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이 집에서 나가겠습니다
목운요는 손에 든 상자를 심병괴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심 대인, 한번 소상히 봐주시겠습니까?”
심병괴는 상자를 받아 들고 내용물을 살펴보더니 미간을 힘껏 찌푸렸다.
“온통 폐지뿐이군요.”
“그럴 리가요!”
대부인이 놀라 소리치고는 황급히 목함을 살펴보았다. 가장자리 먹이 흐릿하게 번져서 돈의 액수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가짜 돈이었다!
“저는 목함을 받고 나서 건드린 적도 없습니다. 애초에 가짜 돈을 보낸 거겠지요!”
목운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운방과 불선루에서 사용하는 은표들은 모두 창화(昌和) 표호(票号, 환 업무를 하는 상업 금융 기관)에서 발행한 겁니다. 그곳에 증서도 있으니 가짜일 수가 없지요…….”
대부인은 몹시 당황했다.
“그게 뭐가 대수냐! 네가 고의로 가짜 은표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 어린 것이 이렇게 독한 술수를 쓰다니!”
“저는 요 며칠 동안 계속 보화사에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소씨 가문 제월각에만 있었고요. 그런 제가 어떤 능력이 있어서 은표를 위조하고 숙모를 모함했다는 말씀입니까?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셨습니다.”
대부인이 소문원을 돌아보며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대인, 저는 이 상자를 받고 나서 건드린 적도 없습니다. 안에 들어 있는 은표가 어찌 생겼는지도 몰랐어요. 필시 목운요가 절 모함하려는 겁니다!”
목운요는 낯설다는 눈빛으로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오늘 대부인의 참모습을 알아 버렸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무릇 은표 같은 귀중품을 보낼 때엔 상자를 포장하고 나서 가장자리에 밀랍을 녹여 봉하게 합니다. 그런데 대부인께서 열어 보지 않으셨다면 상자를 봉한 밀랍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내가 어찌 아느냐? 원래 받을 때부터 이런 상태였어!”
“거짓말입니다! 쿨럭, 쿨럭…….”
흥분한 운춘은 몇 번 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제가 상자를 전해 드렸을 땐 밀랍으로 완전히 봉해져 있었습니다. 뜯어보신 게 분명합니다.”
목운요는 몹시 실망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춘아, 더 말하지 말아라. 이십만 냥은…… 됐습니다. 애초에 없었던 셈 치죠, 뭐. 서릉에 하운방과 불선루를 여는 것을 몇 달 미루면 그뿐입니다. 그보다 전 어머니와 떠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세요.”
“그건 안 된다. 우선 이 일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지. 네가 이렇게 얼버무려 버리면 공연히 내가 오명을 쓰게 되지 않느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태 고집을 부리십니까? 심 대인께서 외숙부보다 품계가 한 단계 낮으시고, 황제 폐하의 특명이 없으면 이 일을 조사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신 거겠지요. 그럼 저희가 큰외숙모의 방을 뒤져봐도 괜찮으십니까?”
“좋다. 내 결백함만 증명할 수 있다면 뭐가 문제겠느냐?”
소문원은 대부인의 완강한 표정을 보자 내심 마음이 놓였다. 곤장 일은 해명할 길이 없었지만 이십만 냥을 훔쳤다는 죄명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대부인은 정말로 은표를 건드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 많은 은표가 공연히 집 안에서 튀어나올 리 만무했으니 수색이 두렵지 않았다.
“부인 말이 맞소. 소씨 가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마당까지 샅샅이 뒤지는 게 낫겠습니다. 마침 심 대인께서 현장에 계시니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심병괴는 살짝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건 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소문원이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제가 내뱉은 말이니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심 대인을 곤란에 빠트리진 않을 겁니다. 황상께서 물어보시면 제가 가서 소상히 설명하겠습니다.”
심병괴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대체 이십만 냥이 어디로 사라진 건지 궁금한 참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증인으로서 지켜보겠습니다.”
대부인은 차가운 눈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운요야, 네 곁에 있는 시녀들을 시켜서 찾아보면 되겠구나.”
목운요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연루된 일이니 의심받을 일은 피해야죠.”
심병괴가 속으로 찬탄해 마지않았다.
“대단하군요. 목 소저께선 이치에 아주 밝으십니다.”
아직 어린 소녀가 예의범절도 철두철미한 데다, 참혹한 술수를 당하고도 소란을 벌이기는커녕 비통함을 삼키고 있었다. 저런 기개와 도량은 어떤 권세가라 하더라도 쉽게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이제 자식을 낳기 어렵게 됐으니 참으로 애석하구나…….’
심병괴가 데려온 사람들은 남정네들인지라 대부인의 방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서원에 있는 하녀들을 불러 수색하도록 하고 순천부의 사람들이 옆에서 이를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인의 방을 모두 수색했지만 은표는 발견되지 않았다.
대부인은 차갑게 웃었다.
“목운요, 이제야 믿겠느냐?”
그때, 금란이 옆에서 불만을 내비쳤다.
“대부인께서 다른 곳에 은표를 숨기시지 않았는지 어찌 압니까?”
“금란, 그 입 다물어요.”
목운요가 고개를 돌려 금란을 호되게 꾸짖었다.
“큰외숙모, 정말 송구합니다.”
그에 금란이 마지못해 나아가 예를 올렸다.
“소인이 입을 함부로 놀렸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하……. 좋다. 내 방을 수색했으니 이렇게 된 김에 동원까지 수색해 보아라. 나는 양심에 찔리는 게 없으니 소인배의 소란 따위 무섭지 않다!”
대부인은 곧장 시녀와 노파들에게 명했다.
“계속해서 수색해라. 순천부에서도 옆에서 잘 지켜봐 주십시오.”
동원은 넓어서 빨리 뒤지기가 힘들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시녀가 와서 물었다.
“대부인, 창고도 열어 볼까요?”
창고 안에 남이 보아서는 안 될 물건은 없었기에 대부인은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마마, 내 방에서 열쇠를 가지고 와서 수색할 수 있도록 하게.”
일각쯤 지나자 순천부 관리가 은표 한 무더기를 들고 왔다.
“심 대인, 찾았습니다!”
대부인은 날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아찔해져서 몸을 휘청거렸다.
“뭐…… 뭐라고요? 뭘 찾았다는 겁니까?”
소문원도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은표 무더기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분명 창화 표호에서 발행한 한 장당 천 냥짜리 은표였다.
대부인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 실성한 표정으로 가서 은표를 쥐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이 은표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심병괴도 놀라서 관리를 쳐다봤다. 대부인의 태도가 너무 침착하고 당당해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생각하던 차였다.
“은표는 모두 한 상자에서 나왔고, 상자는 비단 아래 아주 은밀히 숨겨져 있었습니다.”
관리가 상자를 들고 다가오자, 금란이 놀라 소리쳤다.
“저 상자는……!”
심병괴가 금란에게 물었다.
“저 상자를 아시오?”
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상자는 소저께서 소씨 가문에 오실 적에 대부인께 드린 선물입니다. 소저께서 세심하게 준비하신 선물이어서 소인이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상자 안에는 순금 머리 장식과 홍옥 장신구가 달린 휘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몇천 냥을 주고 구매한 귀중한 물건들이었습니다.”
대부인 맹 씨는 고개를 돌려 목운요를 노려봤다. 그 눈빛은 마치 상대를 죽일 수도 있을 것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목운요, 넌 날 모함했다. 이 은표는 네가 사전에 준비해서 상자 안에 숨겨 둔 것이겠지. 오늘 나를 욕보이게 만들려고 말이다!”
“어찌하여 저를 그렇게 몰아가십니까?”
목운요는 멈췄던 눈물을 다시 흘렸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저와 어머니는 의지할 곳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와 제게 친척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너무 기뻐서 며칠 밤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큰외숙모께서 기뻐하시기만을 바라며 심혈을 기울여 선물을 고르고 골랐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까지 저를 미워하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대부인은 목운요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목운요는 겉으로는 유약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아주 더러운 꿍꿍이를 꾀했다. 대부인 자신도 막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계집이었다.
‘이 음흉한 년이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목운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부인을 쳐다보더니,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제가 드린 상자에서 은표가 나왔으니, 제가 고의로 은표를 숨겼다는 말씀입니까? 그 논리대로라면 저도 보화사에서 발생한 큰 화재가 우의 언니의 짓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저와 어머니를 불태워 죽여 저희의 재물을 빼앗으려 한 것 아닌가요? 불이 났을 때 언니도 방에 있었으나 언니는 무사히 방에서 탈출했고, 저희 어머니는 명을 달리하실 뻔했으니까요.”
“웃기지 마!”
대 부인이 성난 목소리로 반박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목운요의 얼굴에도 슬픔과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옷을 짓고 좋은 찻잎을 팔아 벌어들인 것이죠. 한 푼도 쉽게 얻은 것이 없단 말입니다.”
목운요가 눈물을 닦았다. 그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도 쓰리게 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서릉에 오기 전, 선물을 구매할 돈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경릉성의 염운사 이 대인께 드리고 왔습니다. 경릉성의 백성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때 저는 모든 돈을 기부하고 수중에 한 푼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어디서 이십 만 냥을 가져와 큰외숙모를 모함했겠습니까?”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네가 경릉성의 백성들에게 십만 냥을 내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은표를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짧은 시일 내에 이십만 냥을 벌어들였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하운방 점포만 열두 곳에, 불선루 점포 여덟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익이 적지 않은 편입니다. 모든 지역 하운방과 불선루의 장부를 모아서 보여 드릴 테니 소상히 조사해 보시지요.”
대부인은 당황하여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분명히 모두 목운요의 계략일 텐데, 아무리 해명해도 믿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