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사람을 홀리는 돈
대부인은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운요는 아마 내일이나 되어야 돌아올 거요. 멀리 경릉성에서 찾아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소씨 가문에서 묵고 가도 좋소.”
운춘은 몹시 기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인.”
“제 마마, 손님을 방까지 잘 모셔다드려요.”
“네.”
제 마마가 운춘을 데리고 나간 후, 대부인은 운춘에게 건네받은 목함을 쳐다보았다. 일전에 소청오에게 하운방과 불선루의 세력이 대단하다고는 들었으나, 대부인은 믿지 않고 있었다.
‘서릉에는 잘나가는 자수방과 찻집이 부기지수라, 그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큰돈을 벌어들이는 데엔 분명히 한계가 있겠지.’
대부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슬며시 목함을 열었다. 목함 안에 가지런히 정리된 은표를 본 대부인의 두 눈이 커졌다. 한 장을 들어 살펴보니 천 냥짜리 은표였다. 놀란 그녀는 은표 뭉텅이를 세었다.
무려 이십만 냥이었다.
은표를 쥔 대부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고, 두 눈은 갈 곳을 잃고 일렁였다. 분명히 목운요는 경릉성에 십만 냥을 기부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이십만 냥을 벌어들인 것이었다.
어쩌면 소청오는 목운요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라 과소평가한 것일지도 몰랐다. 계속 이런 속도로 돈을 벌어들인다면 하운방과 불선루는 그야말로 돈을 긁어모으는 황금 곡괭이가 아닌가!
“어머니, 뭘 보고 계십니까?”
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던 소우의는 흥분한 대부인의 안색을 보고 물었다.
대부인은 손에 들고 있던 은표를 급히 목함 안에 넣었다. 얼마나 급하게 넣었는지 상자는 ‘탕’ 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애써 표정을 관리한 대부인이 다소 냉랭한 말투로 소우의에게 물었다.
“웬일이냐? 어찌 기별도 없이 찾아왔어?”
소우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머니를 뵈러 왔는데, 문어귀에 제 마마가 없어서 미리 아뢰지 못했어요.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
대부인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감정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냉정을 되찾았다.
“아니다. 목운요를 생각하던 차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괜히 너를 쏘아붙였구나. 어서 앉으렴. 다친 팔은 아직도 많이 아프니?”
“의원이 처방해 준 약의 효능이 꽤 좋은지, 이제 많이 아프지는 않아요.”
소우의는 대부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대부인이 쥐고 있는 목함에 가 있었다.
“아, 이건 별것 아니다. 하인이 보내온 물건이야. 그나저나 목운요는 이 어미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마음 푹 놓고 몸조리에 집중하도록 해.”
“네, 어머니.”
소우의가 물러간 후, 대부인은 다시 목함을 열어 손가락으로 은표를 살살 어루만졌다.
남편 소문원은 진왕과 가까워지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그와의 관계를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쏟아부었다.
예전에는 춘수방이 있어서 적게나마 매년 이익을 남겼지만, 춘수방이 문을 닫은 지 어언 일 년이 넘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소씨 가문 소유의 점포와 건물에서 벌어들인 수입만으로는 수지를 맞추기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올해는 삼황자 진왕과 대황자 릉왕의 세력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소문원이 보내야 할 새해 선물 부담도 커졌다. 새로운 수입이 생기지 않는다면 분명 새해엔 재정난에 시달릴 게 뻔했다.
“이십만 냥이라…….”
대부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약 이렇게 큰돈인 줄 알았더라면 운춘을 직접 만나지 않고 제 마마에게 물건을 받아 오라고 명해서 돈을 뒤로 빼돌렸을 것이다. 그럼 누가 돈의 행방을 물어도 손쉽게 다른 이에게 누명을 덮어씌울 수 있었을 테고, 정 방법이 없으면 제 마마를 희생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대부인 자신이 직접 운춘을 만나 돈을 전달받았다. 그 돈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려면 조금 더 머리를 굴릴 필요가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목운요는 새벽같이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했다. 가져온 물건이 많지 않아서 챙겨야 할 것도 별로 없었다. 그녀는 간단히 짐을 싼 후, 마차를 타고 곧장 보화사를 떠났다.
한편 목운요와 소청을 기다리던 월왕은, 아무리 기다려도 두 사람이 찾아오지 않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는 상황을 알아보라고 우항을 보낸 후에야 모녀가 보화사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항은 순간 차갑게 변한 월왕의 안색을 살피며 불안에 떨었다.
“지금 보화사에 보는 눈이 많아 목 소저도 인사를 올리기 어려웠을 겁니다…….”
월왕은 한숨을 내뱉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우리가 보화사에 온 지도 꽤 되었구나. 물건을 챙겨라. 고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우리도 돌아가자.”
“네, 알겠습니다.”
* * *
마차가 소씨 가문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제 마마가 하인들과 함께 소청과 목운요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운요가 소청을 부축하며 마차에서 내리자, 제 마마가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소 부인과 목 소저를 뵙습니다. 동원에서 대부인이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소청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지만, 목운요는 오히려 웃음을 보였다.
“큰외숙모께서 이리 다급하게 저와 어머니를 부르시다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우선 짐을 내려놓고 오겠습니다.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요.”
“목 소저, 대부인께선 바쁘신 분입니다. 소저가 치장하고 환복하는 것까지 기다려 주실 정도로 한가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그냥 따라오십시오. 저희가 부인과 소저를 끌고 가면 꼴사납지 않겠습니까.”
제 마마의 두 눈에는 분노와 악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 대한 원한이 대단한 듯 보였다.
목운요는 제 마마 뒤에 서 있는 시녀와 노파들을 보며 말했다.
“제 마마를 따라 동원으로 향하지 않으면 저를 포박해서 대부인 앞까지 끌고 갈 기세군요.”
제 마마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거짓 웃음을 지었다.
“미천한 상것인 저희가 소저를 포박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그저 대부인의 명을 받드는 것뿐입니다.”
“표정은 저를 포박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요?”
“소저, 왜 여기서 저와 시간 낭비를 하시는 겁니까? 어쨌든 대부인을 뵈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서 가시지요.”
목운요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요. 출발하죠.”
제 마마는 팔을 들어 뒤따르려는 사금과 사기 등을 막았다.
“대부인께선 소 부인과 목 소저만 보자고 하신 것이니, 하인들은 따라갈 필요 없다.”
“소인들은 부인과 소저의 명만 따릅니다. 그러니 제 마마께선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무엄하구나!”
제 마마는 뒤의 하인들에게 사금 등을 막아 세우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사금이 왼손으로 제 마마의 손목을 붙잡고 오른팔 팔꿈치를 제 마마의 목에 가져다 댔다.
“제 마마,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그 빠른 손동작에 제 마마는 몸이 오들오들 떨려 왔다. 이것들은 큰 아가씨께도 손찌검을 했으니, 자신 같은 노비 하나 건드리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여, 여긴 소씨 가문이다!”
그에 사금은 옅게 웃었다.
“여기가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노비라면 함부로 주인들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죠. 제 마마도 이런 이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마마는 속으로 분노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망할 것, 목운요를 믿고 나를 무시하는구나. 그래! 우쭐댈 수 있을 때 우쭐대라! 대부인께서 목운요를 손보시면 그다음은 너희 차례다!’
“사금, 그만 손을 놓으렴.”
목운요의 말에 그제야 사금은 손에서 힘을 푼 뒤, 목운요의 뒤를 따라 동원으로 향했다.
목운요가 소청과 함께 안뜰에 들어서자,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대부인 맹 씨가 보였다. 수많은 하인들은 숨을 죽이고 고개를 떨군 채 대부인의 명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큰외숙모를 뵙습니다. 어머니께선 보화사에서 불이 났을 때 목을 다치시는 바람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터라 제가 대신 인사 올리오니, 부디 어머니를 책망하지 마십시오.”
목운요의 인사에 대부인 맹 씨는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여봐라! 목운요를 포박해라!”
“네, 대부인.”
주위에 있던 하녀들이 목운요를 삽시간에 둘러쌌다.
소청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목운요의 손을 꽉 잡으며 앞으로 나가 딸을 보호했다. 대부인을 향해 부디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사정하고 싶었으나, 이렇게 악독한 사람이라면 무릎을 꿇고 애원해도 돌아오는 것은 경멸과 조롱뿐일 터였다.
그때, 목운요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사람들에게 명을 내렸다.
“시작해.”
“네, 소저.”
사금을 포함한 네 시녀는 목운요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몸을 움직였다. 사실 그녀들은 모두 철저히 훈련받은 암살자들이었다. 지금은 사람을 죽여 소란을 만들 수 없으니 무기 대신 권법을 사용해야 했지만, 손짓 몇 번으로도 하인들에게 겁을 주기엔 충분했다.
하인들은 네 사람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바닥으로 나자빠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간혹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바닥에 나뒹굴며 울부짖었다.
대부인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얼이 빠졌다가, 이내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오싹해졌다.
“목운요, 네가 간덩이가 부었구나!”
목운요는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어머니를 앉힌 후에야 대부인을 쳐다봤다.
“큰외숙모, 우린 다 같은 소씨 가문 사람입니다.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로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나오면 가족 간의 정만 상할 텐데요.”
“가족 간의 정? 우의는 널 좋은 동생이라고 생각하며 아꼈는데, 넌 그런 우의를 죽이려고 했다. 가족 간의 정을 먼저 저버린 건 네가 아니더냐?”
목운요는 웃으며 소우의를 바라봤다.
“우의 언니, 언니의 팔은 언니가 조심하지 않은 바람에 부러진 거잖아요? 대부인께선 그걸 왜 저 때문이라고 하시는 거죠?”
호선을 그리는 목운요의 입 모양은 소우의의 팔을 부러뜨리던 그날 밤의 모양새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