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연극이 시작되다
고개를 끄덕인 월왕의 시선이 목운요의 뺨 언저리를 스쳤다.
“다친 곳은 괜찮아졌느냐?”
“괜찮아요.”
“맹언연의 뺨 한 대를 때려서 될 일이 아니다. 뱀을 때리면 보복만 당하지. 서릉은 경릉성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곳이다. 이곳에 온 이상 깊이 파고들어 암투를 벌일 준비를 해야 해.”
겉옷을 쥔 목운요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맹언연을 그렇게 처벌한 건 황제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맹언연의 두 다리를 그대로 끊어 버렸을 터다.
“소씨 가문과 맹씨 가문은 다르니 속사정을 살펴야지요.”
“상대방도 속사정을 살피리라곤 장담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파도가 세차게 칠 땐 곳곳에 날카로운 암초가 숨어 있는 법. 조심하는 게 좋아.”
월왕은 어떻게든 목운요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규방의 여인이 아니었다. 목운요에게는 자신만의 예리함과 계획이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일깨워 주시어 감사해요.”
목운요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서 있는 목운요의 길고 가는 속눈썹이 살짝 가라앉았다. 월왕은 손을 뻗어 그 속눈썹을 건드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가 돌아왔으니 고충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 월왕부는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니 말이다.”
목운요는 눈을 확 치켜떴다.
“월서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그래, 일단은 돌아갈 계획이 없다.”
“하나 폐하께선…….”
“다 방법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살짝 억누른 월왕의 목소리에는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부드러움이 서려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월왕의 눈에 담겨,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 별들은 월왕의 눈 속에 비친 그녀를 온통 휘감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목운요는 이유 모를 불안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늦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세요, 월왕 전하.”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월왕은 웃음기를 머금은 눈길로 목운요를 보았다.
“넌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할 때마다 나를 월왕 전하라 부르더구나. 난 네가 나를 사야라고 부를 때가 좋다. 그러니…….”
“전하!”
목운요가 일부러 월왕의 말을 끊었다. 다음 말을 들어 버리면 평온했던 삶이 엉망으로 뒤엉켜 버릴 게 뻔했다.
“서릉에 돌아오셨으니 더는 사야가 아니시죠. 하여 월왕 전하라 칭하는 겁니다.”
이곳에선 누구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특히 자신과 월왕처럼 발걸음 하나도 조심해야 할 사이에서는 조금만 삐끗하면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었다.
“그만 가야겠다.”
월왕은 창가에 있던 계수나무 꽃을 조심스럽게 소매 속에 넣고는 창틀에 올라 그대로 뛰어내렸다.
목운요는 살짝 주먹을 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무 아래에 보이던 인영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경릉성을 떠날 때 그는 다친 채였는데, 지금은 괜찮아진 걸까……?
그때,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눈여우가 신이 나서는 다리 주위를 돌며 애교를 떨었다.
“끼잉, 끼잉…….”
목운요는 눈여우를 슥 쳐다보고는 성가시다는 듯이 겉옷으로 녀석의 머리를 덮어 버렸다.
눈여우는 어렵사리 빈틈으로 빠져나와 자그마한 귀를 탈탈 털어 댔다. 그러곤 계속해서 목운요 주위를 빙빙 돌았다.
목운요는 그런 눈여우를 살펴보다가 침상 위에 누워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짚었다. 회귀 전, 어쩔 수 없이 진왕을 따르면서도, 사랑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특히 의술을 가르쳐 주었던 독 낭자는 사랑하는 사내를 위해 가족을 버리고 스승을 배반했으며, 마지막에는 그 사람을 위해 고운 얼굴까지 망가뜨려 옛 모습을 완전히 잃기도 했다.
목운요는 어째서 사랑 때문에 자기 삶을 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회귀했으니 그저 어머니와 안온한 나날을 보내고 싶을 뿐, 어떠한 정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 세상에선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리라.
오늘 그녀는 월왕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감했다…….
회귀한 후, 매 순간 어느 길로 걸어야 할지까지도 사전에 모두 생각해 두었건만, 월왕이 갑자기 끼어들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눈여우는 목운요가 상대해 주지 않자 살금살금 주인의 어깨 위로 기어 올라와 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뺨에 닿는 따스한 기운에 생각의 타래가 끊어지자 잡념들이 거품처럼 사라져 갔다.
목운요는 고개를 돌려 녀석의 앞발을 들고는 책망 어린 투로 물었다.
“너 말이야, 혹시 월왕이 내 속을 썩이라고 보낸 거야?”
눈여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목운요가 자신과 놀아주는 줄로 알고 신이 나서 복슬복슬한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마치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이내 목운요는 제 얼굴을 이불로 덮어 버렸다.
월왕이라는 변수가 있든, 없든 가야 할 길은 변함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황가의 사황자이자 황후의 적자였다. 황상의 안위가 위중해지면 서릉의 방어를 총괄하는 사람은 월왕이 될 것이었다.
지금은 월왕이 총애를 받지 못해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지만, 월왕의 권세가 커진다면 그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 그러면 자신에게서는 점차 마음이 멀어질 텐데, 구태여 복잡하게 머리를 굴릴 필요가 있을까?
자신에겐 더욱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었다. 특히나 내일은 재미난 연극이 대대적으로 막을 올리는 날이었다.
* * *
한편, 소우의는 한참 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목운요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는 했으나, 자신은 스스로도 만족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공연을 선보였고, 장공주가 상으로 내린 월계수 보석 장식은 모든 하사품 중 가장 귀중한 것이었다.
거기다 모친이 고심하여 손까지 써 두었으니 내일이면 온 서릉은 물론, 전국에 자신의 명성이 퍼질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만인의 칭찬을 듣는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흥분되어 그날 밤 꿈은 유난히 달콤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황후의 옷을 입은 채, 용포를 걸친 진왕의 옆에 서서 만백성의 절을 받고 있었다. 그 소리는 천하를 뒤흔들고 맑게 울려 퍼졌다…….
“아가씨, 일어나셔야 해요.”
귓가에 들리는 시녀의 목소리에 소우의의 단꿈이 확 깨졌다. 소우의는 약간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노부인께 문안을 올려야 하니 대부인께서 일찍 일어나시랍니다.”
“알겠다.”
중추절인 어제 궁중 연회에 참석했으니, 오늘은 노부인께 문안을 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노부인이 기거하는 영화원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소문원과 소지원도 휴가인지라 모처럼 노부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인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노부인에게 말했다.
“오늘 어머님의 혈색이 좋고 정원의 국화도 곱게 피었으니, 극단을 불러 떠들썩하게 집안 분위기를 띄우는 건 어떨는지요?”
소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이오. 어머니, 어제 궁중 연회에 참석하느라 곁에 있어 드리지 못해 송구했습니다. 중추절은 지났으나 달은 아직 둥글게 차 있으니 온 가족이 함께 북적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중 연회에서 일어난 일을 간밤에 모두 들었기에 상당히 흡족한 상태였다.
“그러자꾸나. 일단 다들 물러나 준비들 하고, 문원만 남아라. 내 긴히 할 말이 있다.”
“네, 어머니.”
모두 물러나자 노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어제 폐하와 장공주께서 목운요를 몹시 마음에 들어 하셨다지?”
소문원의 안색도 똑같이 어두워졌다.
“그렇습니다. 경릉성의 움직임이 워낙 커서, 폐하와 장공주께서 자연스레 좋게 보셨을 겁니다.”
“‘그 일’은 나를 제외하면 너만 알고 있다. 너도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 어찌해야 할지 계산이 섰겠지?”
소문원은 이를 악물다가 이내 아쉬움이 섞인 투로 입을 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목운요가 황상의 눈에 든 데다가, 경릉성 백성들이 목운요를 떠받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노골적으로 손을 쓰기는 어렵습니다.”
노부인은 손에 쥔 염주를 조금 더 빨리 굴렸다.
“선심을 썼던 것이 오늘 호랑이를 키운 꼴이 되었을 줄이야. 소청은 그나마 낫다만, 목운요는……. 난 항상 그 계집이 마음에 걸렸다. 겨우 잠시 얼굴을 비쳤을 뿐인데 금세 폐하와 장공주의 눈에 들어 버렸지. 그 계집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가문 전체가 그 계집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 같구나.”
“어머니, 하지만 그 아이는 신분이…….”
“그 아이는 우리 소씨 가문에서 출가한 딸의 여식이자, 시골 출신의 계집이라는 점만 똑똑히 기억해라! 알겠느냐?”
노부인이 살벌한 눈빛을 번뜩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소문원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하십시오, 어머니. 명심하겠습니다.”
노부인의 표정이 한풀 누그러졌다.
“우리가 소씨 가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지금 비단 더미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 앞길을 방해하도록 용납할 수 없어!”
“염려 마십시오. 어떻게든 이 일을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조정 싸움이라면 네가 워낙 뛰어나니 안심이다만, 집안의 소란은 아무래도 네 처가 해결할 일이다.”
“안사람 맹 씨 말입니까?”
“그래. 그렇지 않아도 요즘 운요가 맹씨 가문의 체면을 깎고 있지 않느냐? 우의한테 쏠린 관심을 두 번이나 빼앗기도 했고 말이야. 맹 씨는 당연히 운요를 무척 괘씸해하고 있겠지. 네가 옆에서 한두 마디만 거들면 맹 씨가 알아서 손을 쓸 거다. 넌 옆에서 차분히 지켜보고 있다가 때가 되면 일의 마무리만 해 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