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90화 (190/442)

190화 특별한 꽃 선물

기복전을 나온 뒤, 장공주는 고개를 돌려 월왕을 바라보았다.

“너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니 곁에 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급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급하지 않다고 할 땐 믿음이 갔다만, 지금도 그러하니?”

장공주는 그리 물으면서 월왕의 손에 들린 불경에 시선을 주었다.

“목운요는 참으로 영민한 아이더구나. 다만 출신이 낮아서…….”

월왕은 뻣뻣하게 굳었다가 곧장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 세월 자신을 아껴 준 고모의 앞에서까지 제 마음을 숨기고 싶진 않았다.

“출신은 중요치 않습니다.”

장공주는 설핏 웃었다.

“어쩐지 오늘 그리 신경을 쓰더라니. 다만 네가 일부러 그 아이와 나를 만나게 해 주었는데, 그 아이는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 듯하더구나.”

“목운요는 나이는 어리지만 성정이 강직합니다. 도움을 주려던 의도였는데, 괜한 짓을 한 것 같군요.”

월왕은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목운요를 높게 평가하려는 마음이 더 컸다.

서릉은 요즘 장공주 때문에 떠들썩했다. 모든 관료 집안의 소저들이 조금이라도 더 장공주에게 잘 보이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목운요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월왕의 표정을 보며 장공주의 웃음이 더욱더 짙어졌다.

“다시 월서로 돌아갈 생각은 없나 보구나?”

“네, 없습니다. 제가 서릉에 남고 싶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운요를 돌보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모후의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장공주는 은행나무 숲 부근에 있는 돌걸상에 앉아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네가 이곳에 돌아온다면 옛일을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월왕은 장공주를 위해 바람이 드는 방향에 서서 밤바람을 막았다.

“모후께서 돌아가신 이유를 반드시 알아낼 겁니다.”

장공주가 눈을 내리깔았다. 어두컴컴하여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일찌감치 예상했지…….”

월왕은 이를 살짝 악물었다.

“고모님은 그해 있었던 일을 분명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남몰래 저를 보살펴 주시면서도 그해의 진상을 말씀해 주진 않으셨습니다.”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일이다. 진상이 그리도 중요하느냐?”

“저에겐 그게 얼마나 지난 일이든 중요합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듯한 기분입니다.”

월왕은 냉기가 서린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를 보살펴 준 진 총관과 진 태감이 해 준 말에 의하면, 월왕의 모후는 그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사약을 받았다고 했다. 이미 성년이었던 십여 명의 황자들을 독살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지금 궁에 있는 황자들이 비교적 나이가 어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일어난 소란은 조정의 뿌리까지 뒤흔들 정도였다. 장공주가 사정을 봐 달라고 빌지 않았더라면 월왕은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장공주는 입을 살짝 열었다가 목에 걸린 말을 끝내 삼켜 버렸다.

“어차피 너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진상이 더욱 잔혹한 법이다. 그것이 꼭 네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고모님이 제게 사실을 말해 주지 않으시는 게 저를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로서 어머니가 누명을 쓴 줄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알아내야겠습니다!”

장공주는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이만 가자꾸나. 날이 저물었으니 일찍 돌아가 쉬어야지. 그리고 황상께는 너를 월서로 보내지 말라고 전해 두마.”

“감사합니다, 고모님.”

“다만 내 한마디만 일러두마. 황상과 다투지 마라. 지금껏 널 월서에 배치한 것 역시 그분의 마음 아니겠느냐…….”

“바람이 붑니다. 모셔다드릴게요.”

장공주는 말을 더 잇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 * *

목운요는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소청과 밥을 먹은 후 기복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창백한 안색의 소우의와 마주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언니.”

목운요를 본 소우의의 눈에 언뜻 싫은 기색이 비쳤다.

“예의 차릴 것 없어요.”

장공주가 보화사에 왔다는 소식을 숨길 수 없으리란 것은 일찌감치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소식이 빨랐다. 고작 하룻밤이 지났는데 소우의가 바로 달려왔으니 말이다.

소우의는 다소 굳은 얼굴로 자신이 베껴 쓴 불경을 탁자 위에 나란히 올렸다. 워낙 다급하게 오느라 불경을 많이 쓰지 못한 참이었는데, 높이 쌓인 목운요의 스무 권과 비교되어 보이자 기분이 굉장히 언짢아졌다.

소우의는 방석에 꿇어앉아 살포시 눈을 감았다.

‘차라리 안 보고 말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로 바닥에 꿇어앉아 불경을 읊으려니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 무릎이 서서히 시큰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한편, 목운요는 이따금씩 무릎을 들썩이는 소우의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부인이 아무래도 꽤 빈틈없이 준비한 듯했다.

제 마마가 보내온 음식에는 입술망초 가루가 섞여 있었고, 어제까지 멀쩡하고 푹신하던 방석에는 지모(知母, 백합과의 한약재)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두 약재 모두 차가운 성질을 지녀, 사흘만 지난다면 자신의 다리는 곧 망가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다리가 아프다고 호소하면, 효심이 부족하다고 추궁받을 터.

다시 눈을 감는 목운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대부인이 오랜 시간 고심하여 마련한 술수를 헛되이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젯밤 육냥에게 계획해 둔 것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마침 오늘 소우의가 찾아왔으니 준비한 계획을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대부인이 나를 해칠 생각이라면, 그 딸인 소우의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공평하지.’

소우의는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릎이 점점 아파져 마비라도 될 지경이었다. 앉은 자리가 바늘이 꽂힌 나무판처럼 느껴졌다. 이마에선 송골송골 식은땀이 배어났고,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요 며칠 그녀는 정말로 몸이 좋지 않았다. 명성을 널리 떨치려고 그렇게 노력했건만, 환채각의 비천한 무희 따위와 엮였으니 답답하고 울적한 정도를 넘어 당혹스럽고 기가 찼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얻은 이름이 배월 선녀(달에 기도한 초선)인 반면, 비천한 무희가 떨친 이름은 월궁 선녀(달나라에 산다는 선녀)라는 사실이었다. 이름만으로도 자신을 압도해 버린 그 무희를 찾아내서 산 채로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우의는 분노와 억울함이 뒤엉킨 감정을 참고 또 참았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에 목운요가 팔을 뻗어 얼른 부축했다.

“우의 언니, 괜찮으세요?”

소우의는 손을 휘저어 목운요를 저지하고는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동생에게 폐를 끼치긴 싫군요.”

목운요는 그런 소우의를 의외라는 듯 바라보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진왕 전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진왕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소우의의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녀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뒤돌아 기운 없이 입을 열었다.

“진왕 전하를 뵙습니다.”

삼황자 진왕은 구름이 수놓아진 담청색 평복을 입고 보석이 달린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온화한 기질을 갖춘 그가 옅게 미소 지으니 과연 천하의 누구도 비하지 못할 군자처럼 보였다.

“급히 예를 갖출 것 없소. 소 소저의 몸이 불편한 듯한데, 기도하는 것이 효심이라고는 하나 그러다 몸까지 상해선 안 되오.”

소우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리따운 얼굴에 한 줄기 근심이 서려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이 절로 녹을 정도였다.

“마음 써 주시어 감사합니다. 어제 오라버니와 함께 왔어야 했는데, 정말이지 어제는……. 오늘 아침엔 조금 나아진 듯하여 급히 왔습니다.”

소우의는 어제 보화사에 오지 못한 이유를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아파서 도저히 올 수 없었다는 것처럼 말을 얼버무렸다.

목운요는 옆에서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역시 소우의와 진왕은 환상의 짝이구나. 두 사람 모두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위선자야. 그렇다면 반드시 두 사람이 좋은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게 밀어줘야지.’

소우의는 다시 우아하게 바닥에 꿇어앉아 불경을 읊는 데 집중했다.

진왕은 다가온 소청오와 짧게 몇 마디를 나눈 후 이만 가 보겠다고 하다가, 목운요에게 말을 건넸다.

“목 소저도 조심하시오. 절대 기도를 드리는 일로 몸이 상해선 안 되오.”

“감사합니다, 진왕 전하.”

살포시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목운요는 소우의의 호흡이 잠깐 흐트러지는 것을 명백히 감지할 수 있었다.

* * *

정오에 곁채로 쉬러 갈 때 소우의는 거의 시녀들에게 부축받다시피 해야 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워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목운요는 소청과 함께 식사를 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는 수선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못 보던 꽃이네. 보화사에서 보내온 거니?”

그에 사서가 사뭇 어색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문 앞에서 주운 거예요. 혼자 보기 아까워서 소저도 감상하시라고 탁자에 올려 뒀지요.”

목운요는 수선화 잎을 바라보며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수선화가 만개할 시기는 아니라 별로 예쁘지는 않네.”

사서는 예상과 다른 목운요의 반응에 전전긍긍했다.

“그럼 소저는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제가 뒷산에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보화사 뒷산에 화초가 어찌나 다양한지 몰라요. 예쁘게 만개한 꽃도 많고요.”

“난 목부용(木芙蓉)을 좋아해. 기개가 넘치고, 서리와 이슬을 받아도 곱잖아. 보기 힘든 꽃이지.”

“그럼 오후에 기도하러 가시면 뒷산에 가서 찾아볼게요.”

목운요는 빙그레 웃었다.

“뒷산까지 가서 찾지는 않아도 돼. 그저 문 앞에서 기다리면 몇 송이 생기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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