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74화 (174/442)

174화 장공주, 서릉에 오다

가마의 휘장이 열리더니 새하얀 손이 먼저 나왔다. 곧이어 장공주가 황제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장공주의 얼굴에는 옅은 세월의 흔적이 보였지만, 그 아름다움은 하나도 상하지 않고 오히려 고귀한 위엄이 묻어났다.

“황상께서 이리 칠칠하지 못하게 행동하시면 어떡합니까?”

공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황제의 목걸이를 살짝 정리해 주었다. 눈동자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순간 황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님의 익숙한 동작에 갑자기 일곱 살 때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누님은 이미 선황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저 하룻밤 승은을 입은 궁녀가 낳은 자식이었다. 그래서 종종 황자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누님은 자신을 일으켜 세워 지금처럼 옷깃을 정리해 주곤 했다.

“누님, 이번에는 필시 오래 머무르셔야 합니다. 옥화궁은 모두 정리해 놓았습니다. 내부도 누님이 좋아하시는 장식으로 새로 꾸며 놓았으니 편안히 계실 수 있을 겁니다.”

황제는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고로 사람이란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움이 커지는 법이다. 근래 누님이 곁에 없자 황제는 누님이 더욱 그리워졌다.

장공주는 옅은 미소를 띤 채 황제의 뒤에 선 후궁, 황자, 공주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대전으로 가서 얘기하시지요. 아랫사람들에게서 황상에 관한 우스갯소리가 덜 나오게 말이에요.”

그러자 후궁, 황자, 공주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게 예의를 차리며 매우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장공주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절은 그만하면 됐습니다. 내가 돌아온다고 이렇게까지 궁 안이 들썩이니, 정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누님,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황궁은 누님의 집이니, 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오셔도 좋습니다. 혹 누님이 돌아오는 걸 성가시다고 여기는 자가 있다면 짐이 그자를 내쫓겠습니다.”

황제는 그리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살벌한 눈으로 뒤에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

뒤편에 있던 이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예를 차렸다. 황제는 평소 지혜롭고 현명했으나, 장공주의 일에 있어서는 유독 고집스러워진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장공주는 설핏 웃음을 지었다.

“황상, 누님을 이리 계속 세워 두실 겁니까?”

“따라오세요. 누님을 환영하기 위해 옥화전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술과 안줏거리만 올리라 하고, 우리끼리 회포나 풉시다.”

“좋습니다. 누님과 나누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실 겁니다.”

술과 안주를 올린 궁녀들이 허리를 숙인 채로 물러나자 옥화전에는 황제와 장공주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장공주의 술잔을 친히 가득 채우는 황제의 눈빛에는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의 위엄이 흐르던 제왕과는 천양지차였다.

“누님이 안 계신 동안 궁 안팎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장공주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무슨 일이든 우리 황상께서 해결하지 못할 게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누님이 곁에 없으니 이상하게 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더는 의지할 곳 없던 황자가 아님에도 지난날의 습관은 아직도 황제를 따라다녔다. 이제 황권의 위엄 또한 혁혁하여 겁 없이 도발하는 자가 없는데도 황제는 누님이 곁에 있던 시절을 종종 그리워하곤 했다.

장공주는 활짝 웃음을 지었다. 온몸에서 기품이 흘러나오고, 인품과 재간 또한 독보적인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좀 더 있을 생각으로 왔습니다. 첫째로는 황상이 보고 싶어 왔어요. 나이가 점점 차면서 유난히 가족이 그립더군요. 둘째로는 늘 마음속에 담고 있던 옛일을 해결하고 싶어서 온 것이기도 해요. 잃어버린 아이를 대신할 여자아이를 찾아서 내 이름 아래에 둘 거예요.”

“누님, 그때는…….”

황제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장공주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술잔을 들어 올렸다.

“황상을 난처하게 하고자 이 일을 언급하는 게 아닙니다. 이전이든 지금이든 그때의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난 여전히 황상께 소식을 전하는 쪽이 우선이었을 겁니다.”

“누님…….”

“지난 일은 더 언급하지 맙시다. 오늘은 모처럼 우리 남매가 다시 만났으니 한잔해야 하지 않겠어요?”

“누님께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 * *

장공주가 돌아오면서 서릉 전체가 소리 없이 들끓기 시작했다. 특히 어지간한 가문의 안채에선 수많은 소녀들이 밤새 예의범절을 익히고, 궁중 연회에서 선보일 공연을 준비했다.

한편 목운요는 약간 늘어지듯 평상에 기댄 채 공작 깃털을 가지고 눈여우와 놀고 있었다. 눈여우는 고양이처럼 깃털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방으로 들어와 그 광경을 본 소청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웃었다.

“멀쩡하던 여우가 너 때문에 성격이 바뀌었구나.”

그에 목운요가 충분히 놀았다는 듯 공작 깃털을 눈여우에게 던져 주곤, 몸을 반쯤 일으켰다.

“어머니, 내일 궁중 연회에서 경국지색의 우의 언니가 어떤 재주를 보여 줄까요?”

“흠, 가장 자신 있는 것을 선보이지 않을까?”

소청은 그리 말하다가 퍼뜩 무언가가 떠오른 양 되물었다.

“요아, 너도 무슨 공연이든 준비해야 하지 않겠니?”

“그런 공연은 장공주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하는 거잖아요. 전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으니 공연할 필요가 없지요.”

“그것도 그렇구나.”

순간 목운요가 눈꼬리를 살포시 휘었다. 그 웃음기가 유난히도 의미심장했다.

“어머니, 사서(司書)를 좀 불러도 될까요?”

“사서에게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거니?”

“네. 오래 준비한 일이 있는데, 오늘 마침내 이룰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럼 부르려무나.”

“감사해요, 어머니.”

* * *

이튿날은 팔월 십오일 중추절이었다.

전날 어머니와의 달구경 때문에 목운요는 조금 늦잠을 잤다. 다행히 중추절 연회는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열리는지라 준비할 시간은 넉넉했다.

아침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금란이 들어와 아뢰었다.

“소저, 소저께 온 명절 선물을 실은 배들이 부두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명절 선물? 누가 보내온 거죠?”

목운요는 약간 당혹스러운 듯했다.

“경릉성에서 온 것인데, 진 총관과 정 총관이 아닐까요?”

“그렇겠네요. 큰외숙모께 아뢰고, 배에 있는 물건을 받을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 * *

소우의의 몸단장을 지켜보던 대부인은 금란의 말을 전해 듣고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제 마마, 사람을 보내 물건을 조심히 옮기라고 전하세요. 실수로 운요의 선물을 망가뜨리면 안 됩니다.”

“네, 부인.”

제 마마가 사람들을 대동하여 물러나자, 소우의는 손에 들고 있던 옥비녀를 내려놓았다.

“굳이 이날 선물을 보내다니, 새삼스럽네요.”

진왕이 목운요에게 화분 두 개를 보낸 의미를 나중에 이해하긴 했지만, 소우의는 여전히 목운요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었다.

“그 아이 때문에 네가 기분 나쁠 필요가 있을까? 고작 선물 하나다.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서 그러니?”

대부인은 상당히 탐탁지 않은 눈길로 소우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우의는 황급히 뒤돌아 사죄했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방금은 그냥 한 말이니 화내지 마세요.”

“아니다. 내가 어찌 네게 화를 내겠니?”

대부인은 옥비녀를 소우의의 올림머리에 꼼꼼하게 꽂아 주고는 거울 속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딸을 응시했다. 입가에서 웃음기가 떠나질 않았다.

‘오늘부터 내 딸은 필시 대력 왕조 제일의 미녀가 될 것이다!’

* * *

중추절 당일은 백성들로 온 거리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오늘은 심야에도 통행을 금지하지 않으니 서릉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잡스러운 와중, 부둣가에 대형 선박 몇 대가 연달아 정박하더니, ‘흥순 선박’이라고 쓰인 옷을 입은 사공들이 배에 실려 있던 짐들을 조심스레 부둣가로 옮겼다.

호기심에 커다란 선박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배에서 내려지는 짐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건 무슨 나무지? 계수나무 같긴 한데, 주홍색 꽃이 피는 계수나무도 있었나?”

“색 좀 봐, 참으로 곱다. 서릉까지 붉은 계수나무를 배로 운반해 오다니, 어느 댁이기에 이렇게 씀씀이가 클까?”

일꾼들이 내려놓은 계수나무들은 주홍색 꽃송이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는 이의 넋을 쏙 빼놓았다.

그 소식은 날개 돋친 듯 퍼져 어느새 구경하러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다.

한편 하인들을 이끌고 부두에 도착한 제 마마는 둘러싼 구경꾼의 머릿수에 기함했다. 대체 어떤 진귀한 물건이 왔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였단 말인가?

금란은 옆에서 초조한 기색이었다.

“제 마마, 속히 사람을 보내 짐을 받아 오라고 해 주십시오. 멀리서 온 선물이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한데, 사람이 좀 많아야…….”

그때, 하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거기! 앞쪽에 길 좀 터 주시오! 주인댁에서 짐을 옮기러 왔소.”

도대체 누가 이렇게 씀씀이가 큰 건지 궁금했던 사람들은 주인댁에서 왔다는 얘기에 곧장 고개를 돌렸다.

“소씨 가문 사람들 아니야?”

“어쩜, 손도 크지. 강남에서 여기까지 옮겨 오려고 얼마나 돈을 많이 썼을까?”

“누가 아니래? 그나저나 이전까진 소씨 가문에서 이렇게까지 크게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무슨 내막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강남에서부터 붉은 계수나무를 운반해 오다니, 이건 서릉에서 처음 있는 일 아니야?”

“지금까진 들어 본 적도 없는 일이지. 분재 한두 개만 받아도 이미 대단한 일인데, 딱 봐도 십여 년은 된 것 같은 나무를 여러 그루나 보내다니!”

사람들이 길을 내주자, 금란은 제 마마에게 말했다.

“제 마마, 서둘러 나무를 옮기라고 해야겠어요. 진 총관님도 참, 소저께서 좋아하시는 계수나무를 경릉성에서 배로 운반해 보내셨네요. 소저께서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들의 시선이 금란에게 집중되었다. 진 총관, 경릉성, 소저 등 말이 영 이상했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누군가가 계수나무를 지키던 흥순 선박 사공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이게 소씨 가문 사촌 아가씨에게 온 계수나무요?”

사공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목 소저에게 온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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