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92화 (192/442)

192화 목부용

눈부시게 빛나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공주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땐 그 사람이 바보 같다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바보 같은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리고 마음속에 계속 남게 되었지. 그렇게 마음에 담은 지도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나 홀로 이 땅에 남게 되었지만 결코 잊은 적은 없어…….’

장공주는 한참 뒤에야 옛 기억에서 벗어났다. 눈망울이 촉촉한 듯 보였다.

“나도 늙었는지 예전 일을 떠올리니 더없이 아득한 느낌이구나. 그저 내 딸의 소식만 알 수 있다면 평생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그럼 땅 밑에 가서 허 대인과 만났을 때 할 말은 있을 테니까…….”

“하늘도 공주 전하의 자애로운 마음을 굽어살피셔서 소원을 이뤄 주실 겁니다.”

곡 마마는 슬퍼 목이 멨다. 장공주와 허연이 천생연분이었다는 것은 세간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허연이 공주를 보호하다가 죽자 공주는 영원히 가슴속에 그를 묻어 두고 그날의 고통 속에 스스로를 단단히 가두었다.

장공주는 책상 위의 불경을 가볍게 어루만지다가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목운요가 베껴 쓴 불경을 보니 마음이 무척 평온해지는 것 같구나. 그 아이에게 가서 나를 위해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萨本愿经) 두 권을 더 베껴 달라고 전해 다오.”

곡 마마가 서둘러 대답했다.

“네, 그럼 소인은 가 보겠습니다.”

* * *

오후의 참배 시간이 끝나고 나오니 곡 마마가 기복전 밖에 서 있었다.

소우의가 앞으로 나서서 인사를 올렸다.

“곡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소저께 인사 올립니다. 목 소저께 장공주 전하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순간 소우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목운요는 곡 마마의 말에 놀라서 서둘러 앞으로 나왔다.

“곡 마마를 뵙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제게 무슨 분부라도 하셨습니까?”

“공주 전하께서 목 소저의 불경을 보시고 무척 기뻐하시면서 지장보살본원경 두 권도 써 주시길 부탁하셨습니다.”

목운요가 재빨리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에 곡 마마가 웃으며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 이틀 뒤에는 보화사를 떠나시니 부득이하게 시간을 재촉하게 될 것 같습니다.”

“네. 최대한 빨리 필사를 마쳐서 보내 드리겠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소인은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곡 마마가 떠난 뒤, 목운요는 옆에서 느껴지는 짙은 살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분개와 증오로 가득 찬 소우의의 얼굴이 보였다.

“동생은 이곳에 기도를 하러 온 게 아니었나요? 공주 전하께 잘 보일 시간도 있다니, 참으로 놀랍군요.”

“제가 덕을 본 건 어제 일찍 도착하여 공주 전하와 일면식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어제 언니가 있었더라면 오늘 제게 이런 기회는 없었겠지요.”

목운요는 겸손하게 말했으나, 소우의의 입장에서는 따귀를 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소우의가 어제 올 수 없었던 것은 서릉에 떠도는 소문 때문이었다. 비천한 무희와 한데 묶여 논해졌기에, 하는 수 없이 사람을 찾아 춤을 가르쳐 주어야만 했다. 목운요가 이리 말하는 건 분명 자신을 비웃는 것이리라!

‘남에게 빌붙어 사는 주제에 감히 그따위로 지껄여?’

“그럼 동생은 빨리 불경 필사나 하러 가요. 공주 전하의 일이 급하니 지체해선 안 되지요.”

소우의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더욱 오만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고고하게 고개를 쳐들자 가늘고 기다란 목이 우아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소청오는 그런 소우의를 다소 근심스럽게 보았다가 이내 목운요에게 말했다.

“공주 전하를 위해 불경을 필사해 드리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오. 오늘 저녁에는 기도드리러 가지 말고 편히 필사하시오. 대웅전에서 향을 올려 예불한 다음, 초경각(抄经阁)에 가서 필사해야 예절에 어긋나지 않을 거요.”

“명심할게요.”

목운요는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하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장공주가 불경을 베껴 쓰라고 한 게 월왕의 입김 때문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던 탓이다.

그때, 소청이 다가와 목운요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공주 전하의 말씀은 이미 전해졌으니, 너는 불경을 필사하면 그만이란다.”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제가 필사할 동안 꼭 사금, 사기와 함께 계셔야 해요.”

방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탁자 위에 놓인 꽃과 새, 달그림자가 그려진 꽃병을 보았다. 가늘고 기다란 꽃병에 활짝 핀 목부용이 꽂혀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절로 제 발 저린 사서가 나직이 말했다.

“소저, 목부용도 주워 왔어요.”

목운요는 기가 차서 웃음을 터뜨렸다.

“내게 시녀가 부족한데, 시녀도 문 앞에서 주워 오지 그래?”

“네? 소, 소저 곁엔 저희가 있잖아요. 금란과 금교도 있는데, 부족하신 건가요?”

“너를 대신할 시녀를 찾아오라는 뜻이란다.”

목운요는 사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용서를 구했다.

“소저, 잘못했습니다. 앞으론 함부로 주워 오지 않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목운요는 탁자 위의 목부용을 바라보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 일어나렴. 목욕해야 하니 더운물 좀 준비해 주고. 목부용의 일은 불경 필사가 끝나면 그때 다시 따질 거야.”

사서는 우거지상이 되어 대답했다.

“네, 그럼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사서가 물러나자 목운요는 목부용에 두었던 시선을 억지로 떼어 냈다.

“바보.”

사서에게 하는 말인지, 월왕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 * *

보화사는 불경을 필사하는 장소가 따로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초경각이었다.

밤중의 초경각은 유난히도 고요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옅은 묵 냄새가 났다. 동자승 한 명이 책장 앞에서 책을 정돈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불경을 필사하러 오셨습니까?”

일고여덟 살쯤으로 보이는 동자승은 동글동글 귀여운 용모였지만 퍽 진지하게 예를 갖추었다.

목운요는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렇습니다. 지장보살본원경을 필사하고자 하는데, 스님께서 찾아 주시지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동자승은 보자기에 싸여 있던 불경을 금세 찾아냈다.

“불경을 소중히 다뤄 주시고, 필사를 마친 후에는 원본을 탁자에 올려 두십시오. 필사본은 가져가시면 됩니다. 그럼 방해치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서와 사화가 종이를 깔고 먹을 갈았다. 목운요는 흔들리는 촛불을 보며 조금씩 평온을 되찾았다.

“내가 할게.”

‘기왕 베껴 쓰기로 한 거, 성심성의껏 하자. 부디 장공주께서 잃어버린 딸을 속히 찾으시길…….’

고요한 밤, 벌레 울음소리가 유달리 선명하게 들려왔다.

바른 자세로 앉은 목운요는 침착하게 붓끝을 움직여, 힘 있고 빼어난 해서체로 생동감 있게 종이에 불경을 옮겨 쓰기 시작했다.

한편 그 시각, 월왕은 초경각 입구에 기댄 채 사서와 사화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고는 목운요에게 눈길을 주었다. 집중하여 목운요를 바라보는 눈 속에는 다정한 빛이 감돌았다.

한 장을 다 베껴 쓰고 종이를 바꾸던 목운요의 시선이 무심코 문에 닿았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월왕을 발견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서 있었던 걸까?

“월왕 전하, 언제 오셨습니까?”

걸어 들어와 탁자 위의 불경을 쳐다보는 월왕의 눈에 속상함이 엿보였다.

“급할 것 없다. 고모님께서 보화사를 떠나시기 전까지만 완성하면 돼.”

“공주 전하께 하루빨리 필사본을 드리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사서와 사화는 이미 물러난 상태였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동자승 또한 온데간데없었다. 방에 자신과 월왕밖에 없다는 사실에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월왕은 그런 그녀의 불편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 조금 더 다가와 목운요가 필사한 불경을 살펴보았다. 생동적이면서 기개 넘치는 자신의 서체를 모방했지만, 그 속에는 절제된 우아함이 있었다.

월왕이 더는 말을 하지 않자, 목운요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불경을 써 내려갔다.

고요한 초경각엔 심지 타는 소리만 들렸다.

월왕은 한쪽에 앉아 불경을 필사하는 목운요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눈은 투명했고, 호흡은 안정적이었다. 한 획, 한 획 진지하게 불경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신없는 속세가 안온하게 느껴졌다.

목운요는 필사에 몰두하기 위해 월왕의 시선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런데 열심히 써 내려가는 도중, 별안간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면서 붓을 쥔 손이 흔들렸다. 검은 먹물이 화선지에 떨어져 빠른 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

목운요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가슴에 얹었다.

“지금이 몇 시진인가요?”

“그리 늦진 않았다. 이제 막…….”

한데 월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초경각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사금이 뛰어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로 다가온 사금은 목운요와 월왕이 무탈한 것을 보고 눈에 띄게 안도했다.

“소저, 괜찮으세요?”

그 말에 목운요의 동공이 확 줄어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곧장 초경각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월왕은 차갑게 굳어 버린 얼굴로 목운요를 뒤따라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기다리거라!”

월왕은 목운요의 허리를 품에 안은 채 내력(内力)을 이용해 재빨리 기복전으로 향했다.

목운요는 월왕의 가슴팍을 꽉 쥐고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마치 바짝 당겨진 활시위처럼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사금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괜찮냐고 물은 것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 누군가가 함정을 파 놓은 것이 분명했다.

사금이 자신에게 왔으니 어머니는 사기하고만 있을 터. 그 뜻은…….

목운요는 손이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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