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70화 (170/442)

170화 거센 흐름을 휘젓는 손

소우는 재빨리 정신을 차린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너무 급작스럽게 움직인 탓에 가슴이 조여 와 기침이 나왔다.

“콜록, 콜록…….”

목운요는 소우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에 있는 혈을 꾹 눌렀다.

“바람만 불면 쓰러질 몸인 걸 알면 얌전히 방에 있어야지, 왜 돌아다닙니까…….”

소우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탁’ 하고 목운요의 손을 쳐 냈다.

“바람이 불면 쓰러진다고요? 당신도 저들과 똑같이 날 얕보는 건가요? 내가 당신을 귀찮게 할 것 같아서?”

목운요는 피부가 연약했다. 소우의 힘이 세지 않았지만 맞은 손이 빨갛게 변했다.

그에 소우는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고, 어느새 두 눈은 물기를 머금었다. 왜 갑자기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목운요의 눈을 보고 있으니 까닭 없이 크나큰 억울함이 솟아올라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목운요는 눈을 들어 소우를 봤다.

“본인 몸은 본인이 잘 알지 않아요? 백 세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구태여 알려 주지 않아도 돼요. 나도 내가 죽을 거라는 건 알아요. 내가 괜히 마음을 썼네요! 미워요!”

소우는 말을 끝내자마자 휙 몸을 돌려 걸어갔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마마들이 소우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며 분분히 캐물었다.

그때, 목운요가 소우를 잡아당겨 다시 의자에 앉혔다.

“갑자기 왜 성을 내요? 아픈 사람이라고 내가 혼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요.”

“소우 아가씨는 몸이 약하신데 이렇게 대하다니,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소우와 함께 왔던 마마는 일찍이 목운요를 좋지 않게 봤다. 그래서 바로 차가운 목소리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목운요를 대했다.

목운요는 담담하게 마마를 바라보다 다시 눈을 세워 소우를 쳐다봤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서 억울할 게 뭐가 있어요? 많은 경우에 죽음이 사는 것보다 더 편안할 때가 있죠. 그리고 둘째 숙부와 외숙모께서 지극히 사랑해 주시니…….”

“무슨 일이지?”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위에 있던 마마와 시녀들이 냉큼 인사를 올렸다.

“큰 도련님을 뵙습니다.”

소청오의 눈길은 목운요와 소우에게 향해 있었다.

“동생, 몸도 안 좋은데 어서 돌아가서 쉬어라. 숙모께서 걱정하시겠어.”

소우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선 좀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방금 보였던 약함은 착각이었나 의심될 정도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소우는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 아이는 일 년 내내 병을 달고 사오. 그래서 성격도 다른 동생들과 다른 면이 있으니 조금만 참아 주시오.”

목운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퍼졌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어머니께 돌아가야 해서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잠깐!”

소청오는 무의식적으로 목운요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목운요가 고개를 돌리자 또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 진왕 전하를 잘 아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고서야 진왕 전하께서 일전에 하신 일들을 그렇게 잘 알 리 없었다.

목운요는 미간에 힘을 줬다.

“오라버니,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

소청오는 괜스레 옆에 놓인 분욱도를 쳐다봤다.

“국화의 모양은 다양하고 제각각이지.”

목운요는 갑자기 ‘피식’ 하고 냉소를 흘렸다.

“오라버니, 더 이상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국화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모든 품종이 유명한 건 아니죠. 어떤 국화는 꽃을 피우자마자 만인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국화는 평범하게 태어나 사람들의 눈에 들지 못합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태생이 부귀하게 태어나고, 어떤 이는 평범한 운명을 타고나죠.”

소청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 뜻이 아니오.”

그는 그저 목운요에게 삼황자를 넘볼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 무슨 뜻인가요? 저와 진왕 전하는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제가 언니의 앞날을 어지럽힐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돌연 소청오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우의와 무슨 관계지?”

목운요는 입가를 말아 올렸다.

“그럼 그냥 제가 허튼소리를 했다고 생각하세요.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겠어요.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목운요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

소청오는 제자리에 서서 깊고 무거운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목운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치마가 바람에 펄럭여, 그녀가 바람과 함께 언제든 사라질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분욱도 한 송이를 꺾었다. 꽃잎이 아름답고 요염한 것이 마치 복숭아꽃을 닮아 있었다. 목운요의 결점 하나 없는 얼굴과도 닮아 있었다.

소청오는 손으로 국화를 쥐고 꽃잎을 하나씩 땅으로 떨어뜨렸다.

“국화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모든 품종이 진귀한 건 아니다. 그런데 진귀한 것들보다 유달리 야생 들판에서 자란 국화가 신경 쓰이는구나…….”

* * *

대청에서 소우의가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렸다.

“짙고 독특한 치장으로 봄빛부터 가을빛까지 아우르네. 천 년의 아름다움으로 하늘을 수놓고 인간계를 구월황처럼 바꾸는구나…….”

“우의가 외모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학식도 감히 따라올 자가 없겠습니다. 맹 부인께선 참으로 복이 많으십니다!”

대청 안의 부인들은 소우의를 둘러싸고 연신 칭찬을 했고, 목운요에겐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소청은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속상한 듯 딸의 손을 잡고 옆에 앉혔다.

“요아야…….”

“어머니, 배고프진 않으세요?”

이런 연회에 볼 것은 많다지만 먹을 만한 것은 별로 없는 법이었다.

소청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빛은 어딘지 불안해 보였다.

“난 괜찮다. 그보다 조금 전에 귀빈께서 오셨다던데…….”

일전에 목운요는 소청 앞에서 진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소청은 당시 딸아이의 눈에 스치던 원한의 빛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목운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인사만 하고 가셨으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

“그럼 다행이구나.”

소청은 한시름 놓았다. 그를 피할 수만 있으면 딸은 다시는 전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편 목운요는 차가운 눈빛을 애써 숨겼다.

어떤 일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법이었다. 만약 피할 수 있었다면 회귀 전에도 진흙탕 속에 숨어서 편안하게 살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의 농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번 생에는 숨지 않을 작정이었다. 목운요는 거센 흐름을 휘젓는 손이 되고 싶었다. 몰아치는 물살에 휩쓸려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나았다.

“목 소저는 아까부터 왜 말이 없나요? 우의 언니가 읊은 시가 맘에 안 들어요?”

돌연 맹언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대청 안이 조용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다들 재밌는 구경이나 해 보자는 듯한 태도였다.

목운요는 미소를 유지한 채 평소처럼 청아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맹 소저께서는 저더러 시골 사람이라 국화의 품종도 모른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지금은 우의 언니의 시가 어떻냐고 물으시네요. 이건 일부러 모욕을 주려는 것 아닙니까?”

대부인의 미간이 움찔했다. 대부인도 사실 맹언연이 매우 못마땅했다.

오늘 연회의 목적은 소우의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맹언연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대놓고 소우의를 핑계로 목운요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뺨을 맞은 것에 대해 복수하고 싶다곤 해도 이렇게 품위 없이 행동해선 안 되었다.

목운요의 직설적인 물음에 맹언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냉소를 지었다.

‘어차피 이제 난 체면이고 뭐고 잃은 지 오래야. 더 잃을 것도 없다고!’

“목 소저, 그리 속이 꼬여서 어떡합니까? 오늘 연회는 목 소저를 위해 연 것이니, 목 소저에게 우의 언니가 시를 읊은 것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는 게 뭐 잘못됐습니까?”

목운요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서 소우의가 방금 읊은 시의 뒷부분까지 마저 읊었다.

“짙고 독특한 치장으로 봄빛부터 가을빛까지 아우르네. 천 년의 아름다움으로 하늘을 수놓고 인간계를 구월황처럼 바꾸는구나. 옅은 안개가 얼어 도도한 서리가 되었네. 동쪽 울타리가 마치 무릉향 같구나. 때때로 술 취한 눈으로 훔쳐보니 도잠(陶潜, 중국 육조 시대의 시인)이 원랑(阮郎, 선녀와 결혼했다고 전해지는 남성)으로 보이네.”

맑고 수려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눈 깜짝할 사이 목운요에게 쏠렸다.

소우의는 눈을 내리깔고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나아가 목운요의 손을 잡았다.

“운요 동생도 이 시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목운요가 담담히 웃었다.

“아버지를 따라 책 몇 권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시를 본 적이 있어요. 이 시의 표현을 무척 좋아한답니다. 특히 ‘옅은 안개가 얼어 도도한 서리가 되었네.’라는 부분 말이에요. 마지막 두 구는 또 어떻고요? 전체적으로 시를 담담하고 쉽게 써 내려간 느낌이에요. 이렇게 말하니 아버지께선 연신 웃으시며 제가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구절은 사랑으로 힘들어하는 여인을 표현한 것으로, 사랑에 빠진 여인이 술에 취해서 다른 이를 사모하는 정인으로 착각했다는 내용이었다. 목운요가 아직 어리니 이해를 못 하는 게 당연했다.

순간 목운요의 미소가 점점 옅어지고, 곧 얼굴에 애써 참았던 그리움과 슬픔이 보였다.

“아직도 여전히 마지막 구절의 뜻을 모르니 참 부끄럽습니다. 부친께서는 하늘에서 저를 보시며 웃고 계시겠지요. 어휴, 절 좀 보세요. 아버지 얘기를 꺼내니 이렇게 감상에 젖어서는. 부인들과 소저들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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