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96화 (196/442)

196화 허점투성이

소청오는 목운요를 빤히 응시하다 한참 후에야 시선을 거두었다.

“보화사에 큰불이 났고, 우의도 다쳐서 이번 기도는 오늘로 끝내야겠소. 채비를 마치면 가문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목운요는 살짝 도리질을 쳤다.

“공주 전하께 필사해 드리기로 한 불경을 완성하지 못해서 저는 며칠 더 머물러야 합니다. 오라버니는 언니와 먼저 돌아가세요. 저는 필사를 마치면 어머니와 함께 돌아갈게요.”

소청오는 잠시 침묵하다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목운요는 헛웃음을 쳤다.

‘소청오가 몇 마디만 하고 돌아설 줄이야. 이렇게 쉽게 물러나는 건 소씨 가문의 태도가 아닌데. 설마 내가 돌아가면 한꺼번에 갚아 주겠다는 심보인가?’

그때, 사화가 탕약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소저, 부인의 탕약을 달여 왔습니다.”

“이리 다오.”

방으로 들어가니 마침 소청이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소청은 목운요를 부르려 입을 열었으나 목이 심하게 아파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연기에 목이 상했으니 며칠은 더 몸조리하셔야 해요. 우선 탕약부터 드세요.”

소청은 목을 슬쩍 문지르다 고개를 끄덕인 후 탕약을 건네받아 천천히 비웠다. 목운요는 소청이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웃는 얼굴로 답했다.

“제가 오라버니와 문 앞에서 대화하는 걸 들으셨어요?”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의 언니가 다쳐서 오라버니가 집으로 가야겠다고 하셨어요. 우리도 같이 돌아갈 거냐고 묻기에, 제가 공주 전하께 필사해 드리기로 한 불경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고 거절했어요.”

우의가 다쳤다는 말에 소청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과연 어젯밤 본 소우의는 어딘가를 다친 듯하긴 했다. 목운요는 소청을 다시 자리에 누였다.

“어머니, 조금 더 주무세요. 이따가 사금에게 묽은 죽을 올리라고 할게요. 목이 낫기 전까진 부드러운 음식을 드셔야 해요.”

소청은 목운요의 손을 잡고 입 모양으로 ‘영 공자’라고 발음했다.

“어제는 날이 너무 어두워서 가 볼 수가 없었어요. 이따가 뭐 좀 가지고 가서 답례할게요.”

그제야 안심한 소청은 침상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 * *

소우의는 분개하며 탕약 그릇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다 소청오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침상 위에서 힘겹게 몸을 틀었다.

“오라버니, 목운요 그년은 어디 있어요?”

“우의야, 말을 가려 해라.”

“말을 가려 하라고요? 지금 그년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어디 있냐니까요? 왜 목운요를 잡아 오지 않았어요!”

소우의는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제 팔뚝을 건드렸다가 고통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마차를 마련해 올 테니, 돌아가면 상처를 치료하거라.”

“제 말을 듣기는 하는 거예요? 목운요가 제 팔을 꺾고, 제 목에 비수를 대서 죽이려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그년을 잡지 않는 거냐고요!”

소우의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자 제 마마가 부러진 제 팔을 누르고 있어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고통은 소우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소우의를 더 힘들게 한 건 엉망이 된 침상이었다. 두려워서 오줌을 지린 탓이었다.

소우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일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심정인데, 오라버니는 목운요를 잡아 오는 건 고사하고 되레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다니!

소청오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네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신중하게 생각하라고요? 산 증인이 있는데 저희 두 사람의 말은 믿지도 않습니까? 한낱 비천한 출신 계집년일 뿐인데 조심할 게 뭐가 있어요? 좋습니다. 오라버니가 절 돕지 않겠다면, 제가 돌아가서 어머니께 말씀드릴 거예요. 어머니라면 분명 제 말을 믿으시고 이번 사건을 공평하게 처리하실 거라고요!”

“곁채의 화재 때문에 고모님이 갇혀 돌아가실 뻔했던 일. 네가 한 짓이냐?”

소청오가 무거운 투로 물었다.

질문을 들은 소우의는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가 다급히 부인했다.

“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목운요가 저를 모함한 거예요. 전 방에서 쉬고 있었기에 어째서 불이 났는지 모릅니다.”

“네 말이 허점투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소우의를 응시하는 소청오의 표정은 차가웠다.

소우의는 놀라서 동공이 한껏 움츠러들었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제는 분명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이 이번 화재와 관련 있다는 걸 누가 증명하겠는가?

“허점투성이라고요? 오라버니는 동생도 믿지 못하나요?”

“넌 자다가 연기 냄새를 맡고 도망쳤다고 했지. 그런데 왜 곁채에 있던 소청 고모님께는 도망치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냐?

“저, 저는…… 그때 고모님이 방에 계신 줄 몰랐어요.”

“고모님이 계신 줄 정말 몰랐다면, 어째서 고모님에 대해 물었을 때 고모님은 방에서 탈출하지 못했냐고 대답했느냐?”

당황한 소우의는 되레 화를 냈다.

“설마 목운요가 제게 따져 물으라고 하던가요?”

소청오의 얼굴엔 점점 냉기가 맴돌았다.

“큰 불길에 곁채가 깡그리 불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은 증거가 있었다. 이를테면 문과 창문을 고정하여 안에선 절대 열 수 없게 하는 쇳덩이 말이다!”

소우의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아연실색하는 소우의의 모습에 소청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을 느꼈다.

“어머니께서는 지금껏 너를 아끼셨다. 무엇이든 네겐 언제나 최고만을 안겨 주셨지. 그게 점점 너를 망가뜨렸나 보다. 이렇게 사람다운 도리를 지키지 못하니 말이다! 고모님을 죽이려고 계략을 꾸미면 운요는 미쳐 날뛰며 네게 보복하려 할 텐데, 대체 네게 어떤 이점이 있단 말이냐?”

안 그래도 제 발을 저리고 있던 소우의는 소청오가 목운요를 대변하는 듯한 말을 하자 분노가 치밀어 이성을 잃었다.

“제가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망가졌다고요? 사람 된 도리를 지키지 못한다고요? 결국 소청은 죽지 않고 살아 있잖아요. 그럼 된 것 아닌가요? 왜 저를 나무라세요? 대체 목운요와 저 중에 누가 오라버니의 동생이란 말이에요? 목운요 때문에 제 팔이 부러졌는데, 절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저를 나무라요? 목운요가 오라버니께 정신이 혼미해지는 약이라도 들이부었습니까? 아니면 설마, 목운요 그년을 좋아해요?”

“입 다물어!”

소청오가 차갑게 소리쳤다. 그가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숨을 단번에 쏟아 내자 소우의는 당황했다.

“맞군요…….”

소우의는 제 오라비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소우의의 눈에 증오라는 감정이 서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제가 오라버니의 마음을 맞힌 거죠? 그렇죠? 그러니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겠죠. 목운요를 좋아해서 백방으로 그년을 감싸고 돈 것이로군요!”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리고 이번 일을 크게 키우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더 이상 손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왜 말리지 않았냐며 나를 원망하지나 마라.”

소우의는 냉소했다.

“사랑이라는 치기 어린 감정에 눈이 멀어 가족도 나 몰라라 하는 오라버니는 저도 필요 없습니다. 저를 집에 돌려보내고 싶다고 했죠? 그럼 집에 돌아가죠. 그러나 목운요가 가문에 발을 들인다면 반드시 두 팔과 두 다리를 분질러서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닌, 마지못해 살아가게 만들어 버릴 겁니다!”

* * *

장공주는 손을 휘저어 태의를 내보낸 후, 의자에 앉아 있는 월왕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간도 크더구나. 불이 그 정도로 번졌는데 사람을 구하겠다고 달려들다니. 조금만 더 늦었으면 네가 아무리 대단한 재주를 가졌더라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모님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멀쩡히 고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잖습니까?”

“그런 말이 나오느냐?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아랫것들의 보고를 듣고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알아?”

장공주의 목소리에는 책망보단 걱정이 더 짙게 담겨 있었다.

“운요의 모친이 불길 속에 갇혀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장공주는 월왕을 한동안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성정은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모르겠구나. 목운요를 위해서라면 네 목숨도 중요치 않다는 것이냐?”

그에 월왕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번 일로 운요를 미워하시면 안 됩니다. 소 부인을 구한 것은 제가 원해서였습니다.”

장공주는 월왕을 힐끗 쳐다봤다.

“내가 어디 아무 데나 화풀이를 하는 사람이더냐? 다만 서릉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네가 목운요를 마음에 품었다고 해서 무턱대고 보호해선 안 돼. 그 아이가 스스로 해결하게 해야지. 안 그럼 너희 두 사람은 오래갈 수 없을 거다.”

그녀는 이번 사건으로 월왕이 목운요에게 깊이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목운요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성가신 일이 얼마나 많이 생길지…….

월왕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걸렸다.

“충고 감사합니다. 운요는 원래 지혜로운 아이입니다. 이번 일은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미처 방비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서릉에서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거다. 상대가 방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적도 있다더냐? 이번엔 네가 구해 줬다지만, 다음, 또 그다음은 어찌할 것이냐? 그때마다 네가 이번처럼 즉각 나타날 수 있겠느냐? 목운요가 스스로 이런 위험들을 마주할 수 없다면 네 옆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월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얼굴엔 진중함이 묻어 있었다.

“고모님의 뜻은 잘 압니다. 하나 제가 운요를 마음에 두는 것은 운요가 운요이기 때문이지, 제게 어울려서가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운요가 아무 걱정도 하지 않도록 뒤에서 지켜 주고 싶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