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72화 (172/442)

172화 이부인의 호의

소우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쿵쿵 뛰는 심장을 겨우 억눌렀다.

“제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대부인은 입술을 말아 올려 웃기 시작했다.

“물론이고말고! 부친과 내가 오랫동안 고심한 계획이 다 너를 밀어주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오늘 삼황자를 만나 보니 어떠했니?”

소우의는 영민하고 출중하던 진왕을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을 살포시 아래로 떨구었다.

“삼황자 전하께선 우아하고 준수하시어 단연 좋았어요.”

대부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럼 되었구나. 이미 그분을 만나 봤으니, 이 어미가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부친과 내가 고른 사람이 바로 삼황자 진왕이란다.”

“한데 삼황자 전하는 출신이…….”

“삼황자의 모친은 비록 출신이 미천하나, 지금은 이미 비에 봉해졌다. 영웅이 된 후엔 그 누구도 과거의 신분을 거론하지 않는 법이지. 자고로 싸움은 승패만 따지는 법이야. 그러니 출신이 무슨 소용이겠어?”

소우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황자 월왕 전하는 선황후의 적자이신데도 지독히 추운 변방인 월서 지방으로 유배되셨죠. 출신이 고귀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분은 아예 폐하의 안중에도 없으시니, 싸움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끊어진 것이죠.”

대부인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래, 네가 이해했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삼황자 진왕을 생각하자 소우의는 저절로 그가 목운요와 마주치던 장면도 떠올랐다.

“그런데 진왕 전하께서 저를 택하실까요?”

“우의야, 미모는 네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무기다. 그걸로 앞길에 놓인 가시덤불을 다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야. 천하의 어느 사내가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하지 않겠니? 그리고 세상의 어느 누가 너보다 아름다울 수 있겠어?”

소우의는 붉어진 얼굴을 아래로 숙여 감추었다.

“어머니, 알겠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좋아. 내 딸이라면 반드시 이런 원대한 뜻을 지녀야지. 나와 네 아버지, 그리고 소씨 가문 전체가 너를 지원할 것이다!”

* * *

다음 날, 사흘 뒤면 황궁에서 중추절 연회가 열리는지라 노부인은 특별히 모두를 불러 모았다.

“우의야, 며칠 후면 중추절 연회가 열린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소우의는 얼른 앞으로 나와 회답했다.

“할머니, 안심하세요. 준비는 미리 해 두셨습니다.”

노부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공주께서는 식견이 보통 여인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분이시다. 가장 중요한 건 폐하께서 장공주를 줄곧 존경하셨다는 사실이지. 그러니 절대 공주님을 불쾌하게 하지 말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노부인은 한편에 서 있던 둘째 며느리이자 이부인 척 씨를 바라보았다.

“우는 몸이 좋지 않으니 이번 궁중 연회에는 참석하지 말라고 해라.”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우는 본디 몸이 약하니 입궐하면 공연히 폐만 끼칠 듯해 이번 궁중 연회엔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부인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다만, 제 슬하에는 우 하나밖에 없어서 대신 운요를 데리고 가면 어떨까 합니다. 운요는 성정이 맑고, 언행과 행동거지에도 빈틈이 없지요. 게다가 얼마 전 폐하께 하사품도 받았으니 연회에 데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목운요는 그 말에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웃음기 가득한 이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노부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거나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다. 운요는 가문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집에서 나와 같이 있자꾸나. 운요, 네 생각은 어떠냐?”

목운요는 앞으로 걸어 나와 생긋 웃으며 노부인에게 예를 갖추었다.

“저는 당연히 외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이전까진 언니들이 외조모께 효심을 바쳤는데, 이제야 제게도 기회가 생겼군요.”

“그러려무나.”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인 노부인은 이부인 척 씨를 바라보았다.

“홀로 입궐하기 외롭다면 아한이나 아정, 아령을 데리고 가도 좋다.”

노부인의 말이 끝나자 대부인의 안색이 바로 변했다.

“어머님, 그 아이들은 어쨌거나 서녀입니다. 우리 소씨 가문에서 부족함 없이 가르쳤다고는 하나, 그런 신분으로는…….”

“누구나 저마다의 인연이 있는 법이지. 장공주께선 남들과 다르게 지금껏 적통과 서출을 구분하지 않으셨다. 누가 그분의 마음에 들지 장담할 수 없으니 한 사람이라도 더 간다면 어쨌거나 그만큼의 기회가 더 생기지 않겠느냐?”

대부인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파리를 삼킨 것처럼 메스꺼운 기분이었다.

“그렇지요.”

대부인 뒤에 서 있던 소아한, 소아정 등은 예상치 못한 일에 매우 기뻐하며 노부인께 감사를 표하였다.

“그래. 내 얘긴 모두 끝났으니 다들 돌아가서 채비해라.”

“예.”

노부인의 처소에서 물러나 제월각으로 가려던 목운요 앞에 이부인이 다가왔다.

“운요, 너를 궁에 데리고 가고 싶었는데 하필 이렇게 되었구나…….”

목운요는 이부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호의를 느꼈다. 그 호의에는 소우의 공이 있었기에 얼굴에 드리운 미소에도 조금 더 진심을 담아냈다.

“그래도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외숙모.”

목운요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이부인은 앞으로 걸어가 소청의 손을 붙잡았다.

“시누가 소씨 가문에 돌아온 후 지금껏 제월각에 가 보지도 못했네요. 오늘 방문해도 될까요?”

소청은 얼른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진작에 초대하고 싶었답니다. 마침 바라던 기회가 생겼군요.”

* * *

제월각에 도착한 이부인은 실내 장식을 둘러보더니 저도 모르게 경탄을 내뱉었다.

“전혀 못 알아볼 정도예요. 물건 하나하나가 수작이라 눈도 못 떼겠어요.”

소청은 사금에게 차를 내오라고 한 다음 이부인과 함께 대청을 한 바퀴 돌았다.

“전부 요아가 꾸몄답니다. 전 어떤 부분이 어떻게 좋은지는 알지 못하니 비웃지 마세요.”

이부인 척 씨는 활짝 웃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저야말로 그런 고상한 체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걸요. 차라리 시누처럼 거침없는 성정이 더 잘 맞아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오늘 여기 온 건 쉬다 가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운요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서랍니다.”

“요아한테요?”

“맞아요. 제가 우를 너무 응석받이로 키워서 그 아이는 영 막무가내거든요. 한데 운요는 성정이 무난해서 그런지 우하고도 잘 지내더군요.”

목운요는 사금이 올린 찻잔을 받아 이부인과 소청의 손에 건넸다.

“외숙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매끼리 잘 지내고 못 지내고 할 게 어디 있습니까?”

이부인은 목운요를 끌어당기며 퍽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남들은 우를 보면 괴팍하다고만 생각하지. 그래도 어쩌겠니? 내겐 하나밖에 없는 딸인 것을. 매일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칼로 심장을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야. 그래서 차마 버릇을 고치지 못했지. 운요야, 앞으로도 우와 잘 지내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혼자라 너무 외로웠거든.”

애통함을 억누르는 이부인의 목소리에 소청은 덩달아 가슴이 아팠다.

목운요는 소청의 눈빛을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월각은 서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가서 귀찮게 할지도 몰라요.”

이부인은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귀찮게 하기는.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려무나. 그나저나 이번엔 정말 아쉽다. 폐하께서 중추절 궁중 연회에 관리들의 식솔을 데려오라고 명하신 건 장공주께서 관리들의 여식 중 한 명을 간택하여 딸로 삼으시겠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소청은 전혀 실망하지 않은 눈치였다.

“저와 요아는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 이미 만족해서, 그런 지나친 욕심은 내지도 않는답니다. 어쨌거나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본래 이부인은 소우를 위해 제월각에 들렀던 것이었지만, 소청의 말을 들은 후 그녀를 좀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우리 어미들은 항상 그저 딸아이가 평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일 겁니다. 오히려 제 분수를 알고 그 삶에 만족하면 즐거울 수 있으니까요.”

소청은 빙그레 웃었다.

“우린 스스로 만족을 안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 눈엔 우리가 변변치 않게 보일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시누와 제가 이토록 마음이 잘 맞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변변찮아 보인다 해도 그 상태로 얼마든지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잖습니까? 비바람을 무릅써 봤자 밟을 것은 흙탕물뿐인걸요.”

이부인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장공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갖은 궁리를 할까?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면 온몸에 피비린내를 묻힐 준비를 해야 했으니, 그녀의 말대로 참석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이부인은 차를 마시며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만 돌아가겠다며 일어섰다.

목운요와 소청은 그런 이부인을 배웅한 후 방에 돌아왔다.

사실 소청은 이부인에게 시원스레 말하긴 했으나 내심 진정이 되질 않았다. 딸아이는 현재 소씨 가문과 진왕에 대한 복수를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신분으론 분수를 모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장공주의 눈에 들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었다.

“요아야, 궁에 가지 못해서 아쉽진 않니?”

고개를 들어 소청을 바라본 목운요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고는, 황급히 어머니의 어깨에 찰싹 붙어 아양을 떨었다.

“제 인생에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어머니의 딸이 된 거예요. 그러니 꼭 다른 누구의 딸이 될 필요는 없죠. 설마 저를 내치시려는 건 아니죠?”

소청은 활짝 웃으며 비단결 같은 목운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게 자식이라곤 너 하나뿐이다. 보배 같은 딸을 아끼고 아껴도 모자란데, 어찌 내칠 수가 있겠어? 그저 염려되어 그렇지.”

“어머니, 그런 생각 마세요. 하늘에서 튼튼한 동아줄이 떨어진대도 저는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든 저 자신만이 가장 믿을 만한 존재인걸요.”

“그래. 네가 무얼 하든 어미는 항상 네 편이란다.”

“역시 어머니가 최고예요.”

목운요는 눈을 휘어 웃으며 흡족한 얼굴로 소청의 어깨에 턱을 갖다 댔다.

“참, 어머니. 작은외숙모는 어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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