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86화 (186/442)

186화 소우의 깨달음

대부인이 전해 준 불경 스무 권은 무척 길었다. 일부러 책을 찾아 모으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금란은 옆에서 먹을 갈고 금교는 종이를 깔았다. 두 사람은 대부인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만, 목운요가 평온하게 불경을 베껴 쓰는 모습을 보자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느새 방 안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때, 소우가 하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목운요는 발소리가 들리자 한 문단을 베껴 쓴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소우는 같이 온 하인에게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홀로 목운요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필사지를 바라보았다.

“바보예요? 베껴 쓰라고 했다고 진짜 베껴 써요? 이렇게나 많은데? 필사를 마치지 못하면 문책을 당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일단 시작했으니 끝을 볼 거예요. 혹시 마치지 못하면 언니가 도와주실래요?”

“글씨체가 다르잖아요. 그래도 괜찮다면 좀 써 줄 순 있어요.”

목운요의 온화한 눈빛을 보니 소우의 날카롭게 돋은 가시도 절로 수그러들었다.

사실 소우도 일부러 가시를 세우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점차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잊은 탓이었다.

“농담이에요. 스무 권밖에 안 되는데요, 뭐. 예전에 하운방이 막 개업했을 때는 옷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야 했는지 아세요? 게다가 하운 미인책까지 수놓아야 했죠. 그땐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바빴어요. 그래도 결국 다 해냈지요.”

“자수방을 운영하는 건 재미있나요? 전 그런 곳에 한 번도 가 볼 기회가 없었거든요…….”

소우는 목운요가 필사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 살펴보다가, 이내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인생에는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다. 생, 로, 병, 사, 사랑과 이별, 미운 자와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집착을 놓지 못하는 것……. 혹시 저희 부모님께서 전생에 제게 빚진 것이 많아 제가 지금 부모님을 괴롭히는 걸까요?”

소우의 눈시울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씁쓸함이 가득해 보였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인연이 일어나면 모이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했지요. 언니가 외숙부와 외숙모의 딸로 태어난 것도 분명 여러 생에 걸쳐서 쌓인 인연일 거예요. 지금 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두 분이 마음을 많이 쓰고 계시지만, 언니가 있기에 두 분의 희망이 무너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두 분의 희망을 위해서라도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셔야 해요.”

소우는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부모님의 짐으로 여겨져, 하루라도 일찍 세상을 떠서 부모님의 근심을 덜어 드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목운요의 말을 들으니 눈시울이 시큰해지고 자꾸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렇게 골골대면서 하루하루 겨우 사는 걸 부모님이 바라신다는 말이에요?”

“그럼요.”

목운요는 강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식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소우가 들고 있던 필사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부모님 곁을 먼저 떠나야 한다면, 차라리 날카롭게 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정말 세상을 떠났을 때 부모님께서 마음이 덜 아프실 테니까.

목운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필사지를 빼냈다.

“이거 봐요. 안 그래도 베껴 쓸 게 많은데, 더 번거롭게 됐잖아요.”

소우는 눈을 부릅뜨며 화난 얼굴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슬퍼하는데 위로 한마디 안 해 줘요?”

목운요는 살며시 눈썹을 찌푸렸다.

“보내 준다던 과일도 보내 주지 않고는 위로부터 해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소우는 맥이 탁 풀려서 슬픔도 가시고 눈물도 그쳐 버렸다.

“어디 기분 좋게 말해 주면 덧나요? 정말 나보다 성격이 더 비뚤어진 것 같아요.”

“달콤한 말을 듣고 싶으면 어서 외숙모께 가 보세요. 외숙모께선 언제나 좋은 말씀을 해 주시잖아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오셨을 때도 저희 어머니께 언니가 어릴 적에 있었던 재밌는 일화를 얘기해 주셨어요.”

소우의 눈이 크게 커졌다.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죠?”

“언니가 어렸을 적엔 참 차분하고 참을성이 좋았대요. 한번은 머리카락 한 올을 주워 오더니 그걸로 진주를 엮어서 어머니께 드릴 거라고 했대요. 진주가 떨어지면 땅에 쪼그려 앉아 천천히 주워 모으고 다시 엮고.”

“어떻게 머리카락으로 진주를 엮어요?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요. 분명 거짓말이겠죠?”

“못 믿겠으면 외숙모께 직접 물어보세요. 제가 왜 언니를 속이겠어요?”

목운요가 웃으며 대답했다.

소우는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몇 발자국 떼다가, 목운요의 손에 든 필사지를 빼앗아 뒷걸음질 쳤다.

“어쨌든 내가 망친 거니 내일까지 똑같이 적어서 보내 줄게요. 그…… 그럼 이만 갈게요.”

목운요는 소우가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보고 웃다가 이내 불경을 계속 베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청이 흰목이버섯을 넣은 죽을 들고 건너왔다.

“우 목소리가 들리던데, 왜 더 놀다 가라고 하지 않았니?”

“우 언니는 성미가 급하잖아요. 잠시 들렀다가 외숙모가 보고 싶다고 곧장 가 버렸어요.”

“분명 네가 무슨 말을 했겠지.”

소청은 참지 못하고 싱긋 웃었다.

“네가 워낙 친절해서 사람들이 편하게 다가오곤 하잖니? 하지만 네가 정말로 아끼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래도 너는 일단 네 사람이 되면 언제나 꼼꼼히 배려해 주고는 해. 우에게도 그렇게 대해 주는 거지?”

그에 목운요가 일어서더니 소청의 곁에 기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 언니를 보면 참 정이 가요. 그게 아니었으면 제가 괜히 챙겨 주지 않았겠죠.”

소청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어미가 보기에는 참 좋구나. 네 곁에 나 말고도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단다. 의부와 의모도 계시고 금란과 금교도 있지만, 그 사람들만으로는 부족해. 역시 서로를 지지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지. 앞으로 널 돌봐 주고 백발이 될 때까지 곁에 있어 줄 부군도. 어찌 됐든 이 어미는 네가 더 잘 지내기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지내기를 바란단다.”

‘부군’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목운요는 돌연 붉은 계수나무 아래 서 있던 월왕이 생각나 몸이 굳어 버렸다.

‘왜 월왕이 생각나는 거지?’

소청은 딸아이에게서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렸다. 목운요의 뺨이 불그스레했다.

“요아야, 무슨 생각 하니?”

“전…….”

목운요는 정신이 돌아오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어머니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다른 생각은 안 했어?”

“정말이에요. 제가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겠어요?”

월왕이 나타난 것은 너무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분명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어지러워졌던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런 망상이 들 리가 없어.’

소청은 딸의 모습을 보면서 굳이 캐묻지는 않고 웃음만 지었다.

“불경을 베껴 써야 한다고 금란에게 들었다. 내가 글자는 많이 몰라서 도울 수는 없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맛있는 음식으로 위로해 주는 것밖에 없구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말해야 한다. 알겠지?”

“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어머니.”

* * *

한편 소우는 서둘러 서원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이부인이 맞이했다.

“뭘 그리 바삐 들어오니? 이마에 땀 난 것 좀 봐라. 얼굴도 심히 창백하고 말이야. 의원을 불러 줄까?”

소우는 고개를 젓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제가 어렸을 때 머리카락으로 진주를 엮은 적이 있나요?”

이부인은 순간 당황하다가 크게 웃었다.

“누구 말을 주워들은 거야?”

“운요에게 들었어요. 저번에 고모랑 대화를 나누실 때 제 어렸을 적 얘기를 하셨다고요.”

이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번졌다.

“그래, 집에 와 보니 네가 진주를 엮어서 달랑달랑 들고 있는 거야. 정말 웃지 못할 장관이었지. 그걸 내 손에 쥐여 주면서 내 옷에 달라고 하더라. 그땐 정말 기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소우의 표정이 새침해졌다.

“제가 성가시진 않으셨어요?”

이부인은 지난날을 생각하며 미소 짓다가 소우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성가시다고 생각했겠니?”

이부인에게 소우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었다. 매일 마음을 졸이고 고생하면서도 행복할 뿐이었다.

소우는 목운요가 한 말이 떠올라서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졌다. 저리는 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앞으로 다가가 어머니께 팔짱을 꼈다.

“고모는 운요에게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시던데, 저도 어머니께서 해 주신 음식을 먹고 싶어요.”

그에 이부인은 마음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뭘 먹고 싶니? 이 어미가 다 만들어 주마.”

근래 몇 년 동안 소우의 병은 날로 심해졌다. 그래서인지 소우는 성격도 점점 비뚤어지고 버릇도 나빠져서 매일 마주하는 어머니에게도 곧잘 화를 냈다. 마치 온몸에 가시를 잔뜩 세운 것만 같았다.

오늘처럼 이렇게 부드러운 소우는 참 오랜만이었다.

“넌 어렸을 때 이 어미가 해 준 증리고(蒸梨糕, 떡 위에 엿, 팥, 대추 따위의 즙을 올린 음식)를 가장 좋아했단다. 오랜만에 그걸 만들어 주마. 어떠니?”

소우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만들어 주세요.”

“그래,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렴.”

빠른 걸음으로 방문을 나선 이부인은 문밖에 나서자마자 참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까 우가 어디에 갔었더냐?

시녀가 냉큼 대답했다.

“부인께 아룁니다. 제월각에 다녀오셨습니다.”

이부인은 탄식하며 눈물을 닦아 낸 후 웃음을 지었다.

‘기회가 되면 선물을 들고 제월각에 찾아가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