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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208화 (208/442)

208화 황제의 진심

월왕은 술잔을 든 채 한 주루의 이 층 별실에 앉아 있었다. 분분한 논쟁 소리가 이곳에서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소씨 가문이 애초에 목 소저를 데려온 것도 결코 혈육의 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목 소저가 운영하는 하운방과 불선루 때문이었다지요. 목 소저의 사업이 날로 번창해서 견줄 데 없이 돈을 싹싹 긁어모으고 있대요.”

“목 소저가 서릉에 도착하던 날, 제가 운 좋게도 현장에서 보았지요. 배에 가득히 쌓인 선물을 내리는데, 보석이 어린애 주먹만큼 크더군요.”

“맞아요! 선물들이 아주 호화로웠지요.”

“선물이 호화로우면 뭐 합니까? 여전히 무시를 당하는데. 제가 볼 때는 그 목 소저가 잘못한 거 같습니다. 재물은 최대한 감추라는 옛말이 있지요. 목 소저가 그렇게 대놓고 재물을 보이지만 않았으면 소씨 가문의 대부인한테 탐욕이 생겼겠습니까? 거의 사람을 죽일 뻔한 걸 다행히 심 대인께서 달려와 막았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심 대인께서 빨리 오지 않으셨다면 대부인이 이십만 냥을 혼자 꿀꺽했겠네요. 이십만 냥이라니…… 난 평생 본 적도 없는데!”

월왕은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진왕을 보았다.

“형님께선 어쩐 일로 절 찾아오신 겁니까?”

진왕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마치 바깥의 떠들썩한 말소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넷째 네가 한참 동안 서릉에 오지 않다가 이번에 어렵게 오지 않았느냐?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형제끼리 모여서 우애를 다지려는 건데. 왜, 싫으냐?”

“형님은 요즘 바쁘신 줄 알았습니다.”

월왕은 들고 있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말에 뼈가 있는 듯했다.

‘소문원이 진왕부에 가서 부탁했겠지.’

“나처럼 한가한 사람이 바쁜 일이 뭐가 있겠어? 그나저나 보화사에서 목운요의 모친을 구해 주었다지?”

“별일 아닙니다.”

가늘게 뜬 진왕의 눈에 번쩍 빛이 스쳤다.

“넷째 네가 이토록 정의로웠을 줄이야. 다만 너는 고귀한 황자인데, 위험한 일에 함부로 뛰어들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겠느냐?”

월왕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말이 나올 것이 있겠습니까?”

“정의감으로 소 부인을 구했느냐? 아니면 미인이 상심할 것을 염려해서 그런 것이냐?”

진왕은 미소를 띤 채 월왕을 바라보았다. 웃음기를 머금은 눈에는 월왕을 떠보는 듯한 예리함이 섞여 있었다.

월왕은 손에 쥔 술잔을 뱅글뱅글 돌렸다. 그를 감싼 기운이 된서리처럼 차가워졌다.

“형님도 참,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진왕은 별안간 활짝 웃었다.

“이런, 나 좀 봐라. 괜히 술맛을 떨어지게 했구먼. 자, 내가 한 잔 올리마.”

“송구합니다만, 등에 아직 상처가 있는지라 태의가 과음은 좋지 않다고 당부했습니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 주시며 사과하시죠.”

진왕은 살짝 멈칫했으나 이내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경솔했구나. 그럼 차를 올리라 하마. 차로 술을 대신하는 것은 괜찮겠지?”

밖에선 여전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씨 가문에 대해 떠들어 댔다.

“생각해 봐. 왕 노파와 유 노파에게 소씨 가문 외손녀에게 마수를 뻗치라고 지시한 사람이 누구겠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네들 예전에 못 봤어? 왕 노파의 아들에게 은자 일백 냥을 준 것이 노부인 곁에서 시중드는 계집이었잖나? 그런데도 노부인과 관계가 없다고?”

“소씨 가문 말이지, 참으로 악랄해. 아무리 목 낭자의 사업을 빼앗고 싶대도 좀 신중할 것이지. 어찌 목 낭자가 가문에 들어가자마자 손을 댈 수가 있어?”

“그야말로 적반하장 아니겠어? 예전에 일어났던 갈등도 맹씨 가문의 적녀가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완전히 목 낭자한테 덮어씌웠잖나? 아주 악질이야…….”

“그나저나 맹씨 가문의 적녀는 어찌 누명을 씌웠대?”

“워낙 제멋대로 구는 성정이잖나?”

* * *

소식은 황궁에까지 전해졌다, 황제는 곧바로 심병괴의 청을 윤허하여 그에게 책임지고 이 사건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누님, 소씨 가문이 정말 그리 경중을 모를까요?”

심병괴를 만난 후 황제는 옥화궁으로 와 장공주를 찾았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며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장공주는 살포시 바둑알을 놓았다.

“서릉에선 하루가 멀다고 큰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소씨 가문은 지금껏 순조롭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죠.”

장공주에게는 소씨 가문이 지금까지 너무 잘해 온 것이 되레 가식처럼 느껴졌다.

“소문원은 본래 일을 처리할 때 매사에 신중했는데, 근래 점점 셋째 편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사도 정무에 두지 않는 듯하고요.”

황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관리들은 자신들이 배후에서 꾸미는 짓거리를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황궁에 드나드는 조정의 관리들이 몇 되지도 않는데, 어찌 못 알아차린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쯧.’

장공주는 말없이 웃으며 온 신경을 바둑판에 둔 양 말했다.

“황상, 또 한눈을 팔면 지겠어요.”

황제는 황급히 바둑판을 보았다. 검은 알이 흰 알에 자리를 빼앗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짐은 바둑엔 소질이 없는 듯합니다. 누님께서도 제겐 재능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리 오래전 일을 아직도 기억합니까?”

“물론 똑똑히 기억합니다. 누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바둑인걸요.”

“그런데 어찌 내가 황상께 담력과 지혜를 모두 겸비하고 안목도 원대하시다고 한 건 기억하지 못합니까?”

장공주가 바둑알을 거두며 빙그레 웃었다.

바둑알을 대신 주워 주는 황제의 안색이 사뭇 진지해졌다.

“누님, 넷째는 이번에 월서로 돌아갈 계획이 없답니까?”

장공주는 잠시 멈칫했다가 황제를 올려다보며 짧게 탄식했다.

“군월은 그 추운 곳에 오래 있었잖습니까. 서릉에 남아 복을 누릴 때도 되었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님은 제 심중의 고초를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매번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유아가 떠오릅니다. 그때의 일은 늘 유아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장공주가 황제의 손을 붙잡았다.

“부군 된 사람으로서는 잘못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황상은 그저 한 여인의 부군이 아닌 한 나라의 제왕입니다. 유아 또한 황상을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황제의 눈에 절로 물기가 서렸다. 이미 이십 년이 더 된 일이나, 황후를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미어졌다. 양심의 가책 또한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쌓여 군월을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다만 군월 그 아이는 너무 가련하지 않습니까? 오랜 시간 월서로 쫓겨나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니 이제는…….”

“누님의 뜻은 잘 압니다. 하지만 군월을 볼 때마다 유아가 생각나서 마음속에 누가 불을 지른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하며 오장육부가 다 타 버릴 것만 같습니다. 가슴이 끊임없이 아파서 그 아이를 볼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 누님께서 저 대신 그 아이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

장공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도 이제 나이를 먹었어요. 전력을 다해 앞을 내다봐도 몇 년이나 더 버틸지 모르니, 난 그저 황상이 후회하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

“누님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누님이 안 계셨다면 답답해서 제 속이 터져 버렸을 겁니다.”

장공주는 황제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어서 눈물을 닦으세요. 늘그막에 우스운 꼴은 보이지 맙시다.”

손수건을 받아 든 황제는 한참 후에야 마음을 가라앉혔다.

“소씨 가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들을 꾸짖으면서 조정의 다른 신하들에게도 경고할 참입니다. 짐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새로운 주인을 찾아 줄을 설 생각은 넣어 두라고 말입니다.”

장공주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한 판 더 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누님께서 세 수 물려 주시지요…….”

* * *

황상께서 심병괴에게 소씨 가문의 조사를 맡겼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심병괴는 비록 동료들에게는 ‘심 고집’이라고 불렸지만, 백성들에게는 청렴한 관리였다. 이미 백성을 도와 많은 사건을 해결한 바 있었기에 백성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

하지만 이번 일은 심병괴에게도 쉬운 사건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증거가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다. 유일한 실마리는 왕주가 가진 목패뿐이었는데, 일전에 소문원은 소씨 가문에서 분실된 목패는 없다고 단언했다.

심병괴가 소씨 가문으로 찾아가 목패에 관해 묻자, 집안을 관리할 권한을 넘겨받은 이부인이 직접 관가를 불러왔다.

“목패는 하인들의 외출을 돕고 확인하기 위한 물건이므로, 보통 관가들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조사가 필요하다면 관가 신보(申甫)에게 바로 말씀하시지요.”

심병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보, 소씨 가문에선 정말 목패를 잃어버린 적이 없소?”

“잃어버린 적은 없으며, 현재 반납되지 않은 목패는 세 장이 있습니다. 그중 두 장은 기주성(蕲州城)의 사업을 확인하러 간 관가들이 가져갔고, 한 장은 며칠 전에 대부인께서 공무 때문에 파견하신 순오(旬五)의 손에 있습니다. 나머지 목패는 모두 여기 있습니다.”

목패가 담긴 쟁반을 바라보던 심병괴의 눈빛이 돌연 날카롭게 변했다. 심병괴가 가져온 반쪽짜리 목패를 쟁반 위에 올려놓으니, 순오의 이름이 적힌 목패 반쪽과 짝이 맞았다.

관가의 안색이 삽시간에 변했다. 옆에 있던 이부인 또한 질겁했다. 심병괴가 입을 열 필요도 없이, 이부인이 먼저 관가에게 물었다.

“대부인께선 무슨 일로 순오를 내보내셨는가?”

“그것은 소인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순오가 목패를 가지고 나간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목패를 가져간 후에 순오가 소씨 가문에 돌아왔는가?”

관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 후로 순오를 본 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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