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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197화 (197/442)

197화 사람을 죽이고 싶습니다

장공주는 월왕의 단호한 얼굴을 보며 근심이 더욱더 깊어졌다.

“너……. 아니다. 이다지도 깊은 네 정이 헛되지 않다면 그걸로 된 거지.”

그때, 곡 마마가 걸어 나왔다.

“장공주 전하, 목 소저가 왔습니다. 월왕 전하를 뵈러 왔다고 합니다.”

월왕은 눈을 환하게 빛냈다. 온몸에서 풍기는 색채가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듯했다.

그 모습에 장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널 보러 왔다고 하니 방해하지 않으마. 며칠 후면 가을 사냥이니 상처를 얼른 회복하고 사냥터에서 좋은 모피를 얻어 두어라. 내 서릉에서 새해를 맞이할 생각이니 외투나 몇 벌 만들어다오.”

월왕은 일어서서 인사를 올렸다.

“운요의 솜씨가 상당히 좋습니다. 어떤 옷이든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만들어 내지요.”

장공주는 그를 흘겨보며 나중에 얘기하자는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

장공주가 떠나고 얼마 뒤, 우항이 목운요를 배웅 나갔다.

“목 소저, 주군께서 이제 막 깨어나셨습니다. 소인을 따라오시지요.”

“네.”

우항은 목운요를 문 앞까지 안내하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목운요는 뒤따라오던 사서에게 찬합을 건네받고는 입을 열었다.

“넌 문 앞에서 기다리렴.”

“네, 소저.”

방으로 들어간 목운요는 침상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월왕을 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괴로운지 그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검은 옷이 그의 얼굴을 한결 더 창백해 보이게 했다.

“운요, 왔느냐?”

월왕은 천천히 눈을 떴다. 빛나는 두 눈이 갓 떠오른 아침 햇살처럼 유난히 눈부셨다.

목운요는 그를 어찌 대해야 좋을지 난처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월왕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라는 큰 변수는 종잡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목운요를 보며 월왕은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느냐? 아직도 화재 때문에 무서운 것이냐?”

목운요는 그제야 정신을 되찾았다.

“어제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월왕은 미소 지었다.

“부인께서 위험에 처하셨으니 당연히 전력을 다해 구해야지.”

“다친 곳은 어떠십니까?”

저를 부드럽게 바라보는 눈길에 긴장하여 목운요는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월왕이 눈을 내리깔자 안색이 더 창백해 보였다.

“괜찮다. 찰과상 정도라 며칠 푹 쉬면 다 나을 거다. 다만 산중인지라 의원과 약재가 부족하여 사실 좀 불편하긴 해.”

목운요는 잠시 망설이다가 월왕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야,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목운요가 급작스레 호칭을 바꾸자, 월왕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자신을 ‘사야’라고 불러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단지 소청을 구해 준 은혜 때문에 그러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상처는 등에 있다. 나올 때 떨어지는 나무에 등을 맞았거든.”

목운요는 혀끝을 살짝 깨물고 다가가 월왕의 옷깃을 쥐고 천천히 끌어 내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옷을 벗겨 내자 피비린내가 짙어졌다. 월왕의 탄탄한 등에 자리 잡은 화상 자국은 꽤 심각했다. 상처 부위에선 자그마한 수포가 올라와 피와 살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목운요는 손끝을 달달 떨었다. 심장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아렸다.

‘이렇게 심각했다니…….’

“그리 심각하지 않다. 며칠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목운요의 마음속에는 파도가 용솟음쳤다.

지난번 월왕이 소금 실은 배를 두 동강 낼 때도 심하게 다쳐서 상처를 수습해 주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슴이 아팠다…….

목운요가 상처 주변을 살짝 건드리자 월왕이 숨을 훅 들이켰다. 목운요는 놀라서 황급히 손가락을 거두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월왕은 비단 이불 위에 두었던 손을 말아쥐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귓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

“상처에 바르는 약을 가져왔으니 발라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근래 날씨가 서늘해서 금방 나을 거예요.”

목운요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드럽고 민첩한 손길로 상처 부위를 수습했다.

사실 월왕은 제 몸의 상처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온 신경이 목운요의 손끝에 가 있었다. 산들바람이 쓸고 지나간 듯, 부드러운 손길이 지나간 곳이 저릿하면서도 간지러웠다.

상처 난 곳을 다 수습하고 나서야 목운요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월왕의 겉옷을 덮어 주었다.

“며칠만 참으세요. 상처 부위에 물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시면 가을 사냥 전에 나을 겁니다.”

창백하던 월왕의 얼굴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에 목운요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월왕의 이마를 짚었다.

“혹 열이 나십니까?”

이마가 상당히 뜨거운 듯했다. 목운요는 얼른 월왕의 손목을 쥐고 꼼꼼히 맥박을 짚어 보았다.

“부상으로 인한 열인가 봐요. 이따가 처방전을 써 드리겠습니다.”

월왕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불편함을 최대한 억눌렀다.

“소 부인은 어떠시지? 부상이 심각하신가?”

다친 소청을 떠올리자, 목운요는 금세 침울해졌다.

“다리를 삐신 건 심각하지 않은데, 연기를 드신 터라 한동안은 푹 쉬셔야 할 듯합니다.”

“우항에게 불이 난 곁채를 살펴보라고 했는데,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 뜻밖의 상황이 우연치곤 너무 기가 막히는구나.”

“소우의와 제 마마의 짓입니다.”

일전에 맹언연이 목운요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었던 소씨 가문이 떠올라 월왕은 차가운 한숨을 내쉬었다.

“소씨 가문은 어째서 너를 괴롭히는 것일까? 이번에는 너와 소 부인을 죽이려고까지 했지. 혹 이상한 점을 감지하진 못했느냐?”

“저도 그 점이 이상합니다. 소씨 가문은 마치 저와 어머니께 깊은 원한이 있는 것처럼 굴거든요.”

목운요는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지금은 상황에 맞게 대책을 취하는 수밖에 없어요. 가만히 죽기만 기다릴 순 없을 터. 누구의 수단이 더 뛰어난지 겨뤄 봐야지요.”

“내가 도울 것이 있느냐?”

목운요는 호흡을 가라앉히며 월왕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부드러움과 염려가 또렷이 보였다. 이에 그녀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거리를 유지했을 테지만, 월왕은 다름 아닌 어머니를 구해 준 인물이었다. 전과 똑같이 대한다면 배은망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목운요는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맑고 투명한 두 눈에 갈등과 당혹스러움이 뒤엉켜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이 들게 했다.

월왕은 그런 모습에 매료되기라도 한 듯 천천히 손을 들어 엄지로 느릿하게 목운요의 눈가를 쓸었다. 그녀의 몸이 살짝 경직되었다.

그러자 월왕은 금세 손을 거두었다. 웃고 있었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담긴 얼굴이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된다. 소 부인은 내가 원해서 구해 드렸다. 난 결코 은혜로 네게 무언가를 얻고 싶지 않아.”

아래로 내리깐 목운요의 눈빛이 빠르게 변했다. 그녀는 자신을 휘감는 모든 감정을 억지로 눌렀다.

“이번엔 월서로 돌아가지 않으시나요?”

월왕은 목운요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돌아가지 않을 계획이다.”

“서릉에 쓸 수 있는 사람이 넉넉히 있습니까?”

목운요가 고개를 들어 월왕을 똑바로 바라봤다. 긴장하면서도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순간 월왕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의 모습이 마치 인간에게 상처받은 고양이가 조심스럽게 앞발을 들어 선의의 대답을 얻을 수 있는지 떠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목운요가 겁먹은 채 내민 앞발을 거두지 않도록 일부러 목소리를 억눌러 한층 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조금 부족하다.”

그에 목운요는 어떤 결심을 내린 건지 말을 이어 갔다.

“그럼 은자를 벌 인력이 부족하시겠네요? 일전에 경릉성에서 벌어 둔 은자는 그간 많이 쓰셨을 테고. 제가 사야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도록 돕는 건 어떻습니까?”

“어떤 보답을 받고 싶으냐?”

“사야께서도 보셨다시피 소씨 가문은 저희를 원수로 보고, 심지어 눈엣가시처럼 어떻게든 뽑아내려고 합니다. 저와 어머니 두 사람의 힘으론 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은자를 벌어 드릴 테니, 사야께선 저희를 지켜 주세요.”

월왕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은자를 벌어다 주지 않는다고 해도 난 너와 소 부인의 안전을 지킬 테니 다른 걸 제안해 보아라.”

“사람을 죽이고 싶습니다. 그들은 사야의 부하들인데, 허락하시겠어요?”

월왕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당혹스러운 투로 되물었다.

“내 부하를?”

“네. 허락하시겠습니까?”

월왕을 바라보는 목운요의 눈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간 함께 지내면서 월왕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회귀 전 월왕부에서 처참하게 죽은 응어리는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자신의 죽음에 월왕이 직접 개입하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월왕의 부하가 한 짓이 아닌가.

목운요는 자기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미래가 고통스러울 수도 있으나 월왕이 따라 주기만 한다면 이전의 생을 잊어 보고자 했다.

다만, 월왕이 과연 이토록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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