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91화 (191/442)

191화 형제간의 우애

사서는 양심에 찔려서 얼른 방을 나왔다. 마침 사금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금 언니, 소저께서 알아채신 것 같아요. 그 꽃…….”

그러자 사금은 낮게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사서는 네 시녀 중 무공이 가장 뛰어났지만, 성격이 단순해서 속을 숨길 줄 몰랐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걸 숨길 수 있겠어? 어쨌든 문 앞에서 꽃을 주운 건 맞잖아.”

“하지만…… 사황자께서 사람을 시켜 꽃을 문 앞에 두신 거잖아요.”

“넌 그저 문 앞에 있던 꽃을 탁자에 올려 뒀을 뿐이잖아? 걱정 마. 소저께서 그런 걸 가지고 탓하진 않으실 거야.”

“저희는 소저를 따르는 시녀들인데, 소저께서 저희에게 충심이 없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까요?”

사금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황자께서 너더러 탁자 위에 꽃을 놓아두라고 하셨니?”

“그건 아니지요.”

사황자는 사람을 시켜 꽃을 문 앞에 두었을 뿐이고, 사서는 그걸 보고 분명 소저께 전하는 선물이리라 판단해 주워 온 것이었다.

“그럼 됐지. 걱정하지 마. 소저께서는 우리보다 훨씬 생각이 깊으시니까.”

그제야 사서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럼 뒷산에 가서 목부용을 찾아와야 할까요?”

“저녁이 되면 다시 문 앞에서 꽃을 주워 가면 돼.”

“그럼…… 그럴게요.”

‘어차피 사황자님께서 꽃을 보내실 테니까.’

* * *

오후가 되자 소우의는 더 버티기 힘들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방석을 더 부드러운 것으로 바꿔 왔으나, 두 무릎은 여전히 부러질 것만 같았다.

결국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소청오가 미간을 꿈틀거리며 시녀에게 소우의를 부축하도록 했다.

“몸이 안 좋으면 우선 곁채로 가서 쉬어라.”

“괜찮아요.”

소우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장공주가 보화사에 있으니 지금은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 지금 포기해 버리면 지금껏 고생한 게 전부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더 할 수 있어요.”

우의가 고집을 부리자 소청오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 * *

“고모님을 뵙습니다.”

진왕은 문에 들어서서 환한 미소로 장공주에게 절을 올렸다. 장공주는 손에 들린 불경을 내려놓았다.

“일어나도 좋다. 어쩐 일로 왔느냐?”

“부황께서 안부를 여쭈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서신을 같이 보내셨으니 한번 살펴보시지요.”

곡 마마가 서신을 대신 받아 장공주에게 전해 주었다. 장공주는 서신을 다 읽은 뒤 살며시 웃었다.

“황상께서는 생각이 너무 깊으시다. 그래도 가을 사냥이 좋은 기회이긴 하지. 가을 사냥 때 소저들을 함께 데려가는 것에는 나도 동의한다고 황상께 전해 다오.”

“네.”

진왕은 곧이어 옷소매에서 약방 한 장을 꺼냈다.

“요 며칠째 다시 흉통을 느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흉통에 좋다는 약재들을 이것저것 처방받아 왔습니다. 태의에게 검토를 마쳤는데, 한번 보시고 괜찮다면 약을 지어 드십시오.”

장공주는 곡 마마에게 약방을 받도록 손짓했다.

“마음을 세심히 써 주었구나. 일부러 처방전을 받는다고 고생이 많았겠어.”

“조카로서 당연한 일인걸요. 고모님께서 지병을 떨쳐 내실 수만 있다면 부황께서도 마음속 근심이 사라지실 테고 저도 염려를 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하던 중 돌연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고개를 돌리자 월왕의 서늘한 얼굴이 보였다.

“넷째로구나. 언제 월서에서 돌아왔느냐? 왜 황궁에 먼저 가서 부황께 인사드리지 않고?”

월왕은 손에 들고 있던 수선화 화분을 내려놓고 진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삼황자 형님을 뵙습니다.”

“예는 그만 거두어도 된다. 중추절 연회 때 넷째 너도 궁으로 오라는 황명을 받았다는 것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왔을 줄은 몰랐구나. 어서 황궁에 가 봐라.”

장공주는 형제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탁자 옆에 놓인 수선화를 바라보았다. 월왕도 진왕에게 대꾸하지 않고 수선화를 장공주의 앞에 놓았다.

“고모님, 이 꽃 어떻습니까?”

“아직 다 피지는 않았지만 천진한 모습이 귀엽구나.”

장공주는 곡 마마에게 눈짓하여 수선화를 방 안에 잘 놓아두었다.

“형제가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되었는데, 나가서 이야기 좀 나누려무나. 나는 피곤해서 잠깐 잠을 청해야겠다.”

“네,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방을 나선 진왕은 미소 띤 얼굴로 월왕을 살펴보았다. 진왕은 월왕의 온몸에서 풍기는 싸늘한 분위기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우, 너는 평소 예절을 엄격하게 지키던데, 이번에는 좀 의외로구나.”

월왕이 눈을 들었다.

“제가 궁에 가기 전에 여기 들른 사실을 부황께 고하실 겁니까?”

진왕의 눈에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

“지금은 고모님도 계시니 사소한 일을 따지진 않으실 것이다.”

월왕은 진왕의 말에 담긴 숨은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다소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형님.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월왕은 곧장 몸을 돌려 장공주가 머무는 곁채로 갔다.

월왕의 뒷모습을 보는 진왕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진왕이 어렸을 때 장공주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부황도 그 점 때문에 진왕을 높이 샀다.

하지만 사실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억지로 장공주 곁에 붙어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땐 나이가 어렸기에 인내심이 부족해서, 시종일관 미적지근한 장공주의 반응을 견디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당시에 발견한 비밀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장공주가 월왕을 대하는 태도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만약 장공주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월왕의 삶은 열두 살을 넘기지 못했을 터였다. 월서로 보내진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왕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떠올리며, 이제 그 관계가 더 깊어진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호위 무사를 통해 부황께 보고를 올리게 하고는 자신은 곁채에 머무르기로 했다. 한 가지 확인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 남아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장공주와 친하다고 생각할 것이니 오히려 더 이득이었다.

* * *

방으로 들어온 월왕의 표정이 어쩐지 서늘했다.

장공주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나쁜 말이라도 들었느냐?”

월왕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몇 가지 있어서 그렇습니다.”

말하는 도중 월왕의 시선이 창가에 놓인 수선화에 내려앉았다. 아직 꽃은 만개하지 않았지만 잎이 통통해서 보기 좋았다.

‘운요는 이걸 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을까?’

“목운요를 생각하고 있느냐?”

월왕이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모님께선 수선화가 좋습니까, 아니면 목부용이 좋습니까?”

장공주는 살며시 미간에 힘을 주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목운요에 대해서 꽤 호기심이 생기는구나. 그 아이가 목부용이 좋다고 했느냐?”

월왕이 눈썹을 찌푸렸다. 장공주에게 목운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가슴 한편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긴장감과 난처함이 떠올랐다.

“네.”

“네가 짝사랑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월왕의 몸이 뻣뻣해졌다.

그에 장공주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월왕이 고심하는 모습에 자못 감격하는 눈치였다.

“목부용에 다른 이름이 있다는 걸 아느냐?”

“다른 이름요?”

“그래. 목부용은 추운 걸 좋아해서 거상화(拒霜花, 서리를 쳐 내는 꽃)라고도 불리지……. 아직도 그 뜻을 모르겠느냐?”

순간 월왕은 멍해져서 실망하는 눈빛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확고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고모님, 전 목부용을 찾으러 가 보겠습니다. 이따 기복전에 가실 때는 꼭 곡 마마와 호위를 대동하십시오. 고모님께서 보화사에 오셨다는 소식을 아는 자가 늘어서 무례한 자들이 사고를 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럼 가 보렴.”

월왕이 물러나자 장공주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띤 채 수선화를 바라보았다. 이에 곡 마마가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목 소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장공주가 손을 뻗어서 수선화의 잎을 만졌다.

“어찌 알았느냐?”

“목 소저와 만난 인연은 두 번이 다지만, 소인이 보기에 목 소저에겐 공주 전하와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저 외모뿐만이 아니라 말하고 행동하는 분위기까지 공주 전하의 어릴 적을 떠오르게 합니다.”

장공주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잎을 잡아당기던 손을 놓으니 이파리가 가볍게 튕겨 나와 흔들거렸다. 마치 공주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이 인 것 같았다.

“내 딸이 만약 살아 있다면 지금쯤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았겠지……. 소씨 가문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딸을 되찾았는데 나는 그런 길운이 없나 보구나…….”

장공주는 탄식했다. 사실 그녀도 목운요를 처음 보았을 때 곡 마마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조사를 해 보았지만, 소청과 소씨 가문의 관계는 명명백백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목운요와 자신의 관계를 의심했을 것이다.

곡 마마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찰싹 때렸다.

“소인의 주둥이가 경솔했습니다. 공주 전하의 마음을 아프게 하다니…….”

“되었다. 우리가 함께한 지 몇십 년이 되었는데 그런 말 한마디 가지고 네게 화를 내겠느냐? 그보다 거상화라……. 지금 보니 참 격세지감이구나.”

곡 마마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어릴 적 생각이 나신 겁니까? 그때 선황께선 공주님을 무척 예뻐하셨지요. 문벌가의 공자들도 공주님과 혼인하고 싶어 줄을 섰고요. 그중에서도 허 대인께서 가장 공주님께 푹 빠지셨지요.”

덩달아 웃던 공주의 얼굴이 이내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그래. 그땐 한창 청춘이었지. 재능이 뛰어난 사내라는 건 알았지만 신분의 차이가 크니 그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목부용을 보내 완곡하게 거절했지. 그런데 그 바보는 내 뜻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매일같이 병두련(竝頭蓮, 한 줄기에 두 송이 꽃이 나란히 피는 연꽃)을 궁에 보냈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비웃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결국엔 허 대인께서 부마(駙馬)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공주님께서도 한결같은 마음에 감동하신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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