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80화 (180/442)

180화 운요, 내려오거라

“황상께서 상을 많이 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하운방과 불선루가 자금을 더 모으면 대부분을 백성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데 쓰려고 합니다. 전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운요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내 돈을 뺏으려는 심산인가 보군. 한 푼도 손대지 못하고 내 맘대로 돈 쓰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에 진왕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준수한 얼굴에 떠오른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아주 좋소. 목 소저께서 그리할 수 있으면 좋겠구려.”

“누구나 초심은 대단해도 끝까지 해내는 자는 드문 법이지요. 그래도 지금 시작이 좋으니 한번 끝까지 잘해 보겠습니다.”

목운요가 반짝이는 눈으로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더는 꽃 감상을 방해하지 않겠소. 목 소저도 구월 가을 사냥을 잘 준비하시오.”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올렸다.

진왕을 배웅한 후, 그녀의 시선은 다시 자염 사이의 꽃으로 향했다.

“분명 평범한 꽃 한 송이일 뿐인데, 참 특별해 보이네.”

진왕이 떠나자 장완이 주우농에게 몇 마디를 하더니 목운요의 곁으로 왔다. 목운요를 따라 장완도 꽃밭으로 시선을 보냈다.

“확실히 한 송이가 튀네요. 이름은 모르겠지만 참 산뜻하고 우아해 보여요.”

“취국이라는 꽃이에요. 아주 평범한 꽃이죠.”

장완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아주 평범한 꽃이라는 말에서 목운요의 처지가 연상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밖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마세요. 서릉에서는 늘 풍문이 잦아들지 않는답니다.”

“조언 감사해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아주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소우의가 있는 곳을 보니 대황자가 곁에 서 있었다.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아주 좋아서 이따금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완이 감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과연 선녀의 자태가 따로 없네요. 궁궐 연회가 끝나면 우의의 미모에 대한 소문이 서릉에 널리 퍼지겠어요.”

목운요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눈을 살짝 내리깔아 자신의 눈빛을 숨겼다.

“맞아요. 우의 언니가 무척 기뻐하겠네요.”

* * *

밤이 깊어질 무렵, 도원항(桃园巷) 부근에는 수면 위로 아리따운 무대가 세워졌다. 무대 우측에는 삼 층으로 이루어진 환채각(环采阁)이 높이 서 있었다.

환채각은 서릉에서 명성이 자자한 기루로, 몸값이 높은 기생들이 주를 이루는 데다, 몰락한 가문의 소저들도 있어 많은 사내의 혼을 쏙 빼놓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잔뜩 모여들어서, 환채각이 이 무대를 세운 목적을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별안간 하늘에서 한 인영이 손에 댕기를 당기며 가볍게 무대 위로 내려왔다. 주위에서 놀라 내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름달 속에서 날아온 듯 서서히 내려온 인영은 흡사 선녀가 강림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여인의 자태는 우아하고 매혹적이었다. 손에 댕기를 잡고 바람을 타며 춤을 추는 모습이 흡사 바람을 맞는 선녀 같았다. 악기 소리가 점점 빨라질수록 무대 위 여인도 박자에 맞춰 덩달아 속도를 내어 돌았다.

소우의가 이곳에 있었다면 이 여인의 춤추는 자태가 자신과 팔 할은 비슷하면서도, 자신보다 이 할은 더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으리라.

관현악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자, 무대 위의 여인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환채각 삼 층에 걸려 있는 등불을 향해 천천히 절을 올리고, 무대 위에 드리운 휘장을 쥔 채 보름달 방향으로 날아갔다.

달에서 나와 달로 돌아가는 모습은 월궁의 선녀가 일부러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떠나가는 것 같았다.

“월궁에 사는 선녀로구나!”

“대체 누구기에 이토록 경국지색의 자태로 춤을 추는가? 어째서 이전에 본 적이 없을까?”

많은 사람이 방금 고혹적으로 춤을 추던 여인의 신분을 궁금해하자 환채각의 점주는 만면에 웃음을 드리울 뿐, 여인의 정체에 대해선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그날 밤, 많은 사람이 월궁 선녀를 그리워했다. 심지어 어느 서생은 간밤에 월궁 선녀의 미인도를 그려 떼돈을 벌기도 하였다.

* * *

황궁에서 나온 목운요의 뺨은 발그레했다.

대전 내에 술 냄새가 너무 짙었다. 오감이 예민한 편인지라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약간 술기운이 돌았다. 마차에 올라탄 후로는 속까지 메스꺼웠다.

이부인 척 씨가 걱정스러운 듯이 입을 열었다.

“운요야, 괜찮니?”

“조금 머리가 아픈데 괜찮습니다.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집에 가서 바로 쉬어야겠구나.”

“네, 외숙모 말씀대로 할게요.”

“암, 그래야지.”

두 사람은 이내 소씨 가문에 도착했다.

문어귀에서 기다리던 금란과 금교는 목운요를 보자마자 곧장 화색이 돌았다. 둘은 이부인에게 예를 갖춘 후 목운요 곁으로 다가갔다.

“소저, 부인께서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먼저 주무시라고 했는데도…….”

목운요는 가슴이 아팠다. 이부인과 헤어진 그녀는 서둘러 제월각으로 향했다.

방에서 불안해하던 소청은 기척이 들리자 곧장 밖으로 나왔다.

“왔구나!”

목운요는 소청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머니, 시간이 늦었는데 어찌 아직 깨어 계세요?”

“네가 걱정되는데 잠이 오겠니?”

목운요는 참지 못하고 소청의 품에 안겼다. 눈가가 살짝 시큰해졌다.

“전 괜찮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럼 됐다.”

목운요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재운 후에야 소청의 방을 나섰다.

금란과 금교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소저, 목욕물과 옷가지는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래요, 늦었으니 두 사람 다 이제 쉬어요.”

“네, 소저.”

목운요는 목욕 시중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금란과 금교는 곧장 물러갔다.

개운하게 목욕을 마친 후,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 날은 어두웠으나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마침 마당에 심은 붉은 계수나무가 떠올라 겉옷을 걸치고 창문을 여는데-

“운요!”

어디선가 서늘한 음성이 울리자 목운요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환청을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요!”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자신이 있는 이 층 창문과 가장 가까운 계수나무 아래, 아름다운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슬며시 들자 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양 깊고 광활한 눈이 보였다.

‘월왕이잖아!’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손을 꼭 쥐었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볍게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귓가를 타고 마음에 흘러 들어오자, 잔잔하던 호수에 깃털이 내려앉아 파동을 일으켰다.

목운요를 응시하는 월왕의 눈에는 짙은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와 헤어져 있는 동안 월왕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목운요가 떠난 후 그리움은 병이 되었고, 늘 그녀를 떠올리며 애를 태웠다. 그리고 다시 만난 지금은 미쳤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기뻤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그는 한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여우처럼 영리하고, 더할 나위 없이 교활한 소녀를 말이다.

그는 창가에서 당혹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목운요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요, 내려오거라.”

목운요는 그런 월왕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적막이 내려앉은 밤, 달은 물처럼 차가웠다.

처음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감정이 들자 그녀는 창틀에 살포시 올려 두었던 손가락을 점점 꽉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찌르는 통증이 느끼고 나서야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월왕 전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러자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계수나무 꽃을 잡아당겨 꺾고는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꽃 구경을 하러 왔다.”

목운요는 눈썹을 휘며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이상한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농담은 그만하세요. 전하께서 이곳에서 꽃 구경을 한다면 굉장히 성가신 일이 생길까 염려되지 않으신가요?”

월왕은 손에 쥐고 있던 꽃가지를 정확하게 목운요의 손으로 던졌다.

“이곳에 꽃은 하나뿐이지.”

손에 떨어진 꽃을 바라보던 목운요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드리워졌다.

“꽃 구경을 다 하셨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군. 그래, 너도 일찍 쉬어라.”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바깥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은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올라오세요! 누가 보면 큰일 나요.”

월왕의 눈에 웃음기가 스쳤다. 그는 가볍게 날아올라 제월각의 이 층 창틀을 밟고 목운요의 곁에 자리 잡았다.

밖에서 들리던 말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아마 지나가는 소리였던 것 같았다.

슬쩍 안도의 숨을 내쉰 목운요는 고개를 돌렸다가 활짝 웃는 월왕의 모습을 보고 순간 등 뒤가 저릿해졌다. 그녀는 황급히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벽에 바짝 붙었다.

갓 목욕을 마친 터라 목운요의 피부는 옅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옷차림은 얇아서 몸매가 유달리 가냘파 보였다.

“전하,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아마…….”

말을 끝내기도 전에 월왕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목운요를 그림자 속에 가둬 버렸다.

목운요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월왕은 그런 목운요에게 손을 내뻗었다. 그 손이 목운요의 몸에 닿으려던 차, 그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겉옷을 주워서는 살짝 털어 건넸다.

“서릉은 경릉성과 달리 중추절이 지나면 서늘해진다. 특히 밤에는 조금만 소홀해도 고뿔이 들기 마련이지. 앓아누우면 안 되니 저녁에는 창문을 열지 말도록 해.”

목운요는 확 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야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언 감사합니다, 월왕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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