사 자리를 내주며 얕은 수작을 부리는 경우는 예부터 종종 있었다. 원래 목운요 정도의 위치라면 좋은 곳에 있는 막사를 받는 것이 정상이었다. 누군가 중간에서 훼방을 놓은 것이 분명했다.

“둘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가운 빛이 월왕의 눈에서 번쩍였다.

“난 어제 수하들과 함께 사냥터를 정리했다. 그 시각 맹씨 가문 사람이 널 괴롭혔다던데.”

‘사냥터를 정리했다고? 어쩐지 어제 보이지 않더라니.’

목운요는 옅게 웃음 지었다.

“맞습니다. 제가 완벽하게 대비했으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우스운 꼴을 보일 뻔했습니다.”

월왕의 눈빛이 더 차게 변했다. 세심한 부분까지 고려하지 못한 자신이 못마땅했다.

“사람을 보내 네 막사를 바꾸라고 하마. 우선 돌아가서 쉬어라.”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토끼 한 마리가 풀숲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토끼는 다리를 파닥거리더니 옆을 향해 달려갔다.

한데 그때, 화살 하나가 정확히 토끼를 맞혔다. 뒤이어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말에 탄 이황자 유왕이 가까이 다가왔다.

“목 소저도 있는 줄은 몰랐구려.”

“유왕 전하를 뵙습니다.”

“예는 됐소.”

“부황의 곁을 지키지 않고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월왕이 입을 열어 물었다. 말투가 온화한 것을 보니 이황자 유왕과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부황께선 고모님과 함께 계신다. 사슴 고기를 굽는다고 하는데, 무료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사냥이나 더 해서 고모님과 어머님, 동생들에게 나눠 줄 생각이다.”

유왕은 그리 말하며 월왕과 목운요를 쳐다봤다.

넷째 아우와 교제하기를 바라는 여인은 꽤 많았다. 하지만 넷째는 고행길에 오른 승려처럼 여인을 만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 그의 곁에 여인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흐음…….’

유왕의 묘한 눈길에도 목운요는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두 분께서 나눌 말씀이 있는 것 같으니, 소녀는 방해하지 않고 가 보겠습니다.”

그에 월왕도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아랫것들에게 목운요의 막사를 준비하라고 분부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 유왕은 두 눈을 더욱 빛내며 들뜬 말투로 이야기했다.

“넷째야, 기다려라. 같이 가자꾸나. 마침 나도 할 일이 없어 무료했다.”

“짐승을 몇 마리 더 사냥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급한 것도 아닌걸. 그리고 아직 가을 사냥은 며칠 더 남지 않았더냐.”

월왕은 자신의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유왕과는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기에, 그가 제 마음을 알아도 상관없었다.

월왕은 곧장 환관을 찾아가 목운요의 막사 위치를 바꾸도록 명했다.

유왕은 그런 월왕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유왕의 눈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넷째야, 평소의 너와 많이 다른 것 같구나. 이제야 생각이 트인 것이냐? 이 형님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가르쳐 줄까?”

유왕은 월왕보다 몇 개월 먼저 태어났다. 게다가 남에게 구속받는 성격도 아니어서 월왕과의 사이에도 거침이 없었다.

“아직 형님께서도 혼인하지 않으셨는데 어찌 절 가르치신다는 겁니까?”

“아직 혼인하지 않았지만, 비는 이미 정해지지 않았느냐. 할머님의 효기(孝期, 고인을 위해 효를 다하는 기간)가 지나면 혼사를 치를 예정이다. 돌아가신 할머님의 삼년상이 도움이 되긴 하는구나. 나와 네 미래의 형수가 서로를 알아가며 감정을 키워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 네 미래의 형수는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나를 사랑한단다.”

“운요는 다른 여인들과 다릅니다.”

유왕의 눈빛이 더욱 빛났다.

“빨리 말해 봐라. 운요는 어떤 아이지? 내가 옆에서 널 도우마. 그럼 넌 머지않아 미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월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 빨리 사냥이나 하러 가십시오. 부황께서 우승자에게 큰 상을 내린다고 하셨잖습니까.”

“큰형님과 셋째 못 봤어?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사냥을 하던데. 나까지 소란을 떨 생각은 없다.”

그때, 목운요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뱀 몇 마리가 목운요의 막사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월왕은 빠르게 달려가 검으로 뱀을 두 동강 낸 뒤, 옆에 있던 금위군에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주둔지 근처에 어찌 독사가 있지?”

한편 독사가 나타난 것을 보고 기뻐하던 맹언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누가 뱀 모으는 걸 좋아하나 봅니다.”

유왕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 월왕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 원래도 냉랭한 사람이 분노까지 하니 분위기만으로 사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맹언연은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어 하마터면 혓바닥을 깨물 뻔했다.

유왕은 남몰래 웃다가 앞으로 나가 입을 열었다.

“목 소저의 막사에 독사가 있으니 그곳에서 지낼 수 없겠군. 장소가 좋지 않으니 막사를 바꿔야겠소.”

목운요는 차분하게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유왕 전하.”

그렇게 막사를 떠나기 전, 목운요가 고개를 돌려 맹언연에게 한마디 했다.

“맹 소저는 뱀을 좋아하나 봅니다.”

맹언연은 등에서 이유 모를 한기를 느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러나 목운요는 그저 웃어 보인 뒤 바로 자리를 뜰 뿐이었다.

* * *

새로운 막사는 탁 트이고 환한 곳이었다. 목운요는 드디어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이미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따뜻한 횃불이 멀리서도 보였다.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한 목운요는 기분이 상쾌해졌다.

“소저, 저녁 연회가 곧 시작합니다.”

“그래, 가요.”

한데 막사를 몇 걸음 나서지도 않아 맹언연을 마주쳤다. 그녀는 손에 쥔 손수건을 홱 털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흥! 재수 없어라!”

금란은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소저……. 맹언연이 점점 도를 지나칩니다.”

그에 목운요는 입술을 말아 올렸다. 미소가 한껏 짙어졌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요.”

그때, 중앙 공터의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불의 주변에서는 음악이 연주되어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목운요가 그곳으로 향하자, 누군가 다가왔다. 길을 안내하러 온 환관이었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소저의 자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환관은 은근한 미소를 보내며 아첨했다. 유왕과 월왕이 직접 목운요의 막사를 바꿔 주려 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고생이 많습니다.”

한편, 다른 사람들보다 위쪽에 앉은 황제와 장공주는 유독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누님, 보십시오. 누군가 토끼들로 사냥감의 수를 채우는 잔꾀를 부렸군요. 여봐라, 저 토끼는 누가 잡아 온 것이냐?”

서립이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황상께 아룁니다. 이황자 유왕 전하의 사냥감입니다.”

“둘째라고?”

황제는 유왕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장에서도 무서운 것 없이 날아다니는 놈이, 어찌 온종일 토끼 몇 마리만 잡은 것이야?”

“부황, 저는 효심으로 토끼를 잡은 것입니다. 제가 잡아 온 토끼는 모두 숲속에서 가장 귀여운 것들이었습니다.”

“하하, 누님, 보십시오. 지난 이 년간 군유의 낯짝이 두꺼워질 대로 두꺼워졌습니다.”

장공주의 미소도 짙어졌다.

“효심이 깊은 아이이니, 동생이 상을 주지 않으면 제가 대신 주겠어요. 안 그래도 제게 좋은 활 하나가 있으니 그걸 군유에게 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모님. 역시 절 아껴 주시는 분은 고모님밖에 없습니다.”

아부 떨며 잘난 체하는 유왕을 보며 삼황자 진왕은 극도로 분노했다.

유왕이 호탕한 성격인 것은 모친의 신분이 높기 때문이었다. 진왕은 제 어머니도 고귀한 신분이었다면 자신이 이미 태자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 시끌벅적한 가운데, 오직 월왕만이 조용히 탁자 뒤편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그는 무리에서 소외된 것 같았다.

유왕이 재롱을 다 피우자, 황제는 사냥감이 가장 많은 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의 우승자는 누구인가?”

“황상께 아룁니다. 진왕 전하이십니다.”

황제는 진왕을 바라보며 칭찬을 건넸다.

“올해까지 합치면 진왕은 삼 년 내내 가을 사냥의 우승자인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느냐?”

진왕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겸손하게 말했다.

“모두 부황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황제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서립은 앞으로 나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무엄하다! 감히 누가 황상 앞에서 소란이냐!”

시위들의 눈빛도 번쩍였다. 그들은 비명의 근원지를 찾아 긴 창을 들고 경계를 섰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누군가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한데 소란이 인 곳에는 쉬지 않고 발을 구르는 맹언연이 있었다. 비명의 주인공은 바로 맹언연이었다.

맹우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놀란 맹언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 뱀이 있습니다. 뱀이 제 몸에서 기어 다녀요! 살려 주세요, 아버지! 어서요!”

맹우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지만, 어느 곳에도 뱀은 보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